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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어떻게 사이 좋게 지낼 것인가? 고미숙 선생님 특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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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공 작성일13-02-26 19:00 조회5,1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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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미숙입니다. 오늘은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요즘 10대들을 만나면 너무 돈을 밝힙니다. 목표가 돈밖에 없어요. 우리는 왜 이렇게 돈을 좋아할까? 어떻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돈 타령만 할 수가 있나? 이건 광기죠. 공부나 지식을 아무리 쌓아도 돈에 다 몰수가 돼요. 그러면 다 잘 살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잘 살지도 않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돈을 원할까요? 요구할까요?
 


나는 생산이 우선인가, 결핍이 우선인가
철학에서는 욕망과 욕구를 구분합니다. 욕망은 생산하는 거에요. 삶을 생산하는 겁니다. 생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돈이 필요한 거에요. 욕구는 결핍으로서 돈을 원하는 겁니다. 나는 결핍이 우선인가 생산이 우선인가를 첫 번째로 기준으로 삼으면 일을 하면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지 안 받는지를 체크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고유하고 독창적인 삶을 생산하기 위해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저금을 하고 주식을 하는가?’ 이것이 욕망입니다. ‘남은 있는데 나에게 없는 것을 위해서 돈을 버는가?’ 이렇게 비교와 서열이 들어가면 결핍이에요. 그러면 이 게임은 끊임없는 갈증이에요. 절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3만 불이 되도 이 세상의 돈을 다 긁어모아도 이 갈증은 절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돈을 어떻게 쓰면 제일 좋을까? 원래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죠. 어떻게 모으고 저장할 것인가만 배우죠. 그래서 그냥 맹목이 돼요. 무조건 벌어요. 많을수록 좋아요.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마을도, 어떤 사회단체도, 다 그냥 다다익선(多多益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전혀 하지 않아요. 그럼 나는 벌기만 하는 주체이지 쓰는 주체는 아닌 거죠. 산다는 건 수렴을 하면 발산을 하고 발산을 하면 수렴을 하는 거고, 이것의 끊임없는 운동이 삶입니다.
그런데 한 쪽이 완전히 배제된 채로 돈과 관계를 맺고 있는 거에요. 시급 5천 원을 벌든 천억을 벌든 조 단위를 벌든 가장 중요한 건 돈과 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돈의 철학이 없는 한, 모든 사람은 돈이 노예입니다. 철학이 있어야 돈은 벌고 쓰는 거고, 있다가도 또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가야만 해요. 단 하나만 모자라도 또다시 어마어마한 결핍을 마음에 담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남보다 엄청나게 버는데도 삶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아주 어리석은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돈이라는 건 끊임없이 흐르는 것입니다. 절대로 내가 딱 가두어서 고체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돈의 우주적 원리입니다.
 


돈, 화폐, 그리고 자본
그래서 제가 이 돈에 대한 욕망을 경제학적으로 공부를 했더니 돈, 화폐, 자본 이렇게 세 가지로 표현이 됩니다. 우선 돈은 굉장히 일상적인 단어에요. 물품도 여기에 포함이 됩니다. 돈에는 물건과의 물물 교환의 속성을 많이 담겨 있어요. 물건이 대체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돈이라고 말할 때는 선물의 개념이 조금은 들어 있습니다. 화폐는 A와 B 사이를 중계하는 거죠. 매개자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초월자에요. 철학적으로, 경제학적으로 화폐는 초월적 위치에서 모든 물건과 사물에 등급을 매깁니다. 우리가 화폐를 쓰는 순간 천 원짜리와 이천 원짜리는 현저하게 다른 것으로 감각을 하게 돼 있습니다. 결국 우리 무의식과 감각, 정서를 지배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화폐에는 늘 뭐가 있죠? 여왕이나 그 나라의 최고 상징이 되는 존재들이 들어가 있죠. 신사임당, 퇴계 이황은 국가화된 상징이고요. 그러니까 국가와 화폐는 동일한 역할을 하는 겁니다. 국가는 사람들 속에 있지 않아요. 사람들 외부에서 사람들을 초월적으로 지배하고 규제하는 존재죠. 국가의 등장과 화폐의 등장은 동일하게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국가적 멘탈을 갖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화폐적 멘탈을 갖게 되죠. 그래서 19세기 경제학자들은, 화폐가 등장하면 가장 먼저 공동체가 사라진다는 걸 감지했어요. 화폐가 나오면 국가적 사회가 됩니다. 통일되고 집중되고 규제와 처벌 이런 것들이 작동하는. 그래서 공동체는 깨집니다. 드디어 20세기에 자본이라는 게 나왔어요. 자본의 정의가 뭘까요? 자본은 자기 증식만을 목표로 삼는 화폐입니다. 그 이전의 화폐는 여러 가지 속성을 두루 갖고 있었는데 자본은 증식 말고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해요. 자본의 속성 자체가 투자해서 증식되지 않는 것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해요.
 


