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의 QnA]6주 - 바닷물을 마신 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Dandi 작성일26-07-11 07:23 조회109회 댓글0건본문
『호모 데우스』 8장과 『마하바라타』를 함께 읽으며
아가스띠야는 바닷가에 서서 입을 벌렸다. 악어와 상어가 득실거리는 물을, 밤이면 육지로 기어올라 수행자들을 죽이던 자들이 낮 동안 몸을 숨기던 그 물을, 오래 수행한 늙은 성자가 한 모금씩 삼켜 나갔다. 물이 줄자 바닥이 드러났고, 바닥이 드러나자 숨을 곳을 잃은 형체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인드라의 창끝이 그토록 오래 닿지 못하던 것들이, 물이 마르자 하늘 아래 노출되었다.
"신들이여, 나는 중생이 왜 파멸되어가고 있는지 이유를 알지요. (…) 깔레야라는 몹시 악독한 무리들이 있지요. 그들이 우르뜨라와 합세해 온 세상을 짓밟았소. 악어와 상어떼가 득실거리는 무서운 바다로 간 그들은 세상을 괴롭히기 위해 밤이면 육지로 나와 수행자들을 죽이고 있는 것이오. 그들이 바다에 숨어 있는 한 그들을 죽일 수 없다오. 그러니 바닷물을 말릴 수 있는 만한 방법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오. 아가스띠야 말고는 그러한 일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오."
─ 『마하바라타』, 428쪽
같은 밤, 다른 세기의 어느 방에서, 샐리 아디는 머리에 씌운 헬멧을 벗었다. 두피에 붙였던 전극을 연구원이 하나씩 떼어내는 동안, 그녀는 제 삶의 발밑이 꺼지는 감각을 처음 겪었다. 더 똑똑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더 빨리 배웠기 때문도 아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머릿속의 모든 것이 입을 다물었다. 늘 그 자리에서 그녀를 실패로 몰아가던 것들이, 시도하기도 전에 안 될 거라 속삭이던 성난 것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바닷물을 삼켜 바닥을 세운 성자와, 헬멧을 벗고서야 머릿속이 조용했음을 안 여자. 삼천 년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보이지 않던 것을 밝은 데로 끌어내는 일. 물 밑에 잠긴 것, 소리 밑에 눌린 것을 기어이 노출시키는 일.
인드라가 아수라를 잡지 못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인드라는 전쟁의 신이다. 창을 들고 벌판에 서면 그를 당할 자가 없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적이 눈앞에 몸을 드러내는 동안, 인드라는 무적이다. 그러나 아수라들은 낮에 싸우지 않았다. 밤에만 나와 세상을 헤집고, 동이 트기 전에 물속으로 돌아가 몸을 감췄다. 인드라는 그 물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보지도 못하고 닿지도 못한다.
닿지 못하는 자리를 하나 더 두고 있는 것은 인드라만이 아니다. 하라리가 그리는 사람도 그렇다. 자유롭게 고르는 사람. 투표소 앞에서 당당하고, 진열대 앞에서 망설임이 없는 사람. 마음이 시키는 대로 고르라는 말을 믿고, 제가 고른 것이 곧 저라고 믿는 사람. 밝은 무대 위에서 그는 왕이다. 그러나 뇌 스캐너를 씌워 그 왕을 어둠 속에 눕히면 사정이 달라진다. 스캐너는 그가 오른쪽 버튼을 누르겠다고 스스로 알아차리기 수백 밀리초 전에, 어떤 경우엔 몇 초 전에, 그 손이 어디로 갈지 이미 읽어낸다. 왕은 제가 결정을 내렸다고 믿는데, 결정은 그가 알기도 전에 물밑에서 내려져 있다.
아수라는 물에 잠겨 있는 한 죽지 않는다. 이것이 이야기의 매듭이다. 인드라가 아무리 강해도, 상대가 물밑에 있으면 창은 허공만 가른다. 드러나야 벨 수 있다. 그래서 아가스띠야가 하는 일은 싸우는 일이 아니다. 물을 말리는 일이다. 칼을 드는 대신 입을 벌려, 숨을 곳을 없애는 일. 싸움은 그다음이다.
