[스피노자 vs 연암] 마음의 감옥을 벗어나는 힘 > 횡단에세이

횡단에세이

홈 > 커뮤니티 > 횡단에세이

[스피노자 vs 연암] 마음의 감옥을 벗어나는 힘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필벽성옥 작성일15-06-30 16:50 조회28,499회 댓글3건

본문



마음의 감옥을 벗어나는 힘


대중지성 3학년 박 성 옥 


1. 슬픔과 두려움의 혼란 속에서

이 글을 쓰기 두 달 전에 절친했던 친구가 돌연사를 했다. 평소 건강하고 열심히 살던 친구였는데 갑자기 뇌출혈로 죽음을 맞이했다. 급히 119 구급차로 병원에 옮겼으나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의학이 발달한 대명천지에 이럴 수가 있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렇게 허술하다니. 겨우 50대 초반인데 고생만 하다 간 친구가 애통하고 안타까웠다.  

그녀는 나와 같은 건물에서 다른 학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평소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고충을 나누던 사이였다. 몇 년 전 어느 날 그녀가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서 말했다. “원장님, 내가 요즘 연애를 하는 기분이에요.” 10년 전 남편을 잃고 혼자서 자식을 키운다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하던 친구라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연애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인문학 강좌가 열리는 수성아트피아였다. 그곳에서 연암의 <열하일기>를 만났다. 나는 그녀 덕분에 인문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감이당에 공부하러 올라가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면서 “난 이렇게 돈, 돈, 돈 하다가 죽을랍니다” 자조했다. 올해 들어 유난히 자금 때문에 고심을 하더니 그녀는 속절없이 갔다. 나와 비슷한 처지로 살았던 친구라 남 일 같지 않았다.

1.jpg


그런데 이상했다. 슬픔을 넘어서 지독한 무섬증이 몰려왔다. 온 몸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러다 나도 뇌출혈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뒷목이 땅겼다. 어둠과 적막함이 무서워서 방마다 형광등을 환하게 켜놓고,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 놓았다. 종일 걸어 다녔다가, 백팔 배를 했다가 나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서 진저리를 쳤다. 오죽하면 “내가 그 친구와 이 정도로 친했던가?”라는 생각을 다 했을까.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임을 알면서도 두려운 감정을 털어내지 못했다. 인간은 이렇게 감정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걸까. 대체 감정이 무엇인데 이렇게 어마무시한 힘을 발휘하는가.   

2. 우리가 감정에 예속되는 이유 

스피노자에게 감정은 몸의 문제이다. 스피노자는 감정을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신체의 변용이며, 그 변용의 관념’(스피노자, 『에티카』, 황태연 옮김, 비홍출판사, 2014년, 160쪽)이라고 정의한다. 무척 색다른 해석이다. 감정은 우리 몸의 변화로 지각되는 관념이다. 그리고 신체의 활동능력과 밀접하다. 존재의 활동역량이 커지거나 작아지는 변화에 따라 감정도 달라진다.

우리 사유의 버팀목은 몸이다. 정신의 판단이나 감정은 신체가 지각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외부 변화에 대한 신체의 감각은 착각과 오류를 일으키며 불안정하다. 그래서 우리는 외부에 대해서 참되고 적합한 인식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부분적이고 부적합한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조건 속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감정에 예속되어 살아가는 이유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는 힘과 존재를 위축시키는 힘 사이에서 끊임없이 파동치고 있다. 몸의 활동능력이 커지는 것을 인지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반대로 몸의 활동능력이 저하되면 슬픔을 느낀다. 슬픔의 정서는 활동능력을 저하시키고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킨다. 맞는 말이다. 기분이 우울할 때는 심신이 무력해져서 꼼짝하기도 싫어진다. 이미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지만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활동능력의 증감과 변화를 통해서 감정의 롤러코스트를 탄다. 

스피노자의 감정 해석에 의하면 나는 존재의 역량이 극도로 저하된 상태에 놓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슬픔을 넘어 두려움이었을까. 이 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였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을 때 마다 이런 두려움이 되풀이 되면 어쩌나 겁이 났다. 스피노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도 일종의 슬픔이라고 말한다.

2.jpg


공포는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는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변덕스러운 슬픔이다. 우리는 희망에 의지해 있는 동안 그 사물의 결과를 두려워한다. 공포 없는 희망은 없으며, 희망 없는 공포도 없다.(스피노자, 『에티카』, 220쪽)

두려움은 아직 희망이 있을 때 생기는 슬픔이라는 것이다. 희망을 품고 있기에 두렵다는 말은 다소 위안이 되었다. 아직 삶에 대한 희망이 있어서라는 말 아닌가.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독한 죽음, 돌연한 죽음은 피하고 싶다는 나의 희망이 두려움으로 표현된 것인지도 모른다. 스피노자는 죽음을 외부와의 나쁜 마주침이라고 했다. 존재 스스로는 죽음으로 가는 힘이 없다. 어찌 보면 두려움도 살고자 하는 욕망이며 자기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코나투스인 셈이다.

