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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스님 2월 남산강의 <기억이란> 후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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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태진 작성일13-02-07 12:03 조회4,7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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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렸는데 잘렸네요..글 올릴 수 있는 양이 정해진듯..어제 올린 부분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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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일단 심호흡 세 번하고 하는게 중요합니다. 그냥 평상시 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바뀌었으면 좋겠네라고 말할 때 자신도 모르게 경직이 일어나고 긴장도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뇌로 산소공급이 안됩니다. 이 때 심호흡을 해줌으로서 뇌에 산소공급이 원활해 집니다. 이로서 첫째 부착되어 있는 불편한 심리상태에서 편해질 수 있습니다. 둘째 말의 기억에 붙어있는 채널들이 엷어집니다. 이것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이 어떤 말을 하려는가를 잘 살피게 됩니다. 이로서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기억에 강력한 제동이 걸립니다. 미래를 결정하는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인식활동의 채널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수행입니다.
 

언어 트레이닝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입니다. 세포 하나하나가 언어화된 코드라 할 때, 말을 바꾸는 것은 말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모든 기억들을 바꾸어내는 것입니다. 이 때 인식활동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내 삶의 의지처가 과거에 쌓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을 지혜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기억들을 통해 이미지로 만들어진 것, 그리고 이것이 근원적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생명은 계속 자기동일성을 만들어가지만 우리는 한번도 동일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인식의 연속된 이미지의 동일성만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변해가는 것에 대해 이를 허상이라 파악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해온 철학적 전통이 있어왔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이런 식이지요. 하지만 석가는 변해가는 것이야말로 실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허상이라는 근원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냅니다. 무상한 것이야말로 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세상을 보는 다른 기억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른 기억, 정각(正覺)입니다.
 

무상은 그런 점에서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과거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변한다는 점에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공()입니다. 이 때 공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공이라는 양상이 있다는 게 아니라 변화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번뇌없는 양상으로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부족한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은 살아가는 힘이지만, 자신을 옭아매기도 합니다. 이 때 기억이 뭔가를 살피는 것이 정념수행입니다. 이처럼 계속 보다보면 안다는 것과 심리현상이 분리됩니다. 알아차려진 심리상태와 마음이 분리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저 놈이 나를 힘들게 했구나라는 불유쾌한 감정을 갖게 되고, 이것이 신경물질을 낳고, 이것이 삶을 우울하게 합니다. 하지만 정념수행을 통해 심리현상을 우리가 바깥의 책상 보듯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나에게 불유쾌한 감정이 없어지게 됩니다. 동일한 기억이라도 알아차리는 현상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이로서 기쁨, 슬픔에도 들뜨지 않는 평온한 상태가 됩니다. 이 때 이미지가 실재란 없고 무상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억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온전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온전히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정념수행을 통해 알아차림은 기억을 전면적으로 다르게 구성하고, 삶을 다르게 구성합니다. 지혜란 이 알아차림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완벽한 깨달음이 구경각(究竟覺), 궁극의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경각이라 할 때 궁극적 깨달음이 있는게 아니라 현재가 완벽한 구경각입니다. 이것외에는 다른 어떤 삶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으로 수행을 삼습니다. 이럴 때 자기 존재를 전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식의 전환이라는 차원에서는 완벽하게 다른데, 우리가 사는 실내용은 다른 게 없습니다. 생명의 언어가 순간순간 바뀜을 아는 것, 활동 그 자체가 온전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미래의 결과가 나의 현재의 활동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니고, 온전히 자신이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흔히 성공한 사람들은 계속 부족함을 느껴 내부적으로 허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에만 충만한 삶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느 스님께서는 책의 제목을 텅빈 충만이라고 지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행은 구경각입니다. 인식의 전환인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수행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를 온전히 사는 것이지요. 기억의 이미지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삼계를 초탈했다고 말을 할 때, 과거가 부정되거나 미래가 현재를 흔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과거-현재-미래가 오롯이 들어있게 됩니다. 왜 이렇게 살았을까라는 후회나 자책이 아니라, 이렇게 되어야지라고 생각하고 계속 현재의 자신이 휘둘리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이 온 삶인 듯 사는 것입니다. 이는 기억을 밖의 책상 보듯 하는 훈련, 정념수행을 통해 가능합니다. 이처럼 현재를 자신의 완성된 상태로 온전히 긍정하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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