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의 QnA] 4주 후기 -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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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6-06-24 05:28 조회54회 댓글1건본문
― 호모 데우스와 마하바라따를 겹쳐 읽으며
문서는 허상이다
중학교 1학년 남학생들이 점심시간에 노트북을 꺼내 쓰게 해달라고 졸랐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원래 수업 시간에만 쓰기로 한 노트북이다. 왜 쓰려느냐고 물으면 주식을 해야 한다고 답한다. 선생은 한 아이를 불러 노트북을 가져오게 하고, 네가 한다는 주식을 한번 보여달라고 한다. 화면에는 SK하이닉스가 있고 현대가 있고 숫자가 무작위로 바뀐다. 쌀 때 잡아야 하고 비쌀 때 팔아야 한다. 선생은 그건 주식이 아니라 게임이고 도박이라고, 그래서 안 되겠다고 노트북을 다시 거둔다. 그러자 아이들이 묻는다. 선생님, 우리 지금 엔비디아 사야 돼요? 엔비디아가 뭐 하는 회사냐고 되물으면 컴퓨터 회사야, 딱 그 정도로 안다. 열세 살, 열네 살이다.
나는 이 장면을 오래 들여다본다. 숫자가 무작위로 바뀐다는 말, 낮을 때 잡아야 한다는 말, 그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아서다. 아이들은 돈이 무엇인지 배우고 싶어 한다. 작년에 만난 중3 남학생들은 교육과정에서 돈을 꼭 배우고 싶다고 했고, 여러 교사가 돈을 주제로 수업을 엮었다. 아이들은 관심을 보였다. 보이는 게 당연하다. 열세 살에 이미 무엇이 나를 먹여 살리는지 셈하는 세상이니까.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세 겹의 현실을 산다고 말한다. 바깥의 객관적 실재가 있고, 안쪽의 두려움과 즐거움과 욕망이 있고, 그 사이에 돈과 신과 국가와 기업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지어낸 것이다. 지어냈으나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그것을 섬기고, 때로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점심시간에 노트북 함을 열어달라는 아이들은 이미 세 번째 안으로 깊이 들어가 있다. 진짜냐 가짜냐가 문제는 아니다. 그것을 진짜로 여기는 순간 우리가 어디에 눈을 감게 되는가, 그게 문제다.
우리는 돈과 국가, 기업을 발명했으며, 우리를 섬기게 하려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는 그것들을 섬기느라 목숨을 바치게 되었는가? ―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김명주 옮김, 김영사, 2017.
책의 마지막 장에 한 사람이 나온다. 2차 세계대전 때 포르투갈 영사였던 소사 멘데스다. 그가 한 일은 평소에 늘 하던 일, 여권에 비자를 발급하고 도장을 누르는 일이었다. 다만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유대인 난민에게 비자를 내주지 말라는 문서를, 그는 무시했다. 자기 자리에서 하던 대로 손을 움직였고, 그렇게 삼만 명에게 비자가 나갔다.
한 사람은 이걸 직관이라고 부른다. 멘데스는 그 문서가 자기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사람의 목숨 앞에서 한 장의 종이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알아챈 다음, 관료로서 자기 직관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우리는 이런 것을 직업의 윤리라고도 부른다. 그가 의무를 다하는 상대는 국가의 문서가 아니라 국경 앞에 선 시민이다. 여기서 못 나가면 죽는다는 것은 종이가 아니라 사람 쪽의 사실이고, 도장을 누르면 이들이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것도 사람 쪽의 사실이다. 그는 종이가 아니라 사람을 보았다. 도장 누르는 일을 못 하게 되면 영사직을 잃을 뿐, 죽지는 않는다. 그는 그것을 알았다.
그가 종이를 종이로 본 자리에서 한 가지가 따라 나온다. 책임이다. 종이를 허상으로 보면, 그다음에 무엇을 하든 그 책임이 내게 돌아온다. 내가 보았고 내가 움직였으니 내가 진다. 그런데 종이를 실재로 보면, 사람은 거기에 핑계를 댄다. 위에서 그러라고 했으니까, 규정이 그러니까, 나는 도장을 안 찍었을 뿐이니까. 책임이 종이로 넘어가고, 사람은 종이 뒤로 숨는다. 멘데스가 영웅인 까닭은 상상력이 남달라서가 아니다. 보았으니 숨을 데가 없었고, 숨을 데가 없으니 책임이 고스란히 자기 것이었다. 행위는 그다음의 문제다. 훗날 그는 자기가 한 일을 이렇게 설명했다. 수천 명의 유대인이 한 기독교인 때문에 고통받는다면, 한 기독교인이 그 많은 유대인을 위해 고통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종이를 밀어낸 자리에 남은 것은 비자를 받으려고 줄을 선 얼굴들이었다.
