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장자와 우리의 차이다. 우리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맞이하면 상실감에 빠져 몸부림을 친다. 사유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중략) 아내의 죽음 앞에서 질장구를 쳤다는 이 에피소드를 다시 소환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 말은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슬퍼할 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자들의 죽음』 고미숙 지음, EBS BOOKS, p.66)
나는 처음엔 곰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30년이란 세월을 충분히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되짚어보면, 나 역시 곰샘의 말처럼, 죽음을 ‘참혹한 절망과 허무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사건’으로만 받아들여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자각이 스며든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무지’라고 했지만 나에겐 오히려 ‘편견’에 더 가깝다. 내가 마주해온 죽음들이 대부분 비극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자 초년병 시절 일과 삶은 극단적인 현장과 맞닿아 있었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항공기 추락사고, 지존파 사건 등. 사건·사고 현장에서 접한 죽음들은 언제나 갑작스럽고, 폭력적이며,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의 결과였다. ‘업무로서의 죽음’에 길들여진 감각은 아내의 죽음을 되돌릴 수 없는 비극으로만 남겨두게 했다.
여기에 더해,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 역시 피상적이었다.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직선적인 역사적 관념과 죽으면 존재가 다른 곳으로 옮아간다는 막연한 믿음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 들여왔다. 그래서 죽음을 수없이 보았지만 ‘죽음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사색해 온 적이 없었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해석 역시 그 연장선 위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아내의 죽음 앞에서, 그 이해의 틀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디로 갔는가”라는 질문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딘가에 있다고 믿으면서도, 나는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막 죽었을 때 나라고 어찌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삶의 시작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본디 생명은 없었어. 단지 생명이 없었을 뿐 아니라 본디 형체도 없었어. 단지 형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본디 기(氣)조차 없었어.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저절로 혼합되어 기로 변하고, 기가 변하고 형체가 되고,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되었다가, 다시 변해 죽음으로 돌아간 것이야. 이것은 (아내의 삶과 죽음은)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변화와 같은 것이지. 이 사람은 이제 천지라는 큰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을 뿐이네. 그럼에도 내가 아이고 아이고 하고 울부짖는다면 운명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쳤다네. (『낭송 장자』, 장자 지음, 이희경 풀어 읽음, 북드라망, p.18)
장자의 말들을 곱씹을수록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 클릭 한 클릭씩 교정 되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을 ‘이동’으로 보면, 떠난 이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게 되고, 남은 나는 구조적으로 단절 속에 놓인다. 하지만 죽음을 기의 운동성에 따른 생성과 소멸, 즉 ‘변화’로 보면, 죽은 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 같은 흐름 속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단절이라 믿어온 감각 역시, 어쩌면 변화의 한 국면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침묵의 의미도 달라진다. 나는 관계가 끝났다고 여겼기에 말을 멈췄다. 더 이상 닿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알던 방식으로 이어지지 않을 뿐이라면, 지금의 침묵은 막힘이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관계의 자리일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단절’이라 부른 순간들 역시 하나의 변화의 장면이었다. 나는 그것을 유지하려 했고, 바로 그 지점에서 무너졌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사라진 관계를 되돌리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변화한 관계를 이해하려는 쪽으로 시선을 옮겨 보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