우리의 삶, 돈에 몰수당하다.
자본의 초기는 아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인간적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가장 노골적인 정글 안으로 가게 된 것,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금융자본이었던 거 같아요. 무조건 달려요. 정말 갈 데까지 간 거죠. 이렇게 되면 사람의 무의식까지 교환 관계 안에 들어갑니다. 존재가 위태로워지는 거죠. 교환이라고 하는 것은 화폐가 삶을 지배하는 거거든요. 이 사이에 몸이라는 게 있는데 몸이 다 화폐화됩니다. IMF 이후에 자기계발을 굉장히 열심히 했죠. 몸을 갈고 닦은 거에요, 돈이 되게. 공부를 하는 것도 오로지 돈이 되게. 학벌도 돈이 되게. 무의식까지 교환으로 아주 얼어붙어 버리는 거죠. 그러면 굉장히 뛰어나고 영악해 질 것 같은데 가장 중요한 에로스가 침묵합니다. 그래서 지금 10대와 20대들은 정말 청춘이 아니에요. 자유로운 연애가 가능한 시대에 그렇게 연애가 안될 수가 없어요. 돈이 없어서, 직업이 없어서 연애를 못합니다. 그리고 연봉이 안돼서 결혼할 엄두를 못 냅니다. 원래 에로스는 그런 걸 다 무시하는 거에요. 생각해 보세요. 돈과 직업, 차 이런 걸로 연애하면 그건 상품이죠. 옛날에는 여자는 14살, 남자는 16살에 다 결혼했어요. 이때 성징이 나타나서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거든요. 3천 년 동안 내려오던 인류학적인 배치가 완전히 화폐에 몰수됐어요. 3천 년 동안 그렇게 가난했어도 청춘은 일단 이때 짝짓기를 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대학에 들어와서 졸업하려면 보통 서른 살 되어야 해요, 남성들은 그렇죠? 좀 쉬다 직장에 들어오죠. 이때부터 대출받아 집사고 선을 보기 시작해요. 그리고 40. 불혹의 나이죠. 불혹, 이제 더 이상 성적 미혹에 빠지지 마라 아닙니까? 성적 미혹을 수습해야 할 시기인 거에요. 그런데 이때 공식적으로 성욕이 합법화되는 관계에 들어갑니다.

인류가 왜 문명을 발달시켰는가? 식욕과 성욕을 충족하면서 그다음 스텝으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식욕과 성욕을 충족한 다음에 사회적 네트워크를 하고 자기 존재를 고양시키는 일을 하려고 열심히 일을 하는 거죠. 사회적인 소통을 해야만 몸이 순환이 됩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다 고독한 겁니다. 이건 절대 고독이에요. 이 고독과 자본주의하에서 오는 상실감이 주는 고독을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내가 외로워 이런 건 죄다 결핍에서 온 인정욕망이에요. 타인의 시선이 부족해, 하는 겁니다. 누가 나를 사랑해 주길 바라고 누군가 나를 위로해 주길 바라고 나를 치유해 주길 바라는 거죠. 이걸 철학적으로 인정 욕망이라고 해요. 여기서 오는 상실감은 중독입니다. 고독이 아니에요. 이렇게 삶의 원리로 보면 우리가 돈에 의해 얼마나 많은 걸 몰수당했는가를 알 수가 있죠.
 