모든 인간의 본성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망에 있다. 우리의 본성이 더 큰 완전성으로 향할 때 비로소 기쁨이 된다. 존재의 역량이 약화되면 우리는 슬픔의 정서에 휘둘리게 된다. 외부의 사건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슬픔에 사로잡힐 때 어떻게 감정의 회로를 돌려놓을 수 있는 걸까. “그래. 감정을 바꿔야 해” 결심한다고 맘대로 되지 않는다. 감정의 생성과 소멸은 육체처럼 작용과 반작용의 물리적인 법칙을 따르고 있다. 감정을 바꾼다는 것은 외부의 힘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꾼다는 뜻이다. 친구의 죽음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나는 자신의 본성에 맞게 외부와 관계 맺고, 다시 존재의 역량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 해법을 연암에게서 찾아보고자 했다.

3. 연암이 담헌을 잃었을 때

<연암집>을 읽어보면 연암은 살아생전 부모, 누님, 형수님, 친구들의 죽음을 많이 겪었다. 친구의 죽음을 대하는 연암의 태도는 나와 사뭇 달랐다. 연암은 담헌 홍대용을 잃고 맨 먼저 중국 항주의 친구들에게 부고를 전한다. 중국 친구들과의 교유를 소중히 여겼던 담헌의 마음을 가장 먼저 살핀 것이다. “홍담헌, 휘 대용, 자 덕보가 올해 10월 23일 유시에 영영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평소에는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중풍으로 입이 비틀리고 혀가 굳어 말을 못 하다 잠깐 사이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향년은 53세입니다.”라고 부고를 쓴다.(박지원, 『연암집』(상), 신호열, 김명호 옮김, 돌베개, 2012년, 340쪽) 공교롭게도 담헌이 죽은 나이도 이번에 죽은 내 친구와 같았다.

부고를 보낸 후 연암은 담헌의 편지와 시문들을 펼쳐놓고, 관을 어루만지며 통곡한다. 벗을 잃은 연암의 슬픔은 지극했다. 두 사람은 평소 거문고와 생황, 양금을 연주하며 음악의 흥취를 즐겼는데 담헌이 죽은 후 연암은 다시는 음악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박종채, 『나의 아버지 박지원』, 박희병 옮김, 돌베개, 2011년, 115쪽) 자신의 음악을 이해해 주던 종자기가 세상을 떠나자 거문고를 부셔버렸던 백아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서 연암은 친구를 위해 묘지명을 쓴다.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 대목은 이렇다.

“중국의 벗들과 학문을 논하는 걸 좋아했던 담헌은 중국 유리창에서 우연히 엄성이라는 선비를 알게 된다. 말은 안 통했지만 그들은 필담으로 유교경전의 뜻을 논하며 우정을 나눈다. 그 후 엄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담헌이 애사를 지어서 중국으로 보냈는데 글이 당도한 날은 마침 그의 제삿날이었다. 사람들은 이는 지극한 정성이 혼령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9년이 지나 엄성의 유고집이 돌고 돌아 담헌에게 전해졌는데, 그 문집에는 엄성이 그린 담헌의 초상화가 들어있었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이국 멀리 있는 벗의 얼굴을 그렸을까. 엄성은 담헌이 증정한 조선 먹을 꺼내 향내를 맡고 가슴에 얹은 채 죽었고, 마침내 사람들은 그 먹을 관에 함께 넣었다고 한다.”(박지원, 『연암집』(상), 343쪽)

연암은 왜 엄성과 담헌의 일화를 묘지명에 남겼을까. 그는 담헌이 얼마나 우정을 소중히 하고 학문을 즐긴 선비였는지를 글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이 묘지명을 읽으면 살아있는 담헌을 만난 듯, 그의 품격과 인성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 글에 대해 이재성은 ‘벗으로 시작해서 벗으로 맺었지만 그 사람이 인륜에 독실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박지원, 『연암집』(상), 344쪽)고 논평했다.

고인도 이렇게 자신을 잘 알아주는 벗이 있다면 아무런 회한 없이 떠났을 것이다. 살아있을 때의 그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삶을 담아 글을 쓰는 것이 연암이 벗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이야말로 먼저 간 벗을 제대로 추모하는 방식이 아닌가. 누군가의 죽음은 그를 기억하는 타자의 의식 안에서 의미가 살아난다. 연암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의 사라짐을 글로 남겨서 기억 속에 그를 영원히 살아있게 했다. 

