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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의 형이상학](2)_2부 발제_모든 것은 생산되고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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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수정 작성일26-07-01 16:07 조회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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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의 형이상학(2)_2부 발제_인류학의 시점에서 본 자본주의와 분열증

 

모든 것은 생산되고 생산한다

 

2026.7.1. 최수정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는 식인의 형이상학에서 인식하기는 인식되지 않은 것(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것)과 상호작용하기다. 그런 면에서 인식하기는 창조의 한가지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식의 임무는 세계를 채우는 행위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것이다.”(119)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저자는 관찰자관찰되는 것실존적 노동이라 칭하며 잉여가치’(109)에 대해 잠깐 언급하는데, 수많은 행위자들의 실존을 위한 관점들의 상호성이 세계에 잉여가치를 만든다고 하는 것 같다. 저자는 27장에서 모든 것은 생산이다:강도적 혈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저자는 강도적혈통을 언급하는데 이때의 혈통은 잠재적이다. 그렇다면 이때 생산은 잉여가치와 연관 있어 보인다. 그러나 혈통만으로는 안 된다. 혈통의 대극에 동맹이 있다. 세계에 잉여가치를 만드는 생산은 동맹과 혈통의 운동, 실존적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관찰하고 관찰되며 적응하고 변하며 생산되고 생산한다.

 

생산하는 욕망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가스뜨루는 들뢰즈와 과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분열증 2: 천 개의 고원)다르게 사유하기 위한 경이로운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행위자의 욕망을 결여로 이해하는 반동적인 개념화를 쓰러뜨리고, 욕망하는 기계들은 사회체라는 사회적 생산 기계에 의해 코드화되어야만 하는 순수하고 실정적인 생산성으로 간주한다.(식인의 형이상학, 121) 들뢰즈와 과타리에 의하면 욕망은 욕구나 결핍과 같은 외부의 작용에 의해 자극될 필요가 없다. 욕망은 곧 관찰자가 관찰되는실존적 과정이다.

생산개념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 신화 재현 작업을 차단하는 반재현적 장치다. 그러나 이 책은 오이디푸스안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 가스뜨루에 의하면 그것은 사회성에 대한 인간중심적 개념화에 묶여 있다. 그것의 문제는 여전히 인간화,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이다. 여기서 생산은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이 실현되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자연은 생산의 과정으로 드러난다.(205) 자연의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은 생산이나 산업으로서의 자연 안에서 서로 동일하다. 여전히 인간내부의 지평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분열증 2: 천 개의 고원에서 ~되기를 말할 때는 인간과 자연의 반자연적인참여다. 이것은 이질적인 것 사이의 포획, 공생, 횡단적 연결이라는 순간적 운동이다.(205) 비생산적이고 실천 중에 있는 차이로 종 사이의 지평을 향한다.

저자는 식인의 형이상학2부에서 생산과 비생산을 혈통과 동맹의 예를 들어 이원성에 들어 있는 상호 함축의 관계를 풀어가며 생산개념을 전개해 나간다.

 

다양체

저자에 의하면 천 개의 고원은 정신분석학에 몰두했던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멀어진다. 천개의 고원은 종을 넘어 종을 횡단하는 다양체multiplicité들에 관한 이론이다. 이 개념은 자연과 문화’, ‘개인과 사회라는 두 가지 이원론 사이에 도주선을 지나가도록 했다.(123) 양 극 사이에서 표류하고 그 거리에 따라 분열하는 주체에 대한 이야기다.

다양체는 개별체의 어떤 유형을 정의하는 메타 개념이다. ‘리좀이 그런 유형의 구체적 이미지다. ‘리좀은 이질적 독특성 사이의 강도적 관계를(‘되기들’)에 의해 형성된, 중심 없는 격자 체계다. 리좀적 다양체는 실재적 존재가 아니라 되기들의 배치, 어떤 사이.

다양체란 하나보다 덜한 것, 빼기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소수, 소수성, 수의 감소라는 관념들은 중요하다) 이것은 n-1개의 차원으로 이루어진 체계인데, 거기서 하나는 단지 여럿을 생산하기 위해 빼어져야 하는 것처럼 작동한다. n이라는 중심에서 계속 하나를 빼어 가며 고정된 중심으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한다. 중심에서 멀어지기 위해 계속 중심으로 되돌아와 중심과 닮은 자신을 매번 하나씩 빼며 다르게 만든다.

