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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송과 글쓰기 수업 후기(5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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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량 작성일15-04-06 00:11 조회3,5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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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가 늦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지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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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기운이 오른 지난 토요일에 우리는 열공을 했습니다.
사실, 날이 아무리 좋아도 독송 시험이 끝나야 맑은 하늘이 눈에 들어오고, 남산의 물오름이 느껴집니다.
잠깐의 남산 산책이 심기일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맥문동탕'의 방제에 대해 시험봤습니다.
누구는 한자를 그리면서 외운다고 하셨지만 다행히 모두 통과했습니다. 대단한 그림 실력입니다!
더욱이 정환군이 약성가를 애써 기억하며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어서 모두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멘토의 특훈이 일주일 동안 있었다고 하더군요. ㅋㅋㅋ


이번 독송수업은 신음허의 명방인 <육미지황환>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도담샘도 음허에 좋은 방제라며 강조하셨던 거시기입니다.
精은 몸 속에 있는 진액으로 소변, 땀, 피, 침, 골수 등을 말한답니다.
신장이 이것을 저장하고 관리하는데, 이것이 부족해지면 생장, 발육, 생식 등 몸의 생리 현상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정이 부족하면 허리나 무릎이 시큰거리고, 머리가 어지럽고 눈 앞이 아득하고, 귀가 잘 안들리거나 치아가 흔들리는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쓰는 방제가 바로 육미지황환입니다.

하지만 약은 약사와 상의해야겠지요?


글쓰기 수업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차라)로 곰샘이 강의해 주셨습니다.

<차라>를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횡설수설한 말들입니다.
그로 인해 어느 부분에 밑줄을 그어야 할지 당황스럽기 그지 없고,
진한 글씨나 다른 폰트의 단어가 나오면 중요한 부분인 줄 알고 정신차리다가  읽고 난 뒤에는 줄을 그어야 할지 말지 고민됩니다.
정말 암송할 부분을 찾는 것 자체가 큰 숙제였습니다.

쉽게 곁을 내 주지 않는 니체..
곰샘의 안내로 그와의 여행을 시작해 봅니다.


1. 니체는 철학적 명제를 운문적 글쓰기 방식으로 설명

<차라>는 시, 운문 형식이라고 합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도 철학적 명제를 기하학적 방식(정리와 공식)으로 증명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채택한 것은 당시의 전통 철학(형이상학), 기독교, 주류적 가치를 깨부수기 위함입니다.
니체도 자신의 작업을 '망치'질로 표현했던 것처럼요.

한편 곰샘께서는 <차라>를 보면 니체가 '병화'의 기운일 거라고 생각되어진답니다.
실제 니체는 귀도 안 들리고 눈도 잘 보이지 않았고 40대에는 발작과 졸도로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는데요.
이러한 증상은 음허화동으로, 독송시간에 배운 대로 신음허로 인해 정이 고갈되고 상화가 망동하는 상태입니다.
이런 건강하지 못한 신체로 니체가 <차라>를 남긴 것을 보면, 니체는 신체의 질병을 적이며 동시 벗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곰샘의 당부처럼 병을 핑계로 배움을, 글쓰기를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그럼, 니체가 부숴버리려고 했던 낡은 서판들은 무엇일까요?


2. 서양의 주류적 가치에 망치질하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근간으로 하여 이데아(본질)/그림자, 이성의 세계/감각의 세계 등으로 구분되는데요.
이것이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만나면서 신/인간, 초월/현실, 영혼/육체, 선/악, 삶/죽음 등의 이분법이 발생합니다.
신은 초월적 존재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바깥에 존재합니다.
신의 속성을 많이 갖고 있는 것은 정신으로서, 육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에는 몸을 사유하는 전통이 없다고 합니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기독교적 전통에 대항하여
신은 우주 안에 내재하고 있음을 기하학적으로 증명했다가 이단으로 쫓겨나 렌즈세공을 살아야됐습니다.

형이상학+기독교 전통에서 발생한 윤리학은 사람들에게 현재의 삶을 부정하고 초월적 세계(천상)를 욕망하게 합니다.
초월적 신을 설정한 순간 인간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능력을 버리고, 비이성적 존재가 되버렸습니다.
또한 신체를 부정하고 영혼 순결을 강조하여 금욕적, 비장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니체는 이러한 삶은 노예, 천민, 약자의 삶이며, 동정과 연민에 의해 살아지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귀족, 강자는 자기 가치에 의해 사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니체는 근대적 인간을 노예, 천민으로 보았는데요, 이를 넘어선 존재로서 '초인(위버맨시)'를 제시하여 인간이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랬습니다.


한편, 니체는 마르크스와 동시대인이며,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산력과 자본의 성장이 폭발하던 시기로 사회주의가 대두된 시대를 살았습니다.
니체는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망치를 들었는데요,
노동자=임금노예이며 평등사상 또한 허상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차별이 있어야 존재의 긴장감이 있고, 그 차이가 있어야 인간이 자기를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니체가 부숴버리려고 했던 뿌리깊은 서양철학의 전통은 이해가 약간 되는데요.
이렇게까지 독하게, 때론 욕설로 일갈해야 했을까요?

이것은 니체가 인간을, 세상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애정이 없으면 미움도 없으니까요..

자, 곧 에세이 철이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 인욕정진에 담겨진 애정을 새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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