아내는 얼굴을, 남편은 허상을
세미나에서 한 사람이 246쪽을 펼친다. 거기 중간쯤, 열 번째 줄인가에 방법이 적혀 있다고 한다. 어떤 것이 실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간단하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없는가. 국가는 아프지 않다. 기업은 패소해도 쓰리지 않다. 화폐는 값이 떨어져도 울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국가의 이름으로, 그 기업의 이익을 위해, 그 화폐를 좇다가 아픈 것은 늘 살과 뼈를 가진 누군가다. 한 사람이 말한다. 이렇게 대입을 해보면 허상인지 아닌지 가려낼 수 있겠더라고요. 이런 방법이 있는 줄 몰랐어요.
아픈 것에는 얼굴이 있다. 종이는 아프지 않으니 얼굴이 없고, 사람은 아프니 얼굴이 있다. 멘데스가 줄 선 난민에게서 본 것이 그 얼굴이었다.
같은 저녁, 우리는 책 한 권을 더 펼친다. 마하바라따다. 호모 데우스를 읽을 때의 마음과 마하바라따를 읽을 때의 마음이 정말 다르다고 한 사람이 말한다. 한쪽은 시스템을 헤집고 한쪽은 동화처럼 읽힌다. 그런데 동화 쪽에 멘데스와 똑같은 물음이 들어 있었다. 누구를 보았는가.
비마의 딸 다마얀띠는 말로만 듣고도 니샤다의 왕 날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낭군 고르기 장이 열리자, 그녀를 탐낸 신 넷이 모두 날라의 얼굴을 하고 그 곁에 앉았다. 인드라와 아그니, 와루나와 야마. 진짜 날라까지 다섯이 똑같은 모습으로 늘어앉으니, 누가 진짜냐. 겉만 보아서는 가릴 수 없었다. 다마얀띠는 신들에게 빌어 본모습을 청하고, 그제야 알아본다. 신에게는 그림자가 없고 땀이 없고 깜빡임이 없다. 화환은 시들지 않고 발은 땅에 닿지 않는다. 다섯 중 하나만이 시든 화환을 목에 걸고, 몸에 먼지가 묻고, 땀이 나고, 눈을 깜빡이고, 발을 땅에 딛고 있었다. 매끈한 넷을 제치고 그녀는 그 하나를 골랐다. 골랐다기보다, 알아보았다. 얼굴을 가진 쪽을.
니샤다의 왕에게는 그림자가 있었으며, 그는 약간 시든 화환을 목에 걸고 있었다. 몸에는 먼지가 묻었고, 땀이 났으며, 눈을 깜빡이고 발은 땅 위에 딛고 있었다. ― 비야사, 『마하바라따』 「숲의 책(바나 파르바)」 ‘날라와 다마얀띠’.
멘데스가 줄 선 난민의 얼굴을 본 그 눈으로, 다마얀띠는 신들 틈에 선 남편의 얼굴을 본다. 영사관 앞과 신들의 줄, 자리는 다르나 눈은 같다. 둘 다 매끈한 허상을 제치고 땀에 젖은 얼굴에 손을 둔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한 번 뒤집힌다. 얼굴을 알아본 아내 곁에서, 남편이 그 얼굴을 놓친다. 일은 사소한 틈에서 시작된다. 깔리는 날라에게 들어갈 틈을 열두 해나 노린다. 그러다 제사를 앞두고 날라가 오줌 묻은 발을 씻지 않고 물을 만진 그 한 번의 빈틈으로, 마침내 몸 안에 들어앉는다. 그러니 깔리는 바깥에서 날아든 악령이 아니다. 날라 안에 늘 있던 탐욕이 빈틈을 타고 떠오른 얼굴, 곧 허상이다. 그 허상이 떠오르자 날라는 주사위 판으로 간다. 왕국을 걸고 아내를 걸고, 숫자가 바뀌는 판 위에 모든 것을 올린다. 점심시간의 그 화면이 여기서 다시 돌아온다. 무작위로 바뀌던 숫자, 쌀 때 잡고 비쌀 때 팔던 그 화면. 노름판 위에서 다마얀띠는 더 이상 얼굴이 아니라 판돈이다. 뿌슈까라가 마지막에 그녀마저 걸라고 할 때, 날라는 차마 그것만은 못 하고 옷 하나만 걸친 채 궁을 나선다. 다마얀띠도 옷 하나만 걸치고 그 뒤를 따른다.
굶주리며 숲을 헤매던 어느 날, 날라는 황금 날개를 가진 새들을 본다. 그가 본 것은 새가 아니다. 저들이 오늘 내 먹을 것이 되고 내 재산이 되겠구나. 그는 걸치고 있던 옷으로 새를 덮친다. 새는 그 옷마저 채어 날아오르며 일러준다. 우리가 바로 네 노름판의 주사위다, 네 마지막 한 벌까지 가지러 왔다. 먹을 것으로 본 새가 알고 보니 숫자였다. 사람도 새도 숫자로 보는 눈. 그렇게 왕국을 잃고 아내를 잃고 옷마저 잃은 채 그는 벌거벗고 선다.
