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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두번째 시간- 1학기 5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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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첫마음 작성일14-03-20 10:13 조회3,24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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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두 번 째 시간. 곰샘강의
 
지난 해와 올해 우리는 니체를 만났다. 어려워하면서, 불편해하면서 만났다. 이제 니체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책 내용 전체를 이해하여 정리하려고 하지 말고 니체의 개념과 전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니체를 공부해보라. 니체는 촉발의 기운이 강한 사람이라 대부분 니체에게 반하게 될 것이다. 곰샘이 우리에게 예언하신 내용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니체는 여전히 어렵고, 니체와 만났다기보다는 어렴풋이 저 멀리서 목소리만 들은 느낌이다.
우선 니체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을 강의를 통해 들은 내용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의 개념이다. 낙타는 온갖 무거운 짐을, 그것도 자신의 짐이 아닌 남의 짐을 지고 변화도 없는 길, 열사의 사막을 묵묵히 걸어간다. 이것은 교과서, 참고서라는 짐을 지고 가는 중고생, 그리하여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취직하여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죽어라고 일하는 회사원의 모습이다. 낙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은 노후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현재를 저당잡힌 채 모든 현재의 삶을 과도기로 간주한다. 대학간 후에, 취직한 후에, 집을 산 후에....’등으로 현재의 삶을 금욕주의적으로, 무거운 짐을 진 채 살아간다. 현재를 과도기적으로 보는 것은 이 세계의 삶은 죽은 후 유일신이 다스리는 천국으로 가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근데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은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근면, 성실하게 일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 신의 축복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자본이 신의 자리를 대신한다. , 지금의 정규직의 삶은 대기업이 주는 많은 월급, 성공에 자기 영혼까지 팔아버린다. 이들을 지배하는 힘은 남의 짐을 진 채 살아가는 낙타의 정신, 노예이다.
그리고 사자, 그는 위대한 부정, 신성한 부정을 행사하는 존재이다. 사자가 자신을 옭아매는 것들과 처절하게 싸우는 용맹정신은 예찬할 만한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하고 열심히 무언가에 맞서 싸운다. 이는 현재 대안없이 열심히 싸우는 진보주의자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래서 출구를 찾지 못해 자본주의에 진 것이다.
다음은 어린아이, 어린아이는 목적은 단 하나다. 오늘 자기 삶을 잘 사는 것, 지금 이순간 자기 몸에 이로운 것을 하는 것이 목적이다. 어린아이가 진흙을 가지고 놀면 놀이를 통해 칭찬받겠다든지, 진흙으로 무얼 만들겠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노는 것이다. 누구도 이들을 무엇으로든 옭아맬 수가 없다. 자기 행위의 준거가 자기 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사자가 맞서싸우는 용을 만나도 겁내지 않는다. 이것이 자유로운 정신이다. 우리 정신은 이렇게 3단계를 거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나의 삶을 보니 낙타의 삶이다. 제도, 관습, 도덕, 가족 등에 얽매여서 불안해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내 삶이 나의 주변을 더 사막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되기는 힘들더라도 사자의 용맹스러움만이라고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양심의 가책과 원한감정
  야훼가 금지한 선악과를 먹으면서 인간은 창조주인 신에게 죄를 짓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만든 난장판 세상에 인류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독생자 예수가 왔으나 인간은 그를 죽였다. 예수를 죽인 인간의 행위는 그 죄가 너~무 커서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 고로 인간은 이 세계에서는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며 끊임없이 죄의식을 내면화하고 신체를 경멸한다. 그래서 가톨릭이 지배한 중세 사회에서는 신체를 채찍으로 때리고 학대하며 웃으면서 살 수가 없었다. 중세의 근엄하고 굳은 표정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예수를 죽였다는 어마어마한 부채를 안은 인간은 한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비극적 존재이며 비극은 여기에서 특권화된다. 이러한 죄의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그 양심의 가책을 밖으로 투사한 것이 원한 감정이다.
그리고 TV 드라마는 양심의 가책과 원한감정을 단골 주제로 삼는다. 즉 가족의 행복이라는 보상을 위해 헌신적으로 요리, 자녀양육, 집안일을 하는 여성. 그러나 의도한 행복이 지켜지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원한 감정을 갖게 된다. 이 여성의 삶은 순수하고 비참하고 처절한 것으로 그려지며 불치병에 걸린다. 하여 우리는 이 여성을 동정하고 보살펴줘야 한다. 마치 우리에게 잘못이라고 있는 양. 자신의 삶의 준거를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보상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이런 드라마속 여성의 삶, 우리시대 여성의 삶이 곧 노예의 삶이다. 양심의 가책과 원한의 인간은 한없이 나약해져서 벌레, 거머리 등이 되고 자기 삶을 긍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니체는 이런 비극적 삶이 아니라 몸을 가볍게 하고 춤을 춰라고 웃어라고 한다.
 