숨은 것을 못 보는 자가 어떻게 아무 이야기나 지어 올리는지, 하라리는 뇌를 반으로 가른 사람에게서 본다. 뇌전증이 심한 환자들은 한쪽에서 시작된 발작이 다른 쪽으로 번지는 걸 막으려고, 두 반구를 잇는 두꺼운 다발을 끊는 수술을 받았다. 그렇게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소식을 끊은 사람 하나를, 가자니가가 실험대에 앉혔다. 말을 맡은 왼쪽 뇌에는 닭발 그림을, 말을 못 하는 오른쪽 뇌에는 눈 덮인 벌판을 보여주었다. 그러곤 카드를 늘어놓고 방금 본 것과 어울리는 걸 고르라 했다. 왼쪽 뇌가 부리는 오른손은 닭을 짚었다. 그런데 오른쪽 뇌가 부리는 왼손이 불쑥 튀어나와 눈 치우는 삽을 짚었다. 왜 둘을 함께 짚었느냐 묻자, 환자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아, 닭발은 닭이랑 어울리고요, 닭장을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잖아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말하는 뇌는 눈밭을 본 적이 없다. 왼손이 왜 삽을 짚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닭장과 삽과 청소를 잇대어, 앞뒤 맞는 이야기 하나를 잠깐 사이에 세운다. 오른쪽 뇌에 야한 그림을 슬쩍 보여주었을 때도 그랬다. 환자가 얼굴을 붉히며 킥킥 웃자 무엇을 봤느냐 물었고, 말하는 뇌는 아무것도요, 그냥 빛이 번쩍했어요, 하고 답했다. 그럼 왜 웃느냐 다그치자, 당황한 뇌는 방 안 기계 하나가 우스꽝스럽게 생겼다고 둘러댔다. 웃음의 진짜 까닭은 잘려나간 다발 저편에 있는데, 이편의 입은 제가 아는 재료만으로 아무 이야기나 지어 올린 것이다.
아가스띠야가 나타나기 전의 인드라가 그렇다. 물밑을 보지 못한 채, 물 위에 뜬 것만으로 세상을 셈한다. 우리도 그렇게 산다. 제 안의 바닥을 본 적 없으면서, 본 적 없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물 위에 뜬 이야기를 자기라 부르며.
그렇다면 누가 그 물을 마시는가. 이 물음 앞에서 두 이야기는 갈라선다.
『마하바라타』를 읽던 이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심연을 드러내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신과 아수라의 싸움은 선과 악의 싸움이고, 선악은 영원히 맞서는 두 짝이지만, 그 두 짝을 온전히 세워 보이는 일만은 신의 몫이 아니라고. 인간 안에는 선과 악이,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이 함께 들어 있고, 그것을 밝은 데로 끌어낼 수 있는 자는 오래 수행한 리쉬뿐이라고. 바다를 마신 것이 하필 아가스띠야였던 데에는 그런 뜻이 있다. 아무나 그 물을 마시지 못한다. 오래 저를 다스린 자, 우주의 질서와 사람 사이의 질서를 제 몸에 함께 지닌 자만이 심연 앞에 설 수 있다.
하라리는 여기서 다른 쪽으로 걷는다. 물을 마셔 바닥을 다 드러냈다 치자. 그 바닥에 무엇이 있는가. 참된 나, 맑고 하나뿐인 목소리, 온 세상에 뜻을 부여하는 진짜 자아가 거기 앉아 기다리고 있는가. 없다고, 하라리는 잘라 말한다. 깊이 들여다볼수록, 하나인 줄 알았던 것이 서로 다투는 목소리들로 흩어질 뿐이다. 그중 어느 것도 진짜 나가 아니다. 사람은 나눌 수 없는 하나가 아니라 나뉘는 여럿이다. 바닷물을 다 마신 자리에 아수라 대신 텅 빈 갯벌만 있다면, 그 물을 마신 나는 대체 누구였단 말인가. 마시는 자마저 물밑으로 흩어진다면.
한쪽은 심연을 마주하는 일에 사람의 이름을 붙이고, 다른 쪽은 마주하는 사람이라는 것조차 지어낸 이야기라 한다. 여기서 서둘러 둘을 포개지는 않겠다. 이 어긋남이야말로 두 책을 나란히 펴 든 값이니까.
싸움이 끝난 자리를 『마하바라타』는 이렇게 적는다.
"괴성을 지르며 공격하는 신들에게 다나와들이 죽임을 당하면서 곧 무서운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아수라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으나 수행의 힘과 완벽한 절제력을 가진 선인들의 힘에 밀려 신들의 맞수가 되지 못했다. 금 장신구와 팔찌, 귀걸이 등을 걸치고 있는 아수라들의 시체는 꽃이 만발한 끼슈까 나무처럼 아름다웠다."