가진 것이 맨몸뿐인 자리에서, 그래도 하나가 남아 있었다. 곁에 잠든 다마얀띠. 옷도 왕국도 다 벗겨진 자리에 남은 단 하나의 얼굴. 그런데 날라는 그 얼굴을 보지 않는다. 잠든 아내의 옷을 반으로 잘라 한쪽만 걸치고 떠난다. 자는 사람은 깜빡이지 않고 땀을 보이지 않으니, 그 순간 아내는 다마얀띠가 신들 틈에서 가려낸 그 살아 있는 얼굴이 아니라 한 장의 천이 된다.
너무 쪼잔해 보이지 않느냐고 한 사람이 웃는다. 또 한 사람은 거기서 멈췄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곁에서 다시 풀 수 있었는데, 옷을 반으로 자르는 순간 곁을 떠나버렸다고. 그런데 또 한 사람은 날라가 되레 인간 같다고 한다. 옷을 반 잘라 입고 나갔다가 돌아오고, 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들고 났다가 또 들고 난다. 그게 꼭 우리 마음 같지 않으냐고. 맞는 말이다. 멘데스의 눈과 날라의 눈은 다른 두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같이 들어 있다. 우리는 아침에 줄 선 얼굴을 보다가 저녁에 곁의 얼굴을 종이로 바꿔치기한다. 그러면서 자꾸 당위로 자기를 몰아붙인다. 이래야 한다고 채찍질하면서 죄책 속으로 밀어넣는다. 거기서 먼저 나와야 옆 사람의 얼굴이 다시 보인다. 그래야 내가 이렇게 쪼잔한 사람이었다고 털어놓을 수 있고, 미안했다고 손을 내밀 수 있다. 내가 종이로 바꿔치기했던 그 얼굴을 다시 얼굴로 돌려놓는 것, 그게 먼저다.
그 뒤 날라는 자기 얼굴마저 잃는다. 숲에서 뱀을 만나 몸이 비틀리고, 바후카라는 못생긴 말 조련사가 되어 남의 마구간에서 산다. 제가 아내의 얼굴을 지웠더니 제 얼굴이 지워진 셈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후카는 마지막에 다시 다마얀띠 앞에 선다. 못생긴 얼굴을 한 채로, 자기가 버린 그 얼굴 앞에 다시 선다. 얼굴을 되찾는 길은 줄곧 그 자리에 있었다. 자기가 천으로 덮어버린 그 얼굴 앞으로 돌아가 다시 서는 것, 그것뿐이었다.
처음 우리는 멀찍이서 시작했다. 국가는 허구이고 기업은 상상이고 시스템은 종이라고. 그 먼 이야기의 끝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뜻밖에도 옷 반쪽이었다. 잠든 아내의 옷을 반으로 가른 손, 그리고 위에서 내려온 문서를 무시한 채 도장을 누른 손. 도장을 누른 손 뒤에는 줄 선 얼굴을 본 눈이 있었고, 옷을 가른 손 뒤에는 곁의 얼굴을 지운 눈이 있었다. 같은 손동작이 정반대를 가리킨 것은 손이 달라서가 아니라 눈이 달라서였다. 멘데스가 밀어낸 허상은 책상 위 명령서였고 날라가 끝내 못 밀어낸 허상은 제 안의 탐욕이었으나, 종이든 탐욕이든 얼굴을 가린다는 점에서는 한 종류다. 얼굴을 지운 사람은 늘 뒤에 숨을 무엇을 둔다. 위에서 시켰다고, 깔리가 시켰다고.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 그것이다. 아침에 가려낸 얼굴을 저녁에 종이로 덮고, 그 위에 남의 이름을 적는 일. 그러니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잠든 사람 옆에, 영사관 줄 끝에, 내가 방금 종이로 덮고 남의 이름을 적은 그 얼굴 위에 있다. 그 종이를 걷고 다시 얼굴로 보는 것, 거기서부터다.
시련은 단순한 벌이 아니라, 자신이 넘어야 할 경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 비야사, 『마하바라따』 「숲의 책(바나 파르바)」 ‘날라와 다마얀띠’.
세미나 기록 「세상의 모든 질문 4」(2026.06.22)에서 오간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에세이입니다.
댓글목록
한주님의 댓글
한주 작성일
세미나에서 나눈 이야기를 다시 되새김하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기억을 불러오고 그것을 통해 다시 좋은 시간을 누리고,
그래서 또 같이 공부하고, 습을 바꾸고,
이렇게 가다보면 삶과 죽음의 날선 경계를 피하지 않고
그 위에 과감하게 올라 설 수 있겠다 싶어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