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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배우는 미래의 공부법 - 고미숙 선생님 특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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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공 작성일13-02-26 18:59 조회6,601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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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전평론가 고미숙입니다. 오늘 저는 고전에서 배우는 미래의 공부법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근대에 와서 자본주의 문명과 더불어 지식은 분화, 발전합니다. 인식론적으로 인간은 자연과 분리 됐고 자연을 대상화합니다. 주체는 견고하고 이성적으로 충만하죠. 모든 일을 주체가 실존적으로 결단하면 된다는 전제가 나옵니다. 이게 휴머니즘이에요. 철학적으로 휴머니즘은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사회윤리로서의 휴머니즘은 박애, 친절, 배려인데 철학으로의 휴머니즘은 인간 중심주의입니다. 자연의 탯줄을 끊어버리는 거죠. 그러면 자연은 어떻게 됩니까? 균질화 됩니다. 수적으로 양적으로 다 계량화 됩니다. 분석하고 쪼개고 이용하고. 그 자원을 착취하는 거죠. 이게 근대적 이분법입니다.

공부도 따라서 분화됩니다. 점점 쪼개져서 20세기 후반에 가면 이 세계는 무한한 파편으로 구성돼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이 20세기적 사유의 패러다임입니다.  이런 지식의 배치에 들어가는 순간, 이미 이 세계에 대해 이렇게 해석 하게 됩니다. 인간과 자연은 교감이 불가능하다, 교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자연은 잘 활용하는 거야, 그 대신 잘 분석하고 쪼개서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찾아내면 돼.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 자체도 파편화 됩니다. 계몽주의 교육이 시작되는 거죠.  모든 국민에게 계몽의 빛을 선사하는 것이 대학의 기본 목적입니다. 교육의 평등이 이루어졌죠. 신분에 상관없이 일정한 조건이 되면 누구나 대학에 가서 계몽의 세례를 받아요. 그러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 되어서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자기의 결단대로 된다고 보는 거에요. 그리고 가로 막는 자연은 헤쳐가면 된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20세기 초반에 이런 철학적인 믿음은 다 깨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20세기적인 이분법, 주객을 나누고 마치 인간이 실존적으로 결단하는 뭐가 된 것처럼 여기며 살아갑니다.  실제로는 아니에요. 지식을 많이 쌓을수록 삶의 척도나 질이 올라가리라고 기대를 했는데 사실 전혀 상관 없었어요. 
 
몸으로 터득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왜 그럴까요? 지식이 내면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공부법과 근대의 공부법은 프레임이 전혀 다릅니다. 뭐가 다르냐 중세에는 어떤 공부도 몸으로 터득했습니다. 터득, 아는 만큼 세포에서 뭔가 전기적인 파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알면 즐거워야 해요. 그런데 여러분 중에 학교에서 배움의 즐거움을 훈련 받은 분 있으세요? 배움의 즐거움을 느껴보신 분은 있으세요? 물론 있을 겁니다. 있는데 기억을 못하실 거에요. 왜 못하냐 내가 처음 어떤 지식에 접속했을 때 당연히 신체는 기쁜데 이걸 기쁨으로 느끼지 못하는 배치가 있어요. “자 미적분을 깨우치게 됐으니 너는 이 세계에 대해서 엄청난 해석의 권리를 갖게 됐다”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이 없죠. “우리나라 문학사와 역사를 알아서 내 존재의 계보학을 탐구할 수 있게 됐다. 감성의 영역이 확장되었음을 즐겨라” 이런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근대 교육은 지식이 주는 삶의 온전한 기쁨 자체를 차단해 버립니다.

지식은 정보입니다. 정보는 양으로 환원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몸이 소외됩니다. 옛날의 유학자들은 유학의 도를 깨우치면 자다가도 일어나 춤을 춥니다. 不知手之舞之蹈之足之(부지수지무지족지도지)라는 것이 거기서 나온 거거든요. 이 세상을 내가 알게 됐다, 땅만 알고 나를 모르는 것은 공부가 아니고 나만 알고 세상이 돌아가는 걸 모르는 것 역시 공부가 아닙니다. 나를 아는 만큼 세상의 이치를 아는 거고 우주가 순환하는 원리를 아는 만큼 나라는 존재를 탐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게 분리가 되어 버렸어요.  즐거움하면 사랑하고 짜릿하게 놀고 눈과 귀가 즐겁고 쾌락적인 걸로 설정이 되고 공부나 지식을 쌓는 일은 노동이 되어 버린 거에요. 이게 바로 삶을 분리하는 지식 배치의 결과입니다. 스펙이라는 말 자체는 신체를 억압하는 말입니다. 굉장히 폄하적인 말이에요. 사람의 수준을 굉장히 떨어뜨리는 말이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했어요. 어떻게 보면 나를 정보 덩어리로 생각하는 거란 말이죠. 어떤 사람도 양적으로 스마트폰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천재의 개념이 바뀝니다.
박학다식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검색을 하면 되요. 문제는 정보를 엮고 조직하는 힘이거든요. 이게 바로 관계가 실존을 지배하게 되는 관계주의 철학인데 이것이 동양 사상의 출발점이에요. 동양은 출발부터 존재가 곧 우주에요. 몸과 우주가 하나고 그리고 마음이 곧 세상입니다. 그러면 이 사회에 관계가 남는 거죠.

