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에세이] 죽음을 비춰주는 두 현자의 거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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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6-06-18 10:06 조회1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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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외면하던 죽음이 산업이 되어 침투하고 있다
작년에 새로운 직업을 탐색하며 목격한 현실은 이전에 보이지 않던 ‘노병사(老病死)’ 관련 직업의 압도적 증가였다. 중장년층에게 요양보호사는 거의 국민 자격증이 되었고, 어린이 교육 전문 대기업은 사모펀드의 상조회사를 인수했다. 20대 시절 친구가 고액 알바인 줄 알고 갔다가 하루 만에 도망쳤던 장례지도사는 이제 각광받는 전문직이 되었으며, 시장 팽창에 따라 장례도우미로 나선 중장년층도 급증했다. 복지센터와 요양원은 눈에 띄게 늘어났고, 특수 청소업인 유품정리사 설명회에서는 퇴직한 법대 교수 출신의 유품정리사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에 반려동물 장례 시장까지 고려하면, 이제는 전직의 경력과 무관하게 죽음을 다루는 노동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북적거리고 있었다.
현대사회에서 은밀히 외면 받던 죽음은 이제 산업의 영역으로 빠르게 편입되고 있다. 자본은 터부를 넘어 죽음을 수익원으로 삼고 있으며, 고령화로 인한 사망자 수 증가와 퇴직 인구 증가에 따른 일자리 부족은 죽음 산업 성장의 시너지를 일으켰다. 특히 재작년에 보도된, 기증된 시신조차 영리 목적으로 거래된다는 충격적인 뉴스는 죽음이 돈이 되는 아연실색할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삶의 당연한 과정인 죽음을 외면하는 것도 이제 임계치에 다다른 것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최근까지 죽음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삶을 무한히 긍정하며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평범하고 어리석은 인간임을 고백한다. 세상의 변화와 운명적 필연을 머리로는 인정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죽음을 조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백 년도 채 못 살 존재이면서 나만은 영생할 것 같은 기분, 이 머리와 가슴의 괴리감!
죽음이 산업화되어 도처에서 맞닥뜨려짐에도 나는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여전히 꿋꿋하게 죽음을 외면하는 중이다. 이런 내 앞에 어느 순간 죽음이 다가온다면 내 정신과 감정은 어떤 상태가 될까. 자본과 수요가 만나는 죽음 시장의 성장을 바라보며 여전히 죽음은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괴리를 느낀다. 이런 정신과 감정 사이의 빈틈에 막상 죽음이라는 현실이 비집고 들어온다면, 그 균열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이런 내가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통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닭 한 마리의 빚을 갚아 달라고 했던 유언을 남긴 소크라테스를 만났다. 그리고 「장자」에는 사랑과 미안함이 뒤범벅되었을 아내의 장례식에서 질장구를 치며 노래를 불렀던 장자 본인이 있었다. 유머와 회한이 뒤섞였을 두 현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 인간이 이성으로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두 현자는 어떻게 죽음을 직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나는 지금껏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이번 기회에 생각해 봐야 되겠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왜 나를 불편하게 했으며, 장자의 어떤 관점이 죽음을 외면하던 나를 위로했을까? 나는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삶에 대한 원초적 집착 앞에서 두 현자의 깨달음이 어떤 차이와 극복을 가져왔는지 탐구해 보고 싶어졌다.

죽음이라는 상실 앞에서 절박하게 발버둥치다
혹한 속에 구조해 가족이 되어 살았던 막내 고양이 득템이가 6년 전에 죽었다. 구내염 치료 수술도 소용없었다. 녀석의 죽음은 한 달 넘게 내 일상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간식을 기다리며 앉아있을 때의 모아 앉은 공손한 앞발과 반짝이는 눈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서열 욕심에 누나 고양이를 이겨 먹으려 들던 녀석을 두고 ‘계속 키울 수 있을까’ 고민했던 지난날이 미안함으로 남았다. 특히 입양을 보내려다 실패하는 과정에서 겪은 억지 목욕 사건 이후, 녀석과 멀어지며 치아 관리를 놓치게 된 것이 결국 병이 된 것 같아 죄책감이 가시질 않는다. ‘그때 내가 좀 더 기다려 주었더라면’, ‘싫어해도 끝까지 양치를 시켰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가정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자책으로 떠오른다. 남아있는 고양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고전 공부, 그리고 소리 공부가 아니었다면 나는 펫로스 증후군을 이겨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족 같은 고양이의 죽음은 일상을 무너뜨린 거대한 재난이었다. 죽음은 내게서 소중한 것을 앗아가는, 그저 외면하고 싶은 불청객이 되었다. 죽음에 대해서라니 생각조차 하기 싫다.
