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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 고미숙 선생님 특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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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공 작성일13-02-26 19:02 조회6,26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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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미숙입니다. 오늘은 동의보감을 통해 본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
동의보감 같은 동양 의서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병을 만든 것도, 그 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도, 그리고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십시오’ 라는 것이 동의보감을 쓴 허준이 강조한 점이죠. 그런데 현재 우리의 의료 체계는 의사가 다 고쳐줄게, 의사 말을 잘 들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철학자 미셀 푸코는 현대 권력의 핵심을 의료 권력이라고 했습니다. 병원이 사람의 몸에 대한 모든 표준과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조기 검진, 정기 검진, 여러분 자주 하시죠? 그런데, 그렇게 미리 조심하고 예방하는데 왜 병은 사라지지 않을까요? 아니, 오히려 점점 더 많아지는 이유는 뭘까요? 현대 의료는 병이 사라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아요. 병이 사라지면 병원도 사라져야 하니까요. 엄청나게 많은 병을 물리쳤다고 현대 의학은 승전보를 알렸지만 20세기가 지난 이후에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병들-암, 우울증, 치매-이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건 어떤 돌림병보다도 무섭게 일상에 퍼져있어요.
 
 
 
의료 담론, 모든 연결 고리를 끊어 내다
우울증은 도시인들의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울증 정도의 경력이 있어야 왠지 내가 세련된 도시의 삶을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수잔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이란 책에서 현대인들은 질병을 은유화하고 있다고 지적했어요. 20세기 초에는 폐병이 은유화 됐습니다. 모든 예술가와 시인, 작가는 폐결핵이었어요. 폐결핵을 앓지 않으면 자신이 낭만주의 시인으로서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폐결핵이 많았죠. 요즘 드라마를 보면 병의 은유화를 쉽게 만날 수가 있어요. 초기에는 백혈병이 주류를 이루더니 식상해지니까 굉장한 난치병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병을 앓을수록 주인공은 예뻐집니다. 더 우아해지고 사랑을 받죠. 주목할 것은 은유화 되는 병들이 거의 심장과 폐처럼 상초(심장 아래)에 있는 병이라는 겁니다. 하초(방광 위)에 있는 병을 앓은 여성들은 거의 없어요. 대장암이나 치질, 당뇨는 굉장히 치명적인 만성 질병이지만 이런 병을 앓는 여자 환자는 거의 안 나오죠. 예술과 문학의 담론이 구성한 표상이에요. 상초에 있는 병을 앓으면 정신적으로 순화되는 느낌을 받고 하초에 있는 질병을 앓으면 뭔가 형이하학적이다 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서 상초와 하초의 연결 고리를 끊은 겁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사람들의 사유와 의식을 지배한 것이 현대 의료의 신체관이자 질병관입니다. 모든 연결 고리를 끊어 놓은 핵심이 의료 담론이에요. 생사를 끊고 질병과 일상을 단절시키고 상초와 하초를 단절시키고 영혼과 육체를 끊었어요. 영혼의 구혼은 병원에서는 일어나지 않죠. 교회 같은 데를 가야 합니다. 반대로 몸의 문제는 교회에서 해결되지 않아요. 병원에 가야죠. 병원에 가면 몸을 낱낱이 쪼갭니다. 굉장히 건강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면역계가 붕괴돼 버렸어요.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삶을 너무나 괴롭게 하는 병들, 아토피와 알레르기 비염 같은 병들이 다 여기서 온 거잖아요?
 
 
 
몸과 우주는 하나다
동의보감을 배우면 몸과 우주가 하나다라는 넓은 시야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육십갑자(六十甲子)와 음양 오행(陰陽五行), 풍수(風水)를 배우게 되죠. 서양의 인체해부도는 굉장히 늘씬한 8등신 정도의 남자입니다. 동의보감의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를 보면 등을 타고 오르는 관들이 있고 머리가 있고 눈코입이 있고 오장육부가 있어요. 팔다리는 없죠. 그리고 배꼽(단전)이 있습니다. 눈이 단전을 보고 있어요. 단전호흡을 하는 살아 있는 신체의 측면도죠. 서양의 해부학은 정면도인데 살아 있는 신체가 아닙니다. 해부돼 있는 신체에요. 이에 반해 신형장부도는 살아서 지금 생명 활동을 하는 신체에요. 전혀 다른 체계죠. 비교 대상이라기 보다 몸을 전혀 다르게 보는 두 개의 프레임입니다.
 
 
 
생명 활동을 유지하는 토대, 정기신(精氣神)
그러면 살아 있다는 것은 뭘까요? 몸이 우주와 연동돼서 대칭적 활동을 하는 겁니다. 동양에서 인체의 활동은 자연의 모든 활동과 연동이 됩니다. 그래서 정기신(精氣神)이라는 것이 생명의 토대가 되는 거죠. 정(精)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물질적 토대에요. 우리 몸 안에 있는 수액대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수액은 피가 되고 담음이 되고 가래, 침이 되죠. 전부 물이에요. 우리 몸의 80% 이상이 물이잖아요? 동의보감에는 ‘남성은 정액을 잘 보호해라’ 라는 말이 수도 없이 나옵니다. 이것만 잘하면 장수하고, 신선도 될 수 있다, 이것이 동의보감의 양생술(養生術)입니다. 우리 몸에서는 신장이 주관하는데요. 여성은 자궁으로 이어져 있죠. 그래서 신장이 약하면 자궁이 약합니다. 남성은 신장이 약하면 일단 허리가 붕괴되죠. 허리가 약하면 척추를 타고 올라가서 물이 뇌로 공급이 안됩니다.