다양체는 횡적 복잡성을 지닌 체계다. 이런 복잡성은 위계질서나 초월적 단일화의 다른 모든 형식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것은 혈통보다는 동맹의 복잡성이다. 리좀들은 개방된 강조적 선들이 이질적 요소들을 연결시키는 순간과 장소에서 형성되어, ‘부분전체의 구별을 모르는 프렉털적 존재론을 투사한다.(127) 프렉털적 인격은 항상 온전하게 함축’(차이의 반복)된 관계성을 지닌 개별체다.

다양체는 관계적 종합의 어떤 양태에 의해 형성된다. ‘분리접속적 종합혹은 포함적 분리접속이라 불리는 이것은 발산이나 거리를 원인으로 갖는 관계 양식이다. 이것은 또한 되기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관계 양식이다. 분리접속적 종합은 차이 그 자체의 운동이다. 이것은 상호함축의 운동이다.

 

이원성-절대적으로 필요한 적대자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원론자라는 오해를 받는다. ‘차이와 반복’, ‘강도와 외연’, ‘잠재와 현실’, ‘뿌리-나무-리좀, 생산과 비생산. 그러나 이들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이들이 제안하는 이원적 구별은 제안되자마자 곧바로 논변 내의 자리를 바꾸면서, 그 설명 과정을 중단시킨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이원론들은 우리의 적대자,절대적으로 필요한 적대자라고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137) 여기서 그들은 개념을 도구, 교량 또는 이동수단 같은 것으로 다룬다. 이원론들은 추상 기계의 기능적 작동 혹은 특수한 상태의 결과물이고, 견고하거나 초코드화하는 조각화 작용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실재적이기 때문에 부수는 것도 가능하다. 끝없이 두 개로 쪼개 거리를 좁히거나 늘리며, 항상 접선을 따라, 도주선을 따라 규정된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들뢰즈는 이원성들을 최소 다양체로 규정한다. 모든 개념적 구별은 외연적-현실적 극과 강도적-잠재적 극의 수립으로 시작된다. 그다음에 이원성을 한쪽 극이나 다른 쪽 극의 시점에서 고려함에 따라 그것이 어떻게 본성적으로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분석이 뒤따른다. 이것은 각각의 극이 자기 고유의 본성에 따라 다른 쪽 극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다르게 말하면 마치 두 극의 관계가 필연적이고 양자택일적인 방식에 따라 두 가지 극 중 하나의 체제에 속하는 것, 즉 모순의 체제 혹은 도주선의 체제에 속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원성의 두 가지 관계는 상호 전제의 관계다. 이 극성들은 젠더의 논리적 경제 혹은 멜라네시아적 교환 방식들 사이의 접합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런 교환 방식들 내에서 하나의 극은 (남성적인 것 혹은 여성적인 것, 동일한 성 혹은 대립하는 성, 매개 교환 혹은 직접 교환 중 하나의 극)항상 다른 쪽 극의 한 가지 버전 혹은 변형처럼 서술된다. 이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이든 저것이든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원성의 두 극이 서로를 조건 지우므로, 상호 전제는 모든 이원성의 두 극을 동등하게 필수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상호 전제가 두 극을 대칭적이거나 등가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상호 전제는 비대칭적인 상호 함축의 관계다. , 경로는 두 방향에서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한쪽 작업은 되기라는 욕망의 과정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반면, 다른 쪽 작업은 되기에 호의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141) 상호 전제하는 과정(리좀)과 모델(나무)사이의 이런 비대칭적 관계는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와역실행이다.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라는 첫 번째 운동은 그러한 차이가 상실되면서 일어난다. 잠재적인 것의 역실행이라는 두 번째 운동은 차이의 창조가 혹은 차이를 함축하는 자. 이 두 번쨰 운동이 회귀 혹은 역인과성의 운동, 창조적 퇴화라고 할지라도, 첫 번째 운동과 엄격히 동시적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두 번째 운동은 첫 번째 운동의 초월론적 조건이고, 그 자체가 폐기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번째 운동은 사건혹은 되기’, 강도의 순수한 저장소, 즉 어떤 일이 일어나든 자신의 고유한 현실화 운동에서 도망치는 부분이다.(142)

 

동맹과 분열증

가스뜨루는 레비-스트로스 친족이론이 인간적인 것이 본질이 아니라면 동맹과 혈통이라는 일반개념의 범위가 어디까지 열리게 될지 묻는다. 동맹’(분열)혈통’(융합)은 고전적 친족 이론의 두 가지 핵심 범주다. 저자는 이 두 개념으로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는 친족에 관한 리좀적 개념화의 가능한 윤곽을 상상해 보자고 한다.