4년 전, 친구가 직장암 4기 진단을 받았을 때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암이 간과 폐에까지 전이되어 체중이 36.8kg까지 줄었던 친구에게 40cm 개복 수술을 권했던 병원에 대한 혐오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못 해보고,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몇 달이 남았을지, 며칠이 남았을지 알 수 없는 친구의 시간 앞에서 나는 마음이 다급했다. 친구는 30대에 뇌종양과 림프종을 차례로 극복했던 경험 때문인지, 새로운 암 진단 앞에서 나보다 더 초연해 보였다. 지긋지긋하게 병원을 전전하다가 죽음을 맞는 비참함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친구 앞에서는 내색을 할 수 없었지만, 혼자서 꽤 많이 울었다. 당시 공부하던 온라인 대중지성에서 친구가 선물해준 「바가바드기타」로 공부하는 내내, 나는 책을 펼칠 때마다 눈물 바람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갖은 수소문을 해보다, 의료계 정보에도 밝고 인맥도 넓은 제약회사 영업사원 출신 동호회 형에게 연락했다. 친구와도 안면이 있던 그 형은 다른 대학병원을 추천 해주었고 우여곡절을 겪어 지금의 의사를 만났다. 운 좋게도 친구는 새로운 임상실험에 참여했고, 4년이 지난 지금 간과 폐까지 전이되었던 암 덩어리들은 작은 흔적만 남았다. 최근 만 50세 생일을 지나며, 격주로 다니던 항암치료 100회차를 맞았다. 현재는 임상을 끝내고, 다음 스텝의 치료를 고민 중이다. 하나의 큰 산을 넘었는데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죽음으로 인한 상실이 너무나 공포스럽다. 그 두 번의 경험은 나에게 죽음을 ‘언제든 소중한 것을 앗아갈 수 있는 불청객’, ‘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하고 싶은 것’으로 남겨두었다. 나는 여전히 죽음이 낯설다.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끝까지 거부하고 싶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 상실의 슬픔, 단절의 공포, 남겨진다는 외로움, 어떤 저항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 놓이는 것을 거부하고 싶다. 죽음을 이토록 회피하고 싶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싶은 내게는 은밀한 소망이 하나 있다. 가능한 한 주변의 누구보다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 남겨진 자의 슬픔을 견딜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차라리 그런 꼴을 안 겪고 내가 먼저 떠나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때가 된다면 주변의 친구들 지인들보다도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좋겠다는 무책임하고도 은밀한 소망. 슬픔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선착순 삶 탈출!’의 꿈. 죽음이 도처에 산업이 되거나 말거나, 난 죽음 근처에는 얼씬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장자를 읽으면서 나는 죽음을 이겨내거나 피하려는 생각을 멈추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소크라테스의 이성을 빌려 나의 무지를 짚어보고, 장자의 통찰을 빌려 나의 경직된 공포를 조금씩 이완시키는 것. 죽음 산업에서 직업을 찾는 것은 포기했을지언정, 죽음이라는 화두를 통해 삶을 더 깊게 대면하는 철학적 공부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두 현자는 말해주고 있었다. 나의 이 은밀하고도 무책임한 소망 앞에 소크라테스의 시선은 엄중하다. 그저 상상력이 빚어낸 무지의 공포에 압도되어, 있지도 않은 괴물을 피해 도망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 않냐고 꾸짖는 느낌이다. 한편 장자는 먼저 가든 나중에 가든, 결국 우리는 같은 바다로 흘러가는 물줄기일 뿐인데 왜 그렇게 삶에 연연하느냐 핀잔주는 느낌이다. 내가 죽음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모습과는 다른 두 현자의 시각을 분석해 보았다.

생존 본능의 공포 속에서 무지를 자각하라는 소크라테스의 일갈을 듣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사형이라는 판결을 선고받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고, 본인의 눈 앞에 찾아온 자신의 죽음을 맞닥뜨린다. 그는 정말로 눈앞에 찾아온 죽음 앞에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철학을 계속하는 것이 위험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인용하며 이렇게 답한다.
“죽음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지혜롭지 않은데도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에 다름 아니거든요. 그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안다고 생각하는 거니까요. 아무도 죽음을 알지 못하는데, 그것이 심지어 인간에게 생길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 가운데 최대로 좋은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그들은 그것이 나쁜 것들 가운데 최대로 나쁜 것임을 마치 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무서워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그 비난받을 만한 무지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소크라테스의 변명』, 아카넷, 72쪽)
아킬레우스가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하면 죽게 된다는 운명을 알고도 비겁하게 사는 것보다 정의로운 죽음을 택했듯, 소크라테스 역시 신이 부여한 검토하는 삶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두려움은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정의를 저버리는 비겁함에 있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지독한 무지’라고 일갈한다. 죽음이 선인지 악인지 인간은 결코 알 수 없는데, 그것을 최대의 악이라 단정 짓고 뒷걸음질 치는 행위는 논리적으로 파탄 난 행동이라는 것. 그의 시선은 이미 가변적이고 덧없는 현실의 그림자를 넘어, 영원불변한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를 향해 있었다. 그에게 육체란 영혼의 눈을 흐리게 하는 감옥이었으며, 죽음은 비로소 그 감옥의 문을 열고 완전한 이데아의 빛과 마주하는 ‘진정한 탄생’ 이었다.
그의 당당함이 나는 불편했다.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지켜야 할 삶의 중심, 즉 나만의 ‘이데아’가 내게 있었는지 자문해 본다. 죽음의 상황에서 삶을 관통하는 통찰과 신념에 의해 기꺼이 받아들일 수도 있었던 소크라테스에 비해, 내 삶은 죽음을 소외시키고 외면하며 오로지 생존에만 온통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림자가 일렁이는 현실 속에서 무지에 사로잡혀 죽음을 외면했다.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신념을 가졌던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신이 내린 마지막 검토 과제였고, 그는 그 과제를 평생 지켜온 논리로 정면 돌파했다. 그가 짚었던 지팡이는 ‘무지의 자각’이라는 단단한 이성이었다. 지혜와 통찰이 주는 가벼움으로 죽음마저도 옆 방에 건너가듯 일상처럼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나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미지 앞에서 단지 상상력으로 빚어낸 현실에 눈멀어 압도당하는 무지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소크라테스가 지향했던 ‘이데아의 세계’가 죽음 너머의 확실성이라면,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은 상실과 애통이 실재하는 가혹한 현실이다. 소크라테스는 나에게 네가 죽음에 대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냉정하게 구분해 보라고 권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현실은 죽음을 전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마음이다. 보이지 않는 초월적 이데아의 순수함보다 현실의 구체적인 슬픔이 내게는 더 절실하다. 머리로는 죽음에 대한 내 감정이 무지에서 나온 비이성적이라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지만,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죽음이라는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 다음 글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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