정(精)이 있으면 움직여야죠.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곳곳에 정을 분사해 주는 힘이 필요한데 그게 기(氣)에요. 이건 폐에서 합니다. 패기가 좋다는 건, 바깥에 있는 기운을 끌어다가 몸에서 돌리고 다시 내뱉고 이걸 계속해서 잘한다는 겁니다. 사람의 수명은 다 타고 나는데 수명의 핵심은 날짜가 아니라 호흡의 숫자에요. 우리는 호흡의 숫자를 타고 납니다. 수명 자체를 늘리는 건 어렵지만 호흡 숫자는 조정할 수 있습니다. 호흡을 가쁘게 하는 것들은 뭘까요? 대표적인 것이 스트레스에요. 스트레스는 일의 양이 아니고 일과의 관계입니다. 일을 대하는 태도가 스트레스를 결정하지, 일 자체가 스트레스는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은 일이 많아서 육체가 피곤하다는 건 거의 없어요. 오히려 정신이 활발히 움직이는데 이게 전부 다 안 해도 되는 부질없는 생각들입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사람은 바로 소외를 느낍니다. 이게 자율성의 진리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면 절대로 몸은 활성화 되지 않습니다.
 
정(精)이라고 하는 물질적 토대와 기(氣)라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뭐가 필요할까요? 어떻게 할 것인가? 벡터(Vector)가 정해져야 해요. 바로, 신(神)입니다. 이것은 심장이 주관합니다. 그래서 심장을 군주지간 이라고 하죠. 무형의 가치를 움직이는 거에요. 이게 없으면 그냥 기계죠. 신(神)은 오장(五臟)과 깊은 관련이 있고 더 나아가 몸의 각 부분과도 연관됩니다. 간심비폐신(肝心脾肺腎)은 오장육부 중 오장인데, 이것과 우주를 움직이는 기운인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가 결합을 해요. 인간 몸의 논리와 우주적인 논리는 어떻게 연결될까요? 동양 우주론에 따르면 각각의 몸은 다 우주입니다. 그리고 다 자연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삶의 윤리와 심리가 있어요.
 
시공간이 밟아가는 가장 보편적인 리듬이 사계절입니다, 사계절을 짧게 나누면 24절기가 되죠. 이 단계의 스텝을 밟는 게 우주가 탄생한 이후 계속했던 항상적 리듬이에요. 이 항상적 리듬 안에 매년마다 다르게 오는 차이, 그것을 항상성의 리듬과 차이의 강밀도 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 우주를 움직입니다. 우리의 삶은 평생 생로병사를 하는데 매년 다르게 구성되어야만 생명력이 형성됩니다. 다르지 않고 한 년이 동일하게 갔다, 그러면 우울증 아니면 치매의 징후를 앓게 됩니다. 치매는 딴 게 아니에요. 내가 동일한 패턴 안에 머무르는 거에요. 그 경계 안에서만 움직이는 거죠. 그 전조가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이 생기면 삶의 의욕이 떨어지죠. 의욕이 떨어진다는 것은 삶의 차이를 감지하는 능력도, 생성하는 능력도 없다는 겁니다.
 
 
 
몸과 우주, 심리와 윤리가 연결하다
여기에 어떻게 심리가 작동할까요? 간은 분노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화가 나면 밑에서 위로 치받죠? 가장 기운을 많이 씁니다. 간기가 약한 사람은 화를 잘 못 내요.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착하다고 하는 데 착한 게 아니라 간기가 안 좋은 겁니다. 착하게 살면 양생에는 해롭습니다. 심장은 기쁨이거든요? 기쁨에 많이 노출되어도 몸이 상합니다. 현대인들이 왜 심장병이 많을까요? 문화 자체가 스팩타클하기 때문입니다. 기쁨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심장이 터집니다. 심장병으로 죽는 사람 중에는 쇼크사보다 너무 좋아서, 그걸 감당하지 못해서 쓰러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비위는 생각인데요. 직장인들은 여기에 제일 많이 노출됩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죠. 부질없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걸어야 합니다. 몸을 움직이면 생각이 멈추고, 몸을 안 움직이면 생각만 움직이는데 이것을 망상이라고 하는 거에요. 폐는 슬픔을 주관해요. 가을의 기운이죠. 가을에 낙엽이 떨어질 때 우울해지고 쓸쓸해지는 게 다 폐의 기운 때문입니다. 신장은 두려움이에요. 원초적인 두려움입니다. 신장이 튼튼해야 기본적으로 위기의 상황에서 배짱 좋게 밀고 나갈 수가 있습니다. 요즘은 8등신, 9등신하며 하체를 얇게 하는 게 미적인 기준이 되어 버렸는데 그래서 엉덩이와 허벅지에 있어야 할 배짱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타인과의 만남이 두려워집니다. 낯선 것에 접속할 때 공포를 느끼게 되요.