 우연과 영원회귀
  영원회귀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과 소멸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순간들의 영원한 되돌아옴만 있다. 한순간 한순간 안에서 이전과 다른 차이를 만들면서 생성한다. 생성은 반복과는 다르다. ,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와 같이 반복이 일어나지만 한번도 똑같은 적이 없다. 이것이 영원회귀다. 이것이 삶이다. 반복에서 차이를 만들려면 매번 우연이라는 변수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적 삶에서 마주치는 병, 사건들이 모두 우연이다. 이들을 고통이라거나, 불행이다라거나 운이 없다거나 누구 때문이라거나 라고 규정하지 않으면 어떤 것이든 새롭게 구성할 수 있고 다르게 변주될 수 있다. 병이나 사건들에 대해 팔자타령하고 하나로 규정하면 우연이 주는 차이가 모두 사라지고 똑같은 비극적 패턴이 반복된다. 이렇게 하지 말라. 차이들의 무한정 되돌아옴, 매번 다른 것이 되돌아온다 이것이 곧 삶이자 영원회귀다.
 
차라투스트라
  자기를 넘어서라, 자기로부터의 혁명, 이것이 차라투스트라가 주는 메시지다. 차라투스트라는 빛의 종교 조로아스터 교의 창시자이다. 태양이 너무 커서 태양 앞에 선 인간은 한없이 작고 나약해진 존재, 신 앞에 무릎꿇는 비루한 존재. 한없는 빚을 안고 사는 채무자라고 기독교는 규정하지만 니체는 이의 가치를 전복시키기위해 차라투스트라를 등장시켰다. 사실은 인간은 태양만큼 높아질 수 있는 존재이며 한없이 고양될 수 있는 존재, 무한하게 다른 존재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어디까지 고양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라며 기독교적 가치를 전복시키려고 차라투스트라를 등장시켰다. 불과 빛을 가지고 니체는 기독교 중심의 가치를 뒤집었다.
자기를 낮추고 소인배로 살아가지 마라. 우리는 무한하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고 내 삶을 주관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한없이 자유롭고 충만할 수 있는 존재, 그게 인간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내가 내 삶을 주관하는 존재가 될 것인가, 누구의 시다로 살 것인가에 대해 즉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니체를 만나는 것이 어려운만큼 후기를 쓰는 것도 수월치가 않다. 그저 인간을 무한히 사랑한 인간, 초라하고 왜소한 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불을 뿜듯 자기 안에서자신의 삶의 근거를 스스로 찾으라는, 다양한 나를 찾고 나를 위해 살아가라는 메시지만 들린다.
댓글목록

혜안님의 댓글

혜안 작성일

니체를 두번째 만나니 좀더 친근하게 느껴지긴 했어요.(곰샘의 친절한 설명덕에~ㅋ)  무척 병약했다던 그의 신체에서 어떻게 이렇게 건강한(!) 사상을 낳을 수 있었는지...병도 병 나름인건지..ㅋ 한편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정랑샘, 잘 읽었습니다~!^^

일명님의 댓글

일명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