가스뜨루는 혈통 그룹에 관한 이론의 원형이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관념이었고, 혼인 동맹에 관한 이론의 원형이 대립과 통합이라는 관념이었다면, 여기서 제안하는 관점은 차이와 다양체로서의 친족 이론을 수립하기 위한 몇 가지 요소들을 들뢰즈와 과타리의 저작으로부터 이끌어 냈다.

저자에 의하면 들뢰즈와 과타리는 안티-오이디푸스사회성에 대한 인간중심적 개념화에 묶여 있었다.(151) 들뢰즈와 과타리는 레비-스트로스의 친족 이론을 통해 동맹개념을 받아들였지만, ‘혈통을 위한 단순한 도구로서 동맹을 위치시킨다. ‘동맹이 혈통을 교환하고 억압하며 생산하는 것(213)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서는 혈통과 생산이 동맹과 교환보다 원초적이다.

하지만 두 저자의 질문이 신화로 돌아오며 신화적 발화가 담고 있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155) 들뢰즈와 과타리는 서아프리카 도곤 신화를 통해 친족의 기원을 이루는 관계적 차원으로서의 혈통에 도달하고, 가계의 소속을 구별하는 기능을 맡은 외래적 차원처럼 동맹을 본.(156) 그리고 마침내 동맹은 결코 혈통으로부터 유도되지도, 연역되지도 않는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런 외연적 체계 내에는 최초 혈통도, 최초 세대 혹은 초기 교환도 없다. 이미 항상 동맹이 있을 뿐이다.(157) 이것으로 두 저자는 혈통이 단지 상상적인 것이라는데 이르고, 동맹이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외연적 체계는 자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강도적 조건들로부터 태어나지만, 그 조건들에 역작용한다. 또한 그것들을 무효화하고 억압하며, 오로지 신화적 표현으로만 나타나게 한다. 근친상간 금지를 따르는 친족의 장은 이렇게 상호 전제의 관계에 있는 동맹과 혈통에 의해 조직된다. 이 상호 전제의 관계는 동맹에 의해 현실적으로, 혈통에 의해 잠재적으로 통솔된다. 신화의 강도적 평면은 동맹을 모르는 근친상간적 혈통에 의해 채워진다. 신화는 전근친상간적이기 때문에 강도적이고, 그 역도 성립한다. ‘동맹실재적으로 사회의 원리이고, 신화의 종말이다.(158)

저자가 보기에 들뢰즈와 과타리가(강도적)‘혈통을 기입의 분리접속적 종합의 작동자로 규정한 점이 도곤 신화 분석의 결정적 측면이다. 반면 동맹은 결합적 종합의 작동자다. ‘동맹은 신화적 방식에 따라 어떤 순간에 혈통의 선들 안에 갑작스레 들어온 것으로 재현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분리접속적 종합이 다양체에 특징적인 관계적 체제다. 문제는 혈통에서 동맹으로 가는 게 아니라, 에너지적 강도의 질서에서 외연적 체계로 이행하는 것이다.(159)

신화 속에서 모든 행위주는 제각각 유일한 상호작용의 장을 점유하며, 이러한 장은 존재론적으로 이질적인 동시에 사회학적으로 연속적이다.(여기서 모든 사물은 인간적이고, 인간은 완전히 다른 사물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 들뢰즈와 과타리는 동맹을 최초 에너지인 강도적 질서로 규정하게 된다. ‘분리접속적 종합으로서의동맹 개념을 구축하려 한다. (강도적)‘혈통을 기입의 분리접속적 종합의 작동자로, 반면 동맹은 결합적 종합의 작동자가 되면서 혈통과 동맹은 서로의 작동자로 상호전제한다. 이로써 레비-스트로스의 교환개념의 배타적 양자택일의 친족개념에서 멀어져 ‘~이든 ~이든, 그리고/또는으로 다시 정식화하며 분열증자를 등장시킨다.

들뢰즈와 과타리에 의하면 분열증은 생산의 과정으로서의 주체가 그 중심을 재배치하려 가로지르는 강도의 상태들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분열증에 내재하는 창조성, 그 생산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일시적 순간’(158)으로 나타난다. 그 순간에는 교환 법칙으로 농간을 부릴 수 있고, 잃는 것이 없이 얻을 수 있고, 나누지 않고 즐길 수 있으리라 믿는 게 허용된다. 완전한 감미로움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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