3.jpg


연암은 묘지명과 애사, 제문을 많이 지었다. 어떤 형식의 글이라도 그의 문장은 빼어나지만 죽음을 접해 쓴 문장은 특히 빛이 난다. 여타의 제문들은 망자의 가족 계보나 벼슬 행적 등을 형식적으로 나열하지만 연암의 스타일은 달랐다. 그의 글은 슬픈 감정을 고취시키거나 고인의 일생을 건조하게 기록하지 않는다. 연암은 자신과 관계 맺었던 일들과 그 사람의 생애를 가장 소중하게 기록했다.

연암이 쓴 큰 형수님 묘지명을 읽으면 병석에 누워있던 형수가 시동생의 따뜻한 말에 벌떡 일어나 기뻐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큰 누님 묘지명을 보면 누님이 시집가던 날 어린 동생이 분에 먹물을 묻히고 떼를 쓰는 모습에 오누이의 애틋한 정이 담뿍 담겨있다. 연암이 중시한 것은 살아있던 그 사람의 본성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관계 맺었던 인연이었다. 연암은 그 사람의 존재감과 생애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문체로 삶의 서사를 써내려갔다.

나는 연암의 글쓰기가 슬픔의 감정을 뚫고 나가는 능동적인 행위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연암이 외부와 관계 맺는 방식은 글이었다. 먼저 떠난 이들의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글을 씀으로써 연암은 마음속에 불멸하는 존재를 간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글이 삶의 전부였던 연암의 본성에도 가장 어울리는 일이다. 글쓰기는 연암 자신의 본성도 살리고 벗의 본성도 살리는 관계의 방식이라고 본다. 그렇게 감정의 수동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활동능력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삶의 역량이다.


4. 능동적 신체를 만드는 역량

감정은 그것과 반대되는 더 강력한 어떤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면 억제될 수 없다. 정신이 어떤 감정에 사로잡힐 때 신체가 변용된다. 이 변용은 그것과 반대되는 더 강력한 변용으로 신체를 자극하여 변화시키는 물체적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면 억제될 수도 제거될 수도 없다.(스피노자, 『에티카』, 241쪽)

스피노자는 감정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서 다른 방향으로 몸을 변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수동적인 감정을 능동적으로 바꾸려면 반대의 벡터를 가진 더 강력한 힘으로 신체를 변화시켜야 감정이 바뀐다. 그 방향이 자신의 본성에 가까울수록 존재의 역량을 살리고 능동적인 신체로 만든다.


4.jpg



어떤 사건이 벌어질 때 우리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알 수 없다. 원인은 또 다른 원인의 연쇄작용에 의해 벌어진다. 원인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으면 정신은 수동적인 상태가 된다. 타당하지 못한 관념일수록 더 수동적이 된다. 스피노자는 “정신은 참된 관념을 파악할 때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고찰한다. 정신은 자신의 활동능력을 파악할 때 기쁨을 느낀다.”(스피노자, 『에티카』, 213쪽)고 했다. 자신에 대한 이성적인 인식이 우리를 기쁨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이성적인 인식은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길이다. 또 마음의 감옥을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나는 막연하고 멀게 여겼던 죽음을 구체적으로 사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누구도 죽음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만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타자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을 밝혀준다. 죽음은 내게 매번 새롭게 생성하고 소멸하는 자연의 일부로서 지금, 여기의 삶을 긍정하라고 말해준다.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담담하게 맞으려면 지금, 여기에서 여한 없이 살아야 한다. 자기의 본성에 충실하게 사는 것만이 여한 없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의 변화에 더 많이 접속하고, 더 능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삶의 역량이 남은 자의 숙제일 것이다.

처음에는 친구의 죽음을 주제로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감정을 회피하고만 싶었다. 글을 쓰려고 마음먹는 데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스피노자 말대로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일도 커다란 역량이 있어야 했다. 이 에세이를 쓰면서 나는 깊은 두려움과 우울증을 벗어났다. 몸도 회복되었다. 글을 쓰면서 신체가 바뀐 건지, 신체가 바뀌어서 글을 쓸 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글을 쓴다는 행위가 존재의 방향성을 트는 운동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겠다. 하나의 문턱을 넘어서는 기분이다.

댓글목록

정태남님의 댓글

정태남 작성일

너무 잘 읽었습니다 희망과 공포의 연관성에 감탄이 나왔어요

필벽성옥님의 댓글

필벽성옥 작성일

반갑습니다. 해숙샘. 청주팀들도 잘 지내시는지 저도 궁금했습니다^^ 함 만나요.

전화노인님의 댓글

전화노인 작성일

언니, 성옥언니.
늘 '잘 지내시는지, 공부는 물론 잘하고 계시겠지' 라며
먼데서나마 늘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언니글 올라와서 반가웠고,
맘고생 하셨을 거 생각하니 잠시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언니,
하나의 문턱을 또 넘으셨구려!
잘하셨에요! 또 이렇게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하여요.

신체가 바뀌었다는 언니의 모습, 조만간 뵙고 싶습니다.
늘 평안히 건강하시어요
  ㅡ멀리서 동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