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의 QnA] 1주 후기 - 숲으로 가는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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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6-06-02 13:17 조회60회 댓글0건본문
- 불멸을 욕망하는 인간이 오래된 신화에게 배우는 바라봄
세미나 첫날, 그날 처음 자리에 온 한 분이 책의 한 구절을 읽었다.
"달구어진 쇠막대가 항아리의 물을 데우듯 / 마음에 든 병은 육신을 괴롭히기 때문이라네. / 물로 불을 꺼야 하듯 / 마음의 병은 통찰로 치유해야 한다네." — 『마하바라따』 제4권 「숲 속의 가르침들」, 샤우나까가 전한 자나카의 시 (박경숙 역, 새물결, 67쪽)
나는 그때 책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름이 백 개쯤 나오고 신과 영웅과 저주가 뒤엉킨 이 인도 신화 앞에서, 누가 누구의 아들인지 자꾸 놓쳤고, 솔직히 첫 장을 세 번쯤 다시 읽었다. 그런데 그날 처음 온 사람이 멈칫하던 그 자리에서 나도 멈칫했다. 여러 해 드나든 나는 못 보고 지나친 구절 앞에서, 처음 책을 편 사람이 먼저 베였다. 몇천 년 전에 누가 적어둔 문장이 병원을 다니는 한 사람에게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을, 나는 한참 생각했다. 이 글은 그 멈칫한 자리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욕망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끄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는가, 그 질문 하나를 들고 숲까지 가보려 한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의 첫머리에서, 수천 년 동안 인류를 괴롭힌 것은 굶주림과 전염병과 전쟁이었고 사람들은 그게 신의 뜻이거나 본성이라 영영 못 벗어날 줄 알았다고 적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인류는 그 셋을 그럭저럭 관리하게 되었고, 이제는 굶어 죽는 사람보다 너무 먹어 병드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 되었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나는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큰 문제가 풀렸으면 한숨 돌릴 법한데, 인류는 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라리는 그 다음을 이렇게 적는다.
"굶주림과 질병과 폭력으로 인한 죽음을 줄여온 인류는, 이제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려 든다. 그리하여 인간의 다음 목표는 불멸과 행복과 신성이 될 것이다." —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제1장 「인류의 새로운 의제」 (영어 원문에서 옮김)
곧장 더 높은 데를 올려다봤다. 죽지 않는 몸, 늘 행복한 마음, 신의 자리. 사람에서 신으로 올라가겠다는 것이다. 욕망이 끝난 게 아니라, 그것이 향하는 데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끝에 있다는 행복이란 게 무엇일까. 하라리는 차갑게 적는다. 행복이란 결국 쾌감을 느끼는 일이라고. 그리고 쾌감에는 함정이 있어서, 한 번 느낀 것은 곧 시들고 우리는 더 센 것을 찾게 된다고. 이 대목에서 나는 책을 덮고 내 하루를 돌아봤다. 알림이 뜨지 않아도 휴대폰을 뒤집어 화면을 확인하는 손, 한 편을 다 보고도 다음 편 버튼 위에 머무는 손가락, 택배 상자를 뜯는 순간이 물건을 쓰는 시간보다 더 좋았던 기억.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그렇게 움직였다. 자본주의는 우리 몸을 더 원하도록 길들여 놓았고, 나는 길들여진 줄도 모르고 길들여져 있었다. 욕망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것이 내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한 번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욕망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답의 실마리는 엉뚱하게도 이 오래된 신화 쪽에 있었다. 이 이야기를 지은 사람들은 인간이 사는 목적을 세 가지로 보았다. 살아가는 원리(다르마)가 있고, 먹고살 물질(아르타)이 있고, 누리고 싶은 쾌락(까마)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한참 뒤에야 네 번째를 덧붙였다.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라, 사람들이 물질과 쾌락 쪽으로만 자꾸 기우는 것을 오래 지켜본 끝에 생겨난 것이다. 한쪽으로만 쏠리던 인간이 끝내 서로를 부수고 죽이는 데까지 가는 것을 보고서야, 그들은 새로운 자리가 하나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네 번째가 '벗어남'(모크샤)이다. 우리는 흔히 해탈이라 옮긴다. 다만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가 오래 들여다본 것은, 욕망을 좇기만 하던 인간이 어느 날 욕망에서 한 발 물러나 자기를 보는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이었다. 없던 자리를, 겪고 나서 만들었다는 것.