존재 자체로 내가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을 말씀 드릴게요. 여기서 핵심은 정보의 양이 아니고 삶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조건에 가도 내가 이 사람과 이 사람을 연결하고 이 사람이 갖고 있는 다양한 파편적인 정보를 엮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으면 그게 지성이고 지혜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관계를 열 수가 있어요. 그런데 내가 일과 딱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나는 일을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죠. 일이 끝날 때까지 괴롭습니다. 견디는 거죠. 일이 끝나도 쉬지를 못합니다.  보상받기 위해 더 큰 쾌락으로 이것을 상쇄시키려고 하거든요. 쾌락은 쉬는 게 아닙니다. 더 많은 에너지를 쓰는 거죠. 그래서 쉬는 시간이 없어요. 주말에 혼자 집에 있으면 안절부절 못하시죠? 현대인들은 나를 정보의 매개, 도구로 만들어버려요. 삶을 지배하는 건 정보고, 정보를 통해서 얻는 건 돈이 되는 거에요. 관계의 장을 열려면 가장 먼저 내 몸을 배려해야 된다, 내 몸이 잘 쉬고 있는가 일을 하면서 내가 이 일과 얼마나 감흥하고 있나를 체크하셔야 되요. 일을 열심히 하고 잘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과 내가 교감을 하고 있는가? 영 교감이 안된다면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 의학이 발달하고 물질적으로 굉장히 풍요로워졌는데도 질병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 이유입니다. 몸 전체를 배려할 수 있어야 몸과 삶이 만나게 됩니다. 이런 게 공부의 기초인데 동양에서는 지식을 배우면 거기에 윤리가 따라 붙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는 게 모든 지식에 들러붙어 있습니다.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에는 이런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정보로만 갑니다.
 
 
매뉴얼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라
그래서 현대인의 삶이 다 매뉴얼입니다. 일단 이 매뉴얼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게 21세기적인 지식의 새로운 배치입니다. 왜 고전이 다시 미래가 될까요?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맞물리거나 혹은 일직선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에요. 사람의 인생도 앞을 향해 전진하는 게 아니고요. 굉장히 우주적인 리듬을 타면서 갑니다. 고전이 오래된 미래라고 하는 설정이 가능해진 이유입니다. 고전의 공부법에는 몸, 생리, 사회적인 윤리, 도가 있습니다. 도라고 하는 건 생사의 관문을 여는 겁니다. 죽음을 이기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전세계를 다 가져도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사람의 삶은 왜곡되고 반쪽 밖에 안됩니다. 진시황 같이 중국 천하를 통일한 사람도 죽음의 지혜가 없었죠. 그래서 객사했습니다. 영성은 영적 탐구, 자기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구입니다. 그래서 본성을 알아야 합니다. 본성을 탐구해 들어가면 생사의 관문이 있는 거에요. 이게 자연입니다. 우주라고 하죠. 그러니까 인간이 자연과 절연되고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은 생태계가 파괴되어서 지구가 멸망한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뭘 해야 하나, 내 안에 있는 자연을 탐구해야 합니다.  나를 알면 자연의 이치를 알고 자연의 이치를 알면 생사의 관문이 열립니다.
 
