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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의 시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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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월이 작성일14-06-07 15:03 조회3,98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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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선생님의 위생의 시대 수업 후기입니다.

 

더운 날이 계속되니, 여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특히 습열이 많은 여름이라 더 덥고 힘들거다. 사실 지금보다 제일 덥고 힘든 때는 입추 전 2, 미토인 때다. 그때는 두달 동안 저장되었던 열이 복사되어 열기가 올라오므로 가장 더운 시기이다. 지금이 제일 덥고 힘들다고, 올해가 제일 힘들다고 매년 투덜되면 안된다. 올해는 내가 어떻게 버티나 보라. 자연의 변화를 알면 그걸 운용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특히 여름에는 열이 치성하여 정신의 초점을 잡기 어려우므로 생각과 동작을 최소화해야 한다. 생각을 멈추고 동선만 결정해라. 생각과 의욕이 넘치면 여름이 지난 후엔 불탄 자리만 남게 된다.

 

서유기에 나온 신체성과 근대인들의 신체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 몸은 다양한 입체적 지침이 있는데, 근대의 위생권력은 몸을 너무 평면화하고 균질화 하기 때문에, 딱 하나의 공간적 배열, 그걸로 그 사람의 체력을 다 재는 것처럼 한다. 그래서 병원 가서 검사하는 수치가 정상이 아니면 불안해하게 만든다. 마음의 효과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공간배열 안에서만 사고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내 몸이 아니라 가족/학교로 치환해버린다. 왕따 문제도 세월호 문제도, 신체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왜 복원력이 없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복원력은 고난을 겪어야 생긴다. 삼장법사도 81난을 겪어야 경전을 구할 수 있다. 언젠가는 나도 삼장법사처럼 81난을 겪을 수 있게 될 거야 라고 생각해야 한다.


반면에 현대는 인간은 아무런 고난을 겪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전제한다. 이것이 위생 유토피아이고, 서비스 만능주의이며, 병리학의 신체에 갇힌 채 국가, 제도에 기대어 해결하려는 망상이다. 내가 나의 힘으로 살아가는 전제가 다 없어졌다. 기계적인 관점에서 사람을 보는 게 현대 생리학이다. 여기서 해결 안되면 심리학 패러다임으로 가니, 심리분석가들이 넘쳐나지만 스트레스니 트라우마로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은 여전히 많다. 점점 백신을 많이 맞게 되고, 태어나서 검진과 백신 맞는 것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윤리적 수행과 태도를 훈련한 적이 없는 것이다. 병원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검진 후 병이 없다고 들으면 아, 다행이야 하고 끝. 내 안의 잠재력을 끌어내지 못하고 그저 현상유지를 하면서, 사고 안 나기 바라면서, 근근이 살아갈 뿐이다. 어떻게든 피하려고만 해서는 결코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없다. 초점을 사람에게 돌려야 한다. 통과의례를 통해서 에너지를 힘들게 빼야 한다. 요새 젊은이들은 통과의례가 없다. 손오공이 계속 요괴를 만나는 것도 힘을 빼기 위해서다.

 

몸에 대한 시각 바꾸기: 시간을 사유하라

중독은 항상 쾌감과 폭력을 동반하게 된다. 현대는 폭력을 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현대인은자기 몸이 갖고 있는 생명성을 잠식하고 쾌락을 증대시키기 위해 애쓴다. 늘 불안에 시달리므로 확인을 위해 검진을 하지만 내 안에 어떤 힘이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행복하고는 싶다. 그러다 보니 쾌락에 탐닉하게 된다. 맛 집을 찾아 다니고 3D영화를 보고 첨단의 화려함을 추구한다. 안이비설신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안 해도 되는 감각의 확대가 쾌락이다. 이런 걸로 스트레스 해소가 된다고, 기분이 좋다고 인지하게끔 하는 회로가 작동하고 있다. 이런 걸 누릴 수 있는 건 부의 척도이긴 하지만 몸에는 해롭다. 몸의 에너지가 다 빠지고 감각이 망가지게 마련이다. 삶의 현장은 몸과 몸이 만나고 현장에서 몸이 열리는 것이다. 내 몸을 보는 시선이 내가 만드는 현장을 구체화시킨다. 쾌락으로 화폐화하는 습속을 버려야 한다.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몸에 대한 시각을 바꿔라.