방금 그, 욕망에서 한 발 물러나 자기를 보는 자리 말인데, 같은 신화가 그 자리를 두고 한 발 더 들어간 말을 해두었다. 갈애를 경계하면서도 그 다스리는 법을 이렇게 일러둔 것이다.
"단지 버렸다 하여 버린 사람이 되지는 않네. / 엮인 것의 잘못을 보는 사람 / 적개심을 버린 사람 / 소유하지 않는 사람이 버린 사람이라네. // 그러니 자신의 육신에서 비롯되는 정을 / 통찰로써 거두어들이고"— 『마하바라따』 제4권 「숲 속의 가르침들」, 샤우나까가 전한 자나카의 시 (박경숙 역, 새물결, 67쪽)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버렸다 하여 버린 사람이 되지는 않네'라는 한 줄에 한참 머물렀다. 욕망을 손에서 내려놓는다고 욕망을 벗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벗은 사람은 따로 있다. 엮인 것의 잘못을 '보는' 사람. 끊은 사람이 아니라 본 사람. 그리고 그 봄을 이 시는 통찰이라 불렀다. 세미나에서 누군가 그 대목이 옳다고 했을 때, 다른 한 분이 물었다. 그게 우리한테 되는 일이냐고. 우리 몸은 이미 더 원하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그 몸에게 욕망을 들여다보라는 건 무리한 주문 아니냐고. 나는 그 질문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하라리도 같은 자리에서 말한다. 지금 필요한 건 몸을 다시 만드는 일이라고. 그 문장을 읽고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래서 대체 어떤 몸으로 바꾸라는 건가, 기계라도 달라는 건가, 그게 답일 리는 없는데 그럼 무엇인가.
그 "어떤 몸으로 바꾸라는 건가"라는 물음을 들고 다시 신화를 보면, 인간이 한 번 더 뜯어볼 만하게 그려져 있다. 신화가 만들어지던 까마득한 시절, 실제 인간은 무력했다. 가뭄이 들면 굶고 물이 넘치면 떠내려가는 존재였다. 그런데 정작 신화 안에서 인간은 신보다 자유롭게 그려진다. 짐승과 말을 섞고 강물과 마음을 주고받고 바람의 기별을 알아듣는다. 무력한데 자유로웠던 까닭은 거기 있었다. 세상과 끊어지지 않은 몸, 바깥의 것들과 끊임없이 주고받느라 늘 열려 있는 몸. 하라리가 다시 만들자고 한 그 몸을, 나는 기계 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읽고 싶어졌다. 더 많이 가지려고 단단해지는 몸이 아니라, 자꾸 열리는 몸. 그러자 질문이 자리를 바꿨다. 욕망을 어떻게 없앨까가 아니라, 욕망을 지닌 채로 세상과 통하는 몸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쪽으로.
그렇게 통하는 몸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 속 한 사람이 거꾸로 보여준다. 끝까지 통하지 못하고 정에 갇혀버린 눈먼 왕이다. 그는 옳은 말을 다 안다. 현인이 찾아와 욕심을 거두고 화해하라 이르면 그게 맞는 말인 줄 안다. 그런데 못 한다. 첫째 아들을 향한 정 하나를 끝내 내려놓지 못한다. 다 알면서 어쩌지 못하는 사람. 나는 그 대목에서, 신의 아들들보다 이 눈먼 왕에게 자꾸 마음이 갔다. 우리도 다 알지 않나. 알면서도 자식 일이라, 부모 일이라, 사람 일이라 못 놓는 게 있다. 그러니 정을 없애야 할 흠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차라리 사람이 사람인 첫 번째 표시다. 그 신화는 정을 이렇게 짚는다.