그래서 저는 공부에 대한 노하우를 얻을 때 이런 방법을 씁니다. 인류 최고의 멘토를 골라요. 내가 정말로 열정적으로 따르고 싶은 삶, 저는 공자, 노자, 부처입니다. 이분들이 했던 공부가 바로 제가 얘기한 공부입니다. 몸을 가지고 했어요. 내 몸이 어떻게 구성이 돼 있는가? 이 몸을 움직이는 건 마음이고 욕망이죠. 욕망을 끝까지 탐구하는 겁니다. 도대체 인간의 욕망 바닥에 뭐가 있나? 끝까지 갔어요. 그러고 나니까 어떻게 사는 게 제일 좋은 삶인지 나왔습니다. 그게 공자의 인(仁)이고 부처의 깨달음이고 노자의 무위자연입니다. 이것은 몸으로 실험을 한 겁니다. 몸과 일생을 다 걸고 한 실험이에요. 그래서 적극적으로 우리가 접속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니까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납니다. 그게 생사의 관문을 열었다, 하는 거죠. 이들은 이렇게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습니다. 이것이 인류가 터득한 최고의 집단 지성의 결과물입니다. 이 매트릭스가 없으면 이후에 인류의 문명사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논어를 버리지 못하고 불경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거죠. 왜 그럴까요? 물질의 법칙으로 다 살아졌는데 왜 그럴까요? 이것 말고는 철학적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이것은 종교라는 틀로 딱 제도화 돼 버렸어요. 서양의 기독교도 마찬가지에요. 기독교도 새로운 존재의 윤리였거든요. 그런데 그게 제도 안에 들어가 버립니다. 제도 은총이라는 말이 있어요.  교회를 가서 어떤 형식을 취하면 나는 구원 받을 것이다, 절에 가서 어떤 형식을 지키면 나는 윤회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이게 제도 은총이에요. 뭐가 빠졌냐 하면 이 가르침으로 인해서 내 몸에서 일어나는 깨달음의 상황이 빠졌어요. 깨닫지 않아도 되는 거에요, 개인들은. 집단적으로 묻어가면 되는 겁니다. 어떤 제도에 묻어서 소속감을 갖고 천국에 가고 극락에 간다 라는 게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종교에 대한 멘탈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내가 성경을 진리로 탐구하겠다 이렇게 하는 신도는 거의 없어요. 불경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금강경을 읽어서 깨닫겠다 이러지 않죠. 제도 안에 묶어 놓고 대학에서의 공부, 학교에서의 공부는 오로지 물질적 문명을 탐구하는 것으로 분화를 했죠. 이 것을 성, 속의 분화라고 합니다. 이 경계도 깨져야죠. 통섭이나 횡단이 제대로 되려면 지식과 삶이 회통을 해야 되고 성과 속이 회통을 해야 됩니다. 이게 바로 문명의 주인이 되는 길인 거죠. 그럼에도 아무도 내가 진리탐구의 주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교육이 평등화되고 대중화 됐는데 누구도 자신을 지식 생산의 주체로 삼지 않아요. 교회와 사찰이 이렇게 많고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자기가 스스로 죽음의 지혜를 탐구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거죠. 그러니까 공부는 직업을 위한, 그것도 직업 윤리도 아닌 돈을 위한 직업으로만 남게 된 겁니다.
 
