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 괘(夬卦, ䷪)와 다시 만난 것이 요 때였다.“‘쾌(夬)’ 자는 ‘툭 터버리다’는 뜻을 지닌 결(決) 자의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무엇인가를 한사코 거절하며 밖으로 내침이 마치 물을 가두어 놓은 둑을 터서 물이 고여 있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 다시는 어떻게 해야 함께 있을 수 있는지를 묻지도 않는 것이다.”(왕부지,『주역 내전 3』, 김진근 옮김, 학고방, 1041쪽) 내 주장이 옳다며 자신만만했지만, 하루 못 온다고 그만두라며 내칠 일일까, 처음으로 의심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함께 할 수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1년 내내 수고하며 가르친 애씀은 싹 무시하고, 연주 날 내 힘듦만 중요하게 여겨, 이 기회에 툭 터서 밀어내려고 했구나, 아차 싶었는데, 결정적인 문장을 발견했다.“쾌 괘의 특징은 툭 터서 밀어내는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할 수 없다.”(같은 책, 1064쪽) 아뿔싸! 왜? 음(陰)이 드러나면 사람에게서는 소인⋅여자⋅이적(夷狄)이 되고, 심리에서는 이로움과 욕구를 탐함이 된다. 대처하는 방법은(내침이 아니라)보호하고 어루만지는 것이다. 만약 이들을 맞서게 해놓고, 자신의 밖에 있는 존재로 보아 교화하려 들어 그들의 노여움을 가중한다면, (내 마음은) 곧 우려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집이 되고 만다. 이는 이치상 필연이다. (같은 책, 1042쪽)이래서 마음이 불편했나? 실마리를 잡은 듯했다. 첼로 샘을 하나뿐인 음으로 여겨, 1년에 딱 하루 올 수 없음을 큰 문제로 만들어 맞서게 해놓았다. 또 자신의 밖에 있는 존재로 보아 그만두라고 말함으로 첼로 샘을 노엽게 만들었다. 주역은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환이 밖에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안에” 있었다.
점심 모임을 앞두고, 이만큼 알아차린 게 다행이었다. 먼저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첼로 선생님, 선택을 강요한 것 사과드려요. 연주는 다가오고, 장소는 음향이 엉망이라 마음이 더욱 급해져서,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요. 제 말이 지나쳤어요…. 다른 선생님께서도 마음이 불편하셨지요. 사과드립니다. 맛난 음식 나누며, 올해도 지혜와 힘을 모으는 기회가 되길 기도해요. 메뉴도 미리 골라보시며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면 좋을 듯해요. 고맙습니다.’ 아무도 답글을 달지 않았지만, 삐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무엇보다 마음을 살피라는 문장이 많았다.“사람들의 마음 씀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채 꽉 틀어막아 그들이 행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자신의 마음을 처리함이 위태롭고 이로움과 욕구가 이를 올라타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 씀을 잘못 처리하는 것은 위험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마침내 틀어 막히니, 넓고 평온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믿음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쾌 괘의 상에 드러난 교훈은 일말의 사사로움이라도 깨끗이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면 끝마칠 때까지 더욱 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 툭 터서 밀어낼 상육효는 소인된 내 마음이었다. 개교 때부터 지휘자로 누려온 기득권을 앞세워 새로 온 선생님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지 않고, 작은 허물을 크게 만들어 밀어내려 했다. 의로움(공동체의 윤리)으로써 내 욕구(남이 내 뜻대로 순종하게 하려 함)를 제어하지 못했다. 지난 카톡을 다시 읽었다. 기억 속의 내 이야기에 구멍이 보였다. 첼로 샘이 도우려고 애쓴 흔적을 애써 무시했고, 작은 일을 크게 생각하여 억울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여기서 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이 불쌍한 주인공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꾸며, 주위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왜 몰랐을까? 아주 오래된 습관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옳음을 곱씹으며 논리적 허술함이 없도록 단단하게 만든다. 내가 옳지 않음을 증명해 보렴. 그 생각 속에서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