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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2) 후기] 말하기의 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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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oolyule 작성일26-06-18 08:52 조회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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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 세미나 후기 김유리 2026.6.14

 

말하기의 세 장면

 

 

BTS와 데리다

자크 데리다가 1997년에 남긴 긴 강연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을 읽느라고 낑낑 대다가 유튜브로 도망쳤다. 쇼츠에 한참 빠져 있는데 BTS의 뷔가 나와서 미국에서 십 년을 활동했지만 영어가 안 돼서 자기가 ‘동물같다’고 말했다. 말하기 능력으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바로 그 문제, 그건 데리다가 강연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었다. 데리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철학적 선언을 한 이래로 말을 못하는 것을 ‘동물적’ 우둔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한다고 한다. 데리다는 ‘말 못하는’ ‘동물’이란 단일하고 단순한 이론적 개념일 뿐, 그 안에 자기를 ‘말하는’ 이질적인 다수의 ‘동물들’이 웅성인다는 것을 알려준다. ‘동물’은 없다. ‘동물들’이 있다. 누가 자기를 동물같이 느낀다고 할 때, 데리다와 함께 나도 그 말을 받아 ‘동물이라면, 어떤 동물?’이라고 되물을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일

동물들이 앞에 있고 ‘동물’이라 부르며 ‘이름을 주는 존재’로서 자기를 정의한 것이 이른 바 대문자 ‘인간’이다. 오선민 선생님은 데리다가 동물과 함께인 말하기의 장면을 세 가지 보여준다고 알려주셨다. 첫 번째 말하기의 장면은 창세기 1장의 풍경이다. 인간이 동물을 ‘내려 부르고’ 동물이 인간을 ‘올려 보면서’ 주종 관계에 들어간다.

이 장면으로부터 ‘인간’과 ‘동물’ 사이에, 데리다의 표현대로 긴밀하지만 심연처럼 깊은 경계가 패인다. 데리다는 심연이 끌어당긴다고 말했다. 심연이 경계 양단을 끌어당겨 잡아내리는, 현기증 나는 지질학적 사건을 일으키고 싶어한다.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며 나를 잃어버리는 동시에 그 바닥에 있던 뱀이 몸을 일으킨다. 타자의 시선 앞에서 나를 잃는다는 위험하고, 황홀할 지도 모를 상태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려고 한다.

 

고양이의 응시를 따라가는 발가벗은 철학자

데리다는 동물 앞에 선 인간의 말하기 장면을 차례로 더 보여준다. 우선, 마침 발가벗고 있는 자신 앞을 지나가던 고양이와 데리다가 눈이 마주치는 장면이다. 집에서 기르는 동물과 집 주인의 관계라는 문명의 외피가 잠깐 벗겨지는 순간이다. 벌거벗은 두 동물로서 마주 보는 이 상황에서 데리다는 부끄럽게도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 얼떨떨해 하는 이 장면은, 자명한 것 같았던 ‘인간’ 대 ‘동물’의 위계적 경계가 원활히 재생되지 못하여 버퍼링이 발생한 장면처럼 보인다. 이 장면에서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 이 장면 안에서 말을 하는 것은 고양이다. 그 고양이의 말 건넴은 호명하는 인간적 ‘음성’이 아니고 데리다에게 던지는 ‘응시’다.

첫 번째 장면이 ‘너’는 ‘동물’이라며 이름을 부르고, 그러니까 ‘나’는 ‘인간’이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면, 두 번째는 그가 ‘나’를 부를까 궁금해 하는 집고양이의 응시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은 호명함이 없는 말하기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나는’이라고 말하면서 자기를 말하는 동물들이 불어난다. 이들은 데리다의 표현대로 ‘자서전적 동물들’이다.

데리다는 자기가 일인칭으로 말할수록, 자기 텍스트가 자전적이 될수록 말하는 중에 동물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더 잘 보이게 될 거라고 말한다. 나를 말하는 데에서 동물들이 말한다는 것, 그러니까 나인 동물들이 말한다는 것, 말하는 나는 말할수록 동물들이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세미나에서 오선민 선생님은 래퍼가 되고 말았다. 나를 보는 너를 보는 나를 보는 너를 보는, 나를 보는 너를 보며 부끄러워하는 나를 보는 너를 보며,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는 나를 보는 너를 보는.

 

키메라가 말한다

데리다는 ‘동물’이라는 말을 따옴표 안에 넣기로 했고, 지체 없이 바꾸어 그것은 단지 말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키메라 같은 말을 벼리고자 했다고 한다. ‘동물’이 ‘말할 수 없다’고 하려면, 온사방에서 ‘나는, 나는’이라고 하면서 삶의 신호들을 방사하고 흔적을 남기는 모든 ‘나인 동물들’의 다수성과 이질성을 죽이지 않고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괴물 키메라는 동물들의 다수성에서 비롯된 형상이다. 모든 생명체들의 이질성과 다수성을 희생하면서, 자서전적 능력을 박탈하면서까지 이루려고 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중심주의다.

키메라를 이루는 동물들 속에 뱀을 빠뜨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오선민 선생님은 강조했다. 뱀은 선악의 발생 지점을 증언하는 동물이다. 뱀을 떼어낸 인간 중심의 말하기는 선악의 경계가 ‘발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않으려는 일이라 한다. 발생하는 것을 원래 그런 것으로, 자명한 것으로 여기는 일이다.

오선민 선생님은 데리다에게 말하기란 ‘중단 없는 발생적 사건’이라고 했다. 선생님은 ‘키메라는 동물로서 자기가 따라가는 것을 의식하지만, 반성의 자기 심급을 갖지 않는 자서전적 주체입니다’라고 말했다. 말하기는 중단 없이 사냥하는 동물들이 그런 것처럼 앞선 자취를 찾아가며 뒤에 자취를 남기는 연속이다. 따라가는 방향이 있지만, 반성할 자기가 선재하지 않는다. 죄의 느낌 없는 쫓고 쫓김. 말을 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달라지는 나다움의 범위 조정. 이런 설명들이 세미나에서 쏟아졌다.

데리다가 그려 보인 말하기의 장면들에서 오선민 선생님은 문자 너머의 다른 풍경들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쓰는 글은 우리가 남기는 다른 모든 삶의 신호와 같다. 더 동물이 되어가는 말하기를 하자고 선생님은 세미나를 마무리했다. 그게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하며 후기를 쓴다.

 

동물원 사육사의 꿈

후기 쓰는 게 맘처럼 안 되어 또 유튜브로 샜다. 보다보다 이번엔 인간중심주의의 대표적인 장소인 동물원 사육사들의 토크였다.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동물원 폐지 청원자보다 사육사들과 더 이야기하고 싶다. 사육사들은 입만 열면 동물들의 이야기를 쏟아놓고, 온종일 동물의 흔적을 쫓는 사람들이었다.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그들이 동물에 쫓기는 꿈을 꾼다고 말했을 때였다. 낮에는 동물을 쫓고 밤에는 동물에 쫓기다니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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