 
이용후생(利用厚生), 정덕(正德)
이게 저는 20세기 공부가 달리고 달려서 스펙으로 압축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스펙까지 갔으면 이제 공부는, 이 패러다임은, 끝나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새로 시작할 것인가? 그 답을 고전에서 동양 고전 인문학에서 찾아보면 바로 이겁니다. 밥벌이를 하고 생존을 해결하는 직업적 교육과 사회적 윤리의 주체로서 내가 자율적으로 윤리를 설정할 수 있는 그런 윤리적 훈련, 나아가서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탐구자가 되는 것. 이용후생(利用厚生), 그리고 정덕(正德)입니다. 이용은 물질을 활용하는 것, 삶을 도탑게 하는 거죠. 삶을 두텁게 하려면 집단적으로, 서로 윤리가 자발적으로 흘러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덕을 바로 잡고 생사의 주체가 되는 거죠. 죽음에 대한 해석을 병원의 장례식이나 목사님이나 스님에게 맡겨 놓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이 관문을 통과하는 그게 덕의 주체가 되는 거죠. 이것을 할 줄 알면 동양에서는 성인이 된다고 했어요. 이게 동양의 고전에서 배우는 공부입니다. 이것을 서로 회통할 수 있으면 그러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늘 배움의 자세로 그 배움의 기쁨과 열정을 누리실 수가 있는 겁니다.
24시간 안에서 인생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뤄져야 합니다.  24시간 중 8시간은 잠을 자는 시간인데, 8시간 주무십니까? 잠도 능력입니다. 반드시 숙면을 해야 합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꿈을 꾸지 않아야 합니다. 꿈을 꾸면 숙면이 아니에요. 깨어서 활동하는 거랑 똑같아요. 나머지 16시간 중에 8시간은 일을 합니다. 돈 되는 일만 한다는 생각을 버리면 누구나 일을 합니다. 그럼 나머지 시간에는 뭘 할까요. 4시간은 공동체적인 네트워크를 위해서
쓰셔야 합니다. 일이 끝나도 바로 집에 가지 않게 되는 건 뭔가 오늘의 일을 교감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에요. 고민도 털어놓고요. 실제로 마음의 질병이 모두 있죠. 어느 시대인들 인간이 희노애락을 겪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치유하는 게 그 네트워크 안에 다 있었어요.  동네 무당이기도 하고 한의사이기도, 주술사이기도 합니다. 인생을 다양하게 본 사람들이 상담을 받아준 거죠. 치유는 친구 안에서 대개 소화가 되야 합니다. 이게 안되기 때문에 정신과나 심리상담소를 찾아가는 거에요. 좋은 회사라면 회사 안에서 고민을 정말 있는 그대로 털어 놓는 장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4시간이 남죠? 그 시간은 온전하게 자기 존재와 대화를 하는 시간입니다. 이걸 우리가 영성이라고 하는 거에요. 누구나 영적으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인류가 지금까지 종교를 놓지 않았죠. 이 시간에 자신과 근원적인 대화를 나눕니다. 양생술에서는 단전호흡을 한다, 불교에서는 무념무상의 상태로 명상을 한다, 기독교에서는 기도를 한다는 시간이겠죠. 이것이 인류가 갖고 있는 아주 보편적 패턴입니다. 여기에 이용후생 정덕이 다 있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지난 100년 동안 싹 망각 해 버린 거에요. 그 대가가, 고민은 너무 많아졌는데 고민을 털어놓을 곳이 없고 고민을 들고 전문가를 찾아가야만 치유가 되는 이런 아주 말도 안되는 상황입니다.  전문가도 전문지식만 있어요. 정신과 의사가 치료를 하려면 옛날 인디언 추장만큼의 통찰력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죠. 배울 기회가 없잖아요. 매뉴얼만 배운 거에요. 거기에 맞춰서 리스트업이 되면 거기에 맞는 대화를 해주고 안되면 약물입니다. 고민을 나눌 존재가 친구 안에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배워야 되고 누구에게나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야 합니다. 누구도 스승으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누구에게도 내 지혜를 나눠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을 잘 살고 성공하신 거에요.
 
 
늘 배우고 가르치는 삶
나의 하루에 이런 식의 인생 배분이 있는가, 인생 전체에서 나는 이런 리듬을 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라고 물으세요. 그리고 학습을 하세요. 배우는 거에요. 열심히 배우고 통과의례를 해서 성인이 되는 거에요. 성인이 되는 건 내가 온전히 두발로 자립하는 겁니다. 자 그럼 우리는 이 만큼의 대안이 있습니까? 돈을 위한 공부를 했어요. 노후를 위해 벌고 또 사후를 위해 벌어요. 그러면서 계속 불안합니다. 인생 전체가 불안해요. 일이 있는데도 불안해요.  이건 온전히 불안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되는 거죠. 어떤 분야든 자기가 쌓은 경륜이 있죠? 이걸 가르쳐 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식에게는 가르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후배가 필요하고 자신의 경륜을 받아들일 수 있는 후학이 필요한 거에요. 가르쳐야 됩니다. 만약 직장이 끝났다, 그 다음부터는 아주 홀가분한 존재가 되어서 지혜를 전수해 주는 어떤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는 거에요. 이것이 가장 좋은 노후 대책입니다. 이것 말고는 절대 대안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20세기 이전에 인류가 집단적으로 쌓아왔던 좋은 삶의 패턴, 하루에서 이것을 얼마나 배분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전제를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시절을 만나면 그것이 아주 활짝 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게 고전에서 배우는 미래의 공부법입니다.
댓글목록

자연님의 댓글

자연 작성일

동의보감,몸과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라는 책으로 고미숙 선생님을 첨 만나고 감이당까지 오게 되었네요.
직접 볼순 없지만 이렇게라도 강의를 보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한다는 당위성만 갖고 실천은 늘 흐지부지 됐는데..이제는 정말 실천할때인것 같습니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오공님의 댓글

오공 작성일

작년 겨울 기업 인문학 강연에서 고미숙 선생님께서 하신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강의 3부작 요약 정리본입니다. 현장감은 다소 떨어지겠지만 고미숙 선생님의 강의가 고프신(?) 분들을 위해 퍼왔습니다.

여유님의 댓글

여유 댓글의 댓글 작성일

고픈 배 조금 채웠습니다. ^^ 
현실적인 이유로 강의 참석이 당장은 어려운 탓에, 늘 홈페이지만 기웃거리고 있던차인데... 이렇게 글로나마 고미숙 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되니 아주 기쁘네요^^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부탁드리고 싶네요^^

양력 2024.4.23 화요일
(음력 202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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