─ 『마하바라타』, 433쪽
세상을 헤집던 자들이 쓰러진 자리에,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놓인다. 노트를 쓴 이는 여기서 멈춰 오래 들여다본다. 이 세계는 선과 악으로, 고움과 미움으로 나뉘지 않는다고. 그 나눔은 세계의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것이라고. 시체가 꽃나무처럼 보이는 순간, 선악을 가르던 금이 지워진다.
시체를 꽃으로 바꾸는 그 손을, 하라리는 다른 데서 목격한다. 이야기하는 자아라는 손이다. 우리 안에는 겪는 자와 이야기하는 자가 따로 있다. 겪는 자는 매 순간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고 곧 잊는다. 이야기하는 자는 아무것도 겪지 않는 대신, 겪은 것을 골라 이야기로 엮는다. 이손초 강가에서 열한 번의 싸움으로 칠십만 이탈리아 청년이 쓰러졌을 때, 겪은 것은 진창과 총알과 잘려나간 다리였다. 그러나 이야기하는 자는 그 진창을 조국의 영광으로 엮었다. 아들이 헛되이 죽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서, 나라를 위해 바쳐졌다고 엮었다. 다리를 잃은 병사는 어리석은 정치가에게 속아 다리를 잃었다고 인정하느니, 영원한 나라를 위해 다리를 내주었다고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편을 골랐다. 겪은 것은 잘림인데, 이야기가 그 위에 꽃을 심는다.
아수라의 시체를 꽃나무로 세우는 것도 이 손이 아닌가. 다만 두 사람은 그 손을 반대로 읽는다. 노트를 쓴 이에게 그 아름다움은 선악의 금이 지워진 자리, 미망을 걷어낸 자리다. 하라리에게 그것은 잘린 다리 위에 나라를 심은 그 손이 아수라 위에 꽃을 심은 자리다. 미망을 새로 덧칠한 자리. 같은 시체를 두고 한쪽은 눈이 밝아졌다 하고, 다른 쪽은 눈을 또 가렸다 한다.
노트를 쓴 이는 스스로 어려움을 고백한다. 질문 만들기가 어렵다고. 더 깊은 안으로, 심연의 어둠으로 내려가려 하지만 쉽지 않다고. 왜 그럴까. 이분법의 사고방식이 저를 붙들고 놓지 않기 때문이라고. 어둠 속의 악과 속됨을 마주하기가 두렵기 때문이라고. 이 고백은 벌판에서는 이기는데 물밑으로는 못 들어가던 자의 사정과 다르지 않다. 밝은 데서는 그럴듯한 물음을 세우는데, 어둠 앞에서는 발이 얼어붙는다.
하라리가 8장을 닫으며 내놓은 것도 어려운 시험이다. 다음번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거든 멈춰 서서 물어보라고. 나는 방금 이 생각을 하기로 정하고 나서 이 생각을 했는가, 아니면 이 생각이 저 혼자 떠올랐는가. 그리고 앞으로 육십 초 동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겠다고 정할 수 있는가. 그냥 해보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라고. 이 시험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물밑을 한 번 들여다보게 한다. 육십 초를 버티려 애쓰는 동안 저 혼자 솟아오르는 생각들이, 물 위로 기어 나오는 아수라들이다.
두 책은 답을 남기지 않는다. 대신 행위를 남긴다. 물을 마시는 행위, 멈춰 서서 들여다보는 행위. 아가스띠야가 바다를 삼켜 바닥을 세운 것도, 아디가 헬멧을 벗고 침묵을 겪은 것도, 노트를 쓴 이가 한 겹 한 겹 미망을 걷으며 드러나는 것을 들여다본 것도, 도착한 자리가 아니라 지나가는 자리다. 성지순례에서 이어지는 이야기가 도착이 아니라 걸음에 관한 이야기였듯이.
머릿속이 처음으로 조용해지던 밤에, 아디는 물었다. 저를 실패로 몰아가던 성난 것들과 별개로, 나는 대체 누구였을까. 저 목소리들은 어디서 왔을까. 바다를 다 마신 아가스띠야도 같은 것을 물었을지 모른다. 이 물밑에서 기어 나오는 것들은 대체 어디서 왔는가. 두 물음은 하나다. 물밑의 아수라가 어디서 왔는지 묻는 일과 머릿속 목소리가 어디서 왔는지 묻는 일이, 같은 바다를 들여다보는 일이니까. 답은 오지 않는다. 다만 물을 마신 자만이 그 물음 앞에 설 수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