"마음의 병의 뿌리는 정이라네. / 중생들은 정에 얽매이고 그로 인해 괴로워한다네. […] 이렇게 슬픔도 기쁨도 그리고 애씀도 / 모두 정에서 비롯된다네."— 『마하바라따』 제4권 「숲 속의 가르침들」, 샤우나까가 전한 자나카의 시 (박경숙 역, 새물결, 67쪽)
슬픔만이 아니라 기쁨도, 애씀도 정에서 온다는 것. 그렇다면 정을 도려내면 괴로움과 함께 기쁨도 사라진다는 뜻이다. 눈이 멀었다는 건 무엇이었을까. 정에 매여 있는 한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못 보는 데가 있는 채로 산다는 뜻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멀어버린 눈은 결함이라기보다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을까.
그 눈먼 왕의 맞은편에 다섯 형제가 있다. 그들은 왕국이며 가진 것을 다 잃고 숲으로 쫓겨난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나만 고생한다는 마음이 없다. 주어진 처지에 그대로 들어서서, 곁의 사람들이 건네는 말에 귀를 연다. 오히려 애가 타는 쪽은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이다. 반대편의 두료다나는 다르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귀를 닫고, 질투에 타들어가다 끝내 모두를 파국으로 끌고 간다. 한쪽은 듣느라 열려 있고 한쪽은 막느라 닫혀 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를 보았다. 고난이라는 게 어쩌면 나 한 사람에게 떨어진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여러 인연과 조건이 한자리에 얽혀 함께 통과하는 무엇이고, 그 안에 주인공이 따로 없을 수도 있다는 것. 우리는 지구가 더워지는 일조차 사람만의 문제로 끌어안고 사람만의 손으로 풀려 한다. 모든 숨붙이가 같이 겪는 일을 자꾸 나를 한가운데 놓고 본다. 풀리지 않는 데는 그런 까닭도 있을 것이다.
이제 흩어둔 것을 모아본다. 정을 도려내 욕망을 끊어버리는 길이 있고, 몸을 기계로 갈아 끼우자는 하라리의 길이 있다. 그런데 이 신화가 가리킨 데는 둘 다 아니었다. 버린다고 벗어지는 게 아니라 보아야 벗어진다던 그 자리.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끄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지닌 채로 보는 몸 쪽이었다. 첫날 그 처음 온 분이 읽던 구절로 돌아가 본다. 마음의 병은 통찰로 치유한다던 말. 통찰이 무엇이었나를 이제 와 다시 생각하면, 그것은 욕망을 끄고 얻는 맑음이 아니라 욕망을 든 채로 그것을 마주 보는 일에 가까웠다. 든 채로 본다는 것. 정을 품은 사람이 그 정에 휘둘리는 대신 정을 안고 마주 앉는 것. 어쩌면 그것이 신화 속 인간이 무력한 몸으로도 신보다 자유로웠던 까닭이었는지 모른다.
마지막까지 내게 남은 물음은 이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저들과 같은 숲으로 가볼 수 있을까. 숲은 쫓겨나 갇히는 곳이 아니었다. 가진 것을 다 잃은 이들이 정을 품은 채로, 듣는 귀를 열어둔 채로, 보는 법을 익히던 자리였다. 그러니 숲으로 가는 일은 욕망을 끄고 떠나는 일이 아니라 욕망을 데리고 들어서는 일일 것이다. 달구어진 쇠막대를 든 채로 물가에 앉는 일. 끄지 않은 불을 든 손으로 그 불을 들여다보는 일. 나는 아직 그 숲의 입구에 서 있고, 어느 쪽으로 한 발을 떼야 할지 여태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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