교환, 증여 그리고 순수 증여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인류가 경제학적으로 경제의 관점에서만 취해온 관계들이 있어요. 교환과 증여, 순수 증여입니다. 교환은 화폐가 우선하는 거에요. 교환은 엄밀해야 해요. 그래서 서류를 작성하죠. 거기에는 한치의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은 지켜야 하고요. 그래서 신용인 겁니다. 이 신용을 어기면 어떻게 돼요? 법적 처벌을 받죠. 믿음을 깨면 어떻게 될까요? 그 네트워크에서 아웃 되겠죠. 어떤 게 더 무서우십니까? 공동체는 서류가 없어요. 법적인 것도 없죠. 하지만 신뢰를 잃은 순간 그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죠.

증여는 뭐냐? 내가 사회적으로 재물을 순환시키는 거에요. 20대까지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고 교환관계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어차피 살아야 하니까. 자본의 생리와 원리를 터득해서 자립을 해야 돼요, 자립이 정말 중요해요. 이것은 일단 부모로부터 어떤 원조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이미 내가 남의 돈을 타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자립이 안될 수도 있어요. 자립을 해서 40대가 되면 인생 한 마디가 끝나잖아요?
40대 이후에는 내가 이 재물을 어떻게 순환할까를 생각하는 증여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건 필연 질의에요. 버는 것만 생각하고 저장만 생각하는 건 인간의 삶에 딱 반쪽의 욕망밖에는 안 된다는 거죠. 증여가 없는 경제 구조는 없어요, 지금도 증여가 있어요. 첫째가 세금입니다. 우리가 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건 세금으로 증여를 많이 하는 훈련을 하자는 거에요. 그런데 세금 내면서 내가 누군가와 뭘 나눈다는 기쁨을 느껴본 분 계세요? 세금 내기 정말 싫죠. 세금이 원래 국가적 차원의 증여 시스템인데 아무도 기뻐하지 않아요. 역시 교환관계 안에 먹혀 버린 거에요. 그다음에 기부라는 걸 합니다. 그런데 기부도 내가 순환에 참여한다는 즐거움이 없어요. 왜냐하면 돈이 숫자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돈과 나는 행복하게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돈과 나는 뭐로 만날까요?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증여를 할 때 하나의 커뮤니티를 구성할 수 있으면 이야기가 구성이 됩니다. 그게 돈과 공동체가 만나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이제는 공동체에 이야기가 아닌 물건들이, 재화가 왔다 갔다 해요.
돈보다 더 센 게 사람 인맥이거든요. 사람이 움직이면 돼요. 교환의 틈새를 파고들어야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능력을 갖고 있어요. 절대 이 능력을 포기하지 마세요. 역학을 공부해도 가장 좋은 인생은 인복이 있는 인생이지 재물, 권력 이런 걸 많이 가진 인생이 아닙니다. 증여에는 반드시 서사가 들어가야 한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만큼 순환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절대로 나이 들어서 돈은 많은데 외롭고 심심하고 어찌할 지 모르고.. 이런 상황으로 가지 않습니다.
 


가장 큰 증여는 무소유
자 그 다음에 마지막 단계가 순수 증여인데 이 말은 잘 안 들어 보셨을 거에요. 순수 증여는 주객이 없는 보시에요. 주체와 객체가 없는, 그냥 주고 받음이라는 행위만 있는 상태. 여기에 들어가면 모든 가치가 전도됩니다. 양이라는 건 싹 사라져요. 질만 남아요. 가장 큰 증여는 무소유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보다 더 큰 증여가 없답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하죠. 많이 벌어서 나중에 할거야, 이건 증여와 교환 사이 밖에 안됩니다. 갖지 않음으로써 세상에 베풀어야 해요. 세상의 부와 재화는 이미 결정돼 있잖아요? 내가 많이 가지면 지금 누군가는 뺏긴 거에요. 경쟁의 논리가 이거 아닙니까? 자본은 상생을 모릅니다. 상생이 거의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재물이 갑자기 많이 들어올 때는 뱀을 만난 듯이 뒷걸음쳐야 하는데 지금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그것을 항상 지향하고 있죠? 주식으로 대박 쳤다 그러면 영웅이 되고 로또 맞으면 이거는 하늘이 내린.. 이건 하늘에서 재앙이 내린 거죠 사실은.
 


