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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기 1주차 후기- 청년백수를 위한 길위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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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창공 작성일14-10-16 11:04 조회3,4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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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의 시대- 임꺽정과 칠두령에게 한 수 배우다!


청년백수 임꺽정과 칠두령

   80년대 운동권에서 소설 『임꺽정』이 많이 읽혀지다 보니 그 이미지로 활빈당이나 의적으로 임꺽정이 묘사된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소설에서 그런 장면은 어디에도 없다. 오죽하면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스러운 인물이라고 해서 걱정이라는 발음에 힘을 주어 ‘꺽정’이라고 했을까! 그저 놀고~ 먹고~ 그렇지만 꺽정은 집안에 틀어박혀있지도 않고 기가 죽지도 않는다. ‘백정’이라는 직업이라도 가지라는 아버지 말에 그럴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답한다. 그렇다고 삶의 비젼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참 걱정스러운 인물 맞다. 그들에게 있어 부나 경제는 삶을 위한 도구나 수단이었지 결코 목표나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직업을 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직업을 거부한 것이다. 왜? 그렇게 사는 것이 곧 '인간의 길'이라 여겼기때문이다.

  나중에 칠두령이 되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꺽정은 길 위에서 무술도 배우고 친구도 만나고 각시도 얻는다. 배움만 보더라도 떠돌아다니다 보면 어디선가 배우게 되어있다. 아니 배움의 자세를 갖게 된다. 길 위에서 배운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떠돌다보면 대단한 내공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서 배울 수 있다. 이런 방식은 지금의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길 위로 나서지 않는 한 신체로 새겨지는 배움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이들은 나이 13~14세인 지금의 중딩 나이에 길거리로 나온다. 지금의 중딩을 상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작가 홍명희도 13세에 결혼하여 15세에 아들을 낳고 나중에는 그 아들과 맞담배를 피셨다나 어쨌다나^^


왜 지금이 백수의 시대인가?

   7,8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 직업, 결혼은 거의 고정된 인생의 흐름이었다. 이 흐름을 고정시킨 것은 산업자본이다. 그 당시 공장, 사무실, 스위트홈의 구조에서 벗어난 자들은 비정상적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금융자본주의 사회이고 디지털화된 사회이다. 이 자체가 가두어 둘 수 없는 일자리인데다가 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교육과 서비스만 직업이 늘어났다. 결국 여성의 일자리가 많아지고 남성의 일자리가 줄어든 셈이다. 이래저래 청년백수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세상 천지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방식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백수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수밖에. 예전에는 직업을 갖는 것이 흐름이라면 지금은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흐름도 바꾸어야한다. 백수로 살다가 필요할 때 직업을 갖는 식으로! 그것이 흐름이라면 정규직과 백수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한다. 그런데 이걸 계속 정규직의 하류로 생각하고 있으면 이 사람은 시대와 역행할 뿐 아니라 이 시절에 자신을 한없이 열등하게 보게 된다.

   그런데도 이들이 취업준비생이라는 이름으로 정규직에 매달리고 있다. 직종이나 하는 일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정규직, 공무원이 되고자 현재를 저당 잡히고 있는 것이다. 이건 노예를 희망하는 거나 다름없다. 자신의 스타일은 상관없이 월급만 받으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것. 그런 욕망을 키워내면 문제가 된다. 실제로 정규직의 문턱을 넘어온 직장인들은 빚이 늘어나고 건강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스펙이니 벤처니 대박이니 하며 생명에너지를 써서 죽어라고 달려갔지만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대강 눈치 채고 나니 삶의 동력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허전함을 해소해보고자 쇼핑중독, 술중독, 도박중독, 섹스중독으로.


청년백수가  살아남는 방식

   드라마에서 이념적으로 싸우고 갈리고 하는 장면이 많다. 그렇지만 사람은 그렇게 살 수가 없다. 이건 리얼리티가 빠진 허구일 뿐이다. 인간은 그냥 넋 넣고 사는 것이다. 심청전에서 심봉사가 심청이가 팔려간 후에 뺑덕어미와 놀아나는 것이, 그리고 영화 괴물에서 딸이 납치되어 울고불고 하지만 모든 가족이 이내 엎어져 자는 것이 실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모습이다. 인간은 아무리 슬픔에 빠져있다고 해도 3일 이상 같은 감정으로만 살지 못한다. 인간이 생명으로 태어나 살다보니 때로는 계급적 저항을 하는 것이지 계급적인 것만 있다면 어떤 체재도 유지될 수 없다. 근대이후 사람들은 폼을 잡고 비장하지만 사실 삶은 그냥 사는 거다. 이것 말고는 다른 목적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 우리는 기쁘게 살아야하고 즐겁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낀다. 불행하다는 것은 ‘살아라’하는 것 안에 이념과 가치가 개입되면서 감정적으로 고정된 상이 생기게 되고 그 때부터 불행해지는 거다. 이것은 망상이다.

   인간의 본성은 끝없이 자기 활동을 하면서 삶을 창출하는 거다. 그러려면 청년들은 임꺽정과 칠두령처럼 길 위로 나와야한다. 지금은 학교도 가정도 감옥이 되었다. 안락한 감옥! 청년들은 부모에게 저항할 의지도 없고 힘도 없다. 부모가 가진 재산 때문에 완전 중독된 것이다. 길바닥으로 내몰아야한다. 사람의 생명체라는 것은 눈을 떠서 해가 질 때까지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활동이 돈이 되든 안 되든 상관이 없다. 지금은 신체활동이 없다. 이건 반생명적이다. 낙이 없는 거다. 길 위로 나서게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청년기에는 새로운 인생을 탐색하는 시기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길 위로 나서는 것이 맞다. 배낭여행으로 돌아다니던지 적당히 사고를 치던지 하며 굴러다니다보면 인생의 쓴 맛 단 맛을 알게 되니 그 다음엔 뭐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지금 세대는 이 과정이 빠졌다. 그 놈의 정규직에 ‘올인’한다는 핑계로 모든 것을 담보 잡히고 있다. 이것은 위험하다. 길 위에서 필요한 만큼 직장을 가졌다가 돈을 모으면 그 돈으로 내 삶을 운용하는 걸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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