몸에 대한 시공간적 사유가 필요하다. 우리는 생로병사를 하는 존재라는 생각, 그래야 질병, 치료,죽음, 이런 것들이 다 필요하다는 새로운 인식이 열린다. 공간으로만 보면 성숙하지 못하고 질병이 된다. 가을로 가기를 거부하고 봄, 여름에서 버티고 있는 거다. 부자연스러운 거다. 현대인은 시간성에 대한 자각이 없다. 시간의 리듬에 따라 몸이 바뀌는 것, 시간의 흐름에 맞게 자기자신이 흘러가고 있는 걸 봐야 한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스물에 독립하고, 마흔에 불혹, 오십에 지천명, 육십에 이순, 칠순에 종심소욕불유구,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렇게 자기 삶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는 공간만을 사유하기 때문에 양이 중요해진다. 자본주의는 결핍을 계속 강조하지만 경험한다고 해서 그 결핍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또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결핍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동진 출가한 스님을 생각해보라. 중생들이 겪는 희로애락을 모르는 채로 출가했지만 그것들에 대한 결핍이 있는 것은 아니다. 결핍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는 계속 결핍이 있다고 강조하고 내면화시킨다. 여기서 자유는 불가능하다. 시간성, 시간에 따라 다른 윤리가 필요하다. 시간을 사유하라. 내가 지금 어떤 계절에 들어가 있는지. 몸은 끊임없이 바뀐다. 특히 대운 바뀔 때 몸이 확 바뀐다.

 

병리학의 배치로부터 벗어나는 길: 고생하면 복이 와요

내가 겪어야 될 고생을 피하려고 하면 안 된다. 내가 피하면 질량불변의 법칙에 의해 가족이든 다른 누가 대신 고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 한 사람 구원이 된다는 것은 81난을 겪는 것이고 그런 순간이 중생에게는 복이 되는 것이다. 이걸 피하고 쾌락을 구하면 한걸음도 못나가고 늪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의 쾌락을 위해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래서 쾌락은 폭력과 짝을 지어서 다른 누군가를 고생시키는 것이다. 사회 전체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버는 만큼 누군가는 털리고, 스마트폰을 쓰는 만큼, 고릴라들의 서식지가 줄어든다. 어떤 생명이 치르는 대가가 쾌락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편리하기를 바라고 내 행복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는 것이다. 나는 폭력과 짝을 지어 살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인 것. 그런데 나는 착해,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하고, 훌륭한 며느리에 아내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나 혼자 착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착한 사람, 내조 이런 거 안에 얼마나 많은 다른 희생이 전제되어 있는가. 그 안에서 선악을 시비하고 착하네 마네 하는 것은 다 소용없다. 그래서, 고생한 만큼 복이 있는 거다. 고생을 기꺼이 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깨달음이다. 부처님이 한 일이 생고생한 거다. 쾌락 안에 있어봐야 쾌락을 누리는 사람은 허무하고, 그 쾌락을 대주기 위해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 한다. 사서 고생하는 것이 구도다. 그냥 남한테 당하면 피해자지만, 내가 사서 고생하면 구도다. 쾌락과 고행 사이의 중도, 이 사이를 몸으로 겪어야 한다. 담백하고 소탈하게, 배고플 때 밥 먹고, 목마를 때 물 마시는 게 깨달음이다. 부처님은 죽을 때 춘다의 공양 때문에 고통을 겪었지만, 그게 번뇌가 되지는 않는다. 고난을 겪지 않는 게 아니고, 겪지만 다르게 겪는 것이다. 모든 중생은 다 깨닫게 된다. 오만년 뒤에. 고통을 다 겪으면 결국은 깨닫게 된다. 고통이 끝나면 업장도 끝나는 것이다. 죽어야 영원회귀가 된다. 제때 죽을 수 있는 게 행운이다. 죽음에 대해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맑은 정신으로, 내 삶의 주인으로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제때에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연습을, 훈련을 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수행이고 구도이고 생명의 네트워크에 들어가는 길이다.

 

댓글목록

일명님의 댓글

일명 작성일

이렇게 빡빡하게 공부했군요!

freshair님의 댓글

freshair 작성일

후기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세상 제대로 살기가 참 어렵구나...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