송곳 꽂을 땅이 없네, 송곳 마저 없어지네
내가 욕망에 이끌리지 않으려면 내공을 욕망보다 더 크게 만들어야 해요. 그런데 욕망을 더 크게 하는 이치는 내가 얼마나 순환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내가 갈고 닦아서 아는 게 아니에요. 돈이 들어왔는데 그릇이 작으면 정말 토네이도가 지나가듯이 지나가 버립니다. 사람마다 재물의 그릇을 타고 나거든요. 절대로 그 그릇 이상으로 가질 수 없어요. 빚이 많다는 것은 타고난 그릇이 없는데 너무 많은 걸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게 빚으로서 내 앞에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제 무소유로 승부해야 하는 거죠. 무소유의 끝장이 송곳 꽂을 땅이 없었네 입니다. 송곳 끝이 요만하잖아요? 얼마나 가난한 거에요? 여기서 역설이 일어나요. 그 송곳마저 없어집니다. 송곳마저 없어지면 어떻게 돼요? 가짐과 가지지 않음의 경계가 없어져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는데 천하를 다 가진 거에요. 그래서 무소유가 되고 더 나아가면 자기의 삶이 증여가 돼요. 그게 순수 증여에요. 순환의 네트워크 안에서 직업을 갖고 재물을 다스리고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게 있으면 반드시 증여와 순수 증여라는 영역까지 내 삶을 확장해야 합니다.
지금 삶의 성공의 목표는 죄다 물질로 이루어졌죠. 집, 10년 후에는 얼마를 모을까? 뭘 가질까? 교환으로만 사는 거에요. 교환 관계로 살면 에로스가 침묵하고 가장 먼저 사람이 사라집니다. 그게 결정적 손실입니다. 내가 교환으로 대하면 상대방도 나를 교환으로 대하게 되어 있어요. 이걸 해체해 버려야 합니다. 무장해제 시켜야 사람과 사람이 맨 얼굴로 만날 수가 있어요.

교환 관계로 만나면 교환이 끝나면 끝나는 순간 그 관계는 끝나죠. 이게 가족관계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직장에서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가족에게 말을 잘 못하죠? 왜 어려운 일을 나눌 수 없죠? 가족 간에 증여의 관계가 부족하다는 거에요. 오로지 교환관계로 되어 있어요. 사교육을 못 시켜줘서 미안해, 명품을 못 사줘서 미안해. 세상에 이런..아니 그럼 이 사람들은 자기 부인과 애를 뭐로 생각하는 거죠? 돈의 화신으로 생각하는 거죠. 그럴 것이다 전제해 놓은 거죠. 이런 관계는 정말 끔찍해요. 핵가족 조차 해체 되고 있어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데 해체 돼요. 사회가 이렇게 단단하게 일부일처제를 지켜주려고 하는데 왜 안될까요? 교환 관계로는 어떤 관계든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가족이 살려면 증여라고 하는, 내가 언제든지 증여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유산을 증여한다고 하지만 유산은 증여가 아니죠. 유산을 내 자식에게 왜 주는 거죠? 나하고 유전자를 공유하니까. 이건 증여가 아니에요 교환이에요.

회사를 공동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그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회사의 모든 사람을 교환관계로 대하는 한, 나는 누구한테도 배울 수 없고 누구와도 교감할 수가 없어요. 여기가 내가 수행하는 공동체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이상하고 아무리 변태적인 직장 상사도 배울 점이 있어요.배우는 건 지식의 양이나 인격이 아니라 내게 배움의 열정이 있는가가 결정하는 거에요. 그러면 공동체가 돼요. 그래서 증여를 훈련하는 거죠. 내가 먼저 자립을 하고 그 다음에 여유가 생길 때 나를 증여의 주체로 설정하겠다, 그 다음에 내가 내 존재에 대해 더 탐구할 때는 반드시 순수 증여의 경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비전을 갖고 있으면 돈 때문에 몸을 버리고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돈 안에서 다들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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