이것들은 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고 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윤리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이 화(火)와 수(水)인데, 화는 열정이고 수는 지혜입니다. 우리 몸 안에서 물을 움직이는 건 심장이에요. 독창성이나 아이디어는 심장에서 나옵니다. 머리를 자극한다고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세상을 확 바꾸는 건 물의 기운이거든요. 결국 한 인간이 잘 산다는 것은, 물론 몸이 건강해야 하지만 그 건강 안에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건강한 것은 벡터가 없는 거에요. 건강한데 자기 삶의 주도권이 없는 것을 우리는 주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몸 안에 지혜가 부여되는 것, 이것이 바로 양생의 기본이거든요.

현대인들이 병을 앓는 것은 화(火)와 수(水)의 축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신장은 신장대로 심장은 심장대로 움직입니다. 이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나머지도 다 붕괴가 되겠죠? 그러면 삶의 지혜와 열정도 따로 놉니다. 성공을 향해 막 달려가는데 그 안에 지혜가 없어요. 이 성공은 오로지 돈으로만 환산 돼요. 절대 ‘돈을 이 정도 번 후에 뭘 할거야’ 라는 식의 망상을 가지면 안됩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지금 가지고 있는 정기신(精氣神)을 돌리고, 지금 갖고 있는 화폐로 나를 배려하는 삶을 창안해야 합니다. 이게 지혜거든요. 태어날 때 내가 폐호흡을 하면 우주의 기운이 내 안에 딱 들어옵니다. 그러면 재물과 관상 등이 기본적으로 세팅 됩니다. 운의 리듬이 세팅이 되요. 운명을 만만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극복하면 되지? 극복 안됩니다. 극복할 수 있으면 운명이 아닌 거죠. 내가 선택한 리듬이에요. 그걸 까먹고 나는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욕망이 너무 커졌거든요. 제일 먼저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 되야 합니다. 자기의 외모, 신체의 어떤 결함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운명을 사랑하는 힘이 생겨야만 비로소 팔자의 리듬과 배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돈으로 운명을 바꿀 수 없어요. 자신을 구하는 건 오직 자신뿐입니다.
 
 
 
내 몸의 주체로 다시 서다, 글쓰기를 통해!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지혜와 열정을 일구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열정이 화(火)고 지혜가 수(水)라고 했잖아요? 이게 서로 유기적으로 돌면 잘 사는 겁니다. 이걸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고 합니다. 음양오행이 어떻고 관상이 어떻고 이렇게 얘기하면 그냥 여러 가지 기술지 중의 하나가 됩니다. 전혀 자연의 이치나 내 존재에 대한 탐구가 되지 않아요. 인문학적 윤리와 만나야만 이 지혜를 알뜰하게 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삶의 윤리적인 축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연마하느냐? 글쓰기입니다. 지성의 핵심이 글쓰기거든요.

글이 중요한 것은 글만이 이 세상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자와 예수와 부처는 왜 다 말로 진리를 설파했을까? 언어만이 보편적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어의 능력만큼만 사유할 수 있어요.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어떤 스팩타클을 보여도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절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책이 사라지는 순간 언어는 없어요. 글쓰기는 여러 가지 기술 중의 하나가 절대 아닙니다. 책 안에는 무려 2500년 된 지혜가 중첩돼 있어요. 그렇다고 읽기만 해서는 안돼요. 만권을 읽었는데 책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늘 누군가의 말을 듣는 소비자가 됩니다. 지성의 소비자가 아닌 지성의 생산자가 되는 게 바로 글쓰기입니다. 글을 제대로 쓸려면 나를 넘어서 타자(他者)와 소통을 해야 해요. 인문학의 화두는 몸입니다. 몸은 삶의 구체적인 현장이고 유일한 리얼리티죠. 가장 깊으면서 가장 체계적이고 동시에 가장 야생적입니다. 몸을 탐색하다 보면 광활한 우주가 펼쳐지죠. 인문학은 재미와 쾌감을 줄 수는 없습니다. 재미와 쾌감이 아닌 근본적 감동을 줄려면 자기 존재가 거기까지 내려가야 되겠죠. 그래서 지혜의 끝까지 가야 합니다. 심장의 기운이 활발히 활성화되고 이것을 수승화강해서 돌리는 기운으로 글쓰기를 할 수 있다면 문장(文)이 곧 도(道)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지금까지 도달한 공부의 여정입니다. 저의 강의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용석님의 댓글

용석 작성일

'문장이 곧 도', '지금까지 도달한 공부의 여정' 음성이 실감나게 들리는듯하네요. 강의를 잘 하셨는지? 정리를 잘 하셨는지? 읽기를 잘했나?

양력 2024.4.17 수요일
(음력 20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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