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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송과 글쓰기 6주차 수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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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yun 작성일15-04-09 15:01 조회3,3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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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송수업 후기>

이번 6주차 독송수업에는 대중지성 3학년 이성남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땀 도둑 잡는 당귀육황탕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땀은 몸이 균형을 잃었을 때 발생하는 증상으로 자한(깨어있을 때 나는 땀)과 도한(잠들었을 때 나는 땀)이 있습니다. 도한이란 자기 몸 안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기 위한 자기 조절 능력을 잃었을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도한이 나고 열이 나며, 얼굴이 붉고, 가슴이 답답하여 괴로우며, 입이 건조하고, 입술이 마르며, 변을 보기가 어렵고, 소변색이 적색일 때 당귀육황탕을 처방하여 잃었던 자기중심을 되찾게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 이번 주 시험범위는 당귀육황탕의 방제구성, 효능과 주치, 황기/황련/황금/황백의 약성가, 약성, 효능, 당귀육황탕의 변방 모려산의 방제구성과 주치까지 시험범위입니다.

     

<글쓰기 수업 후기>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기원과 계보를 찾아가다 보면 신과 이데아가 들어가 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많고 생활의 축으로 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신을 바깥에 두고 초월적으로 전지전능하게 존재하게 했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하는데 아직도 신이 개입해서 감시와 처벌을 하는 게 이상하지 않는가? 이상하다고 느껴야 되는데 이걸 그냥 믿기로 한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 이치를 알기 위해서는 묻고 질문하고 탐구해야 하는데 그것이 힘드니까 종교를 대행업처럼 여기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가 신이나 인생에 대한 질문을 빼놓고 사회에 나와 잘 경영할 수 있는 부르주아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죽음, 내세의 문제를 지성이 하지 않고 종교에 맡겨버리게 된 것이다. 신의 진리가 뭐냐고 고민하지 않고 돈 벌어서 소비하고 주말에 절이나 교회를 가는 것으로 진리에 대한 탐구를 대신한다. 


자본에 맞추다보니 대학에서는 시험 보는 학생들로만 채워지고 지성이란 게 없어졌다. 기업에서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취업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취득하지만 어차피 기업에 들어가서는 다시 배워야 하므로 자격증이나 취업공부는 형식적이고 껍데기인 것이다. 


삶을 전면적으로 보지 않고 분할해서 보게 된 기원이 신을 초월적으로 보게 되면서 육체와 정신이 나뉘고 육체를 죄악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니체는 신이 초월적 위치에 있으면서 인간을 만들어낸 것이기에 인간도 추악하다고 보고 몰락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이 죽어야 비로소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고 그것이 초인인 것이다. 


낙타는 니체에 의해서 가장 모욕적인 존재가 되었다. 엄청난 짐을 짊어지고 가는 무한한 인내력, 혹에 물을 저장하기에 물을 안 먹어도 굉장히 오래 견디는 것과 뭔가 생성되는 대지가 아닌 사막을 걸어가는 것으로 니체는 신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존재의 이미지와 동일시하여 낙타를 죽이고 싶은 인간으로 비유했다. 


낙타, 사자, 어린아이는 용과 대결하는데 용은 절대적인 입법자, 도덕률을 만드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니체가 동물들의 이미지를 사용하는데 서양이 자연과 인간을 같이 생각하지 못하고 중요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늑대는 안 좋은 이미지 때문에 멸종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양은 음양오행이라는 개념으로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농업시대에는 농번기 때만 일하고 농한기에는 쉬는 반면, 현대인은 낙타처럼 묵묵히 참으며 한 직장에 오래 다니면서 노동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런 존재들은 근대 문명과 함께 탄생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심성이 노동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본성이 바뀌었다. 


중력이 있어서 관성이 세게 되고 하던 패턴이 잘 안 바뀌게 된다. 관성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습관도 잘 안 바뀐다.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 이것이 있어야 살지만 니체는 의탁하지 말고 가볍게 춤을 추라고 한다. 


이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존재는 사자! 하지만 아니요는 저항과 부정으로서 거기서 끝나는 것이고 대안이 없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싸웠을 때 사회주의가 이긴 줄 알았는데 국가기업과 사기업에서 일하는 차이밖에 없었다. 사회주의도 노동과 자본이 인간을 자유롭게 해줄 것 이라는 것은 똑같아 진정한 대안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이 망하지 않는 이유는 철저하게 경쟁의 논리를 120% 활용하기 때문에 인간이 더 흥미를 가지고 뛰어든다. 캐나다의 경우 사회보장제도도 잘 되어 있음에도 그렇게 살다보면 심심하게 느끼고 지루해지기 때문에 결국 떠나게 된다.)


자본주의 자체가 공평하게 된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에 의해 된 것이며 기회의 동등함을 전제하지 않는다. 기회가 균등하다고 하면 자본주의적 탄력 형성을 못할 것이다. 


니체는 평균적인 것, 균질적인 것이 쓰레기라 생각했다. 


낙타는 자기 짐에 눌려서 못보고, 사자는 자기 힘이 너무 세서 소통이 안 된다. 어디를 가든 투쟁을 외치는 사람이 옆에만 있어도 힘든 것처럼 사자는 모든 사람이 두려워 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누구와도 소통하고 어디를 가도 재밌고 흥미로운 것처럼 어떤 권위에 억눌리지 않고 쾌락에 젖지 않아야 모든 것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보는 세계가 모든 것이고 다른 것들은 머리에 생각나지 않는다. 


영원회귀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것이고 목적을 향해가는 시간이 아님을 말한다. 목적을 정해놓으면 지금 내 삶은 그곳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 될 뿐이다. 현재 안에 과거와 미래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목적을 정해놓으면 지금 내 삶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 될 뿐이므로 현재 안에 과거와 미래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니체는 제자도, 친구도 없었다. 병이 많았고 일찍 쓰러져 10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죽음으로서 철학적 사유를 쏟아내는 삶을 살진 못했으며 그 시대에 니체를 알아주기는 힘들었다 


우리 자신도 진짜 마음을 나눌 친구가 있는지 생각해 보고 없다면 인생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니체, 스피노자, 연암 박지원이 모두 우정에 대해 말한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인데, 현대인은 그것의 가치를 모르고 있어 지인들 팔로워들에 만족하고 내가 사람에 대해 감정을 갖는 것이 있어야하고 중요하다. 내 신체가 세상과과 연결될 수 있는가? 연결이 되면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고 연결될 수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공부를 쿵푸라 해서 몸으로 체득하라는 것처럼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커져야 한다는 것이고 내가 그런게 생기면 타인도 나를 보고 그렇게 리액션하게 되어있다. 내가 타인과 교감하는 능력이 커져야 공부가 늘고 왜 공부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있으면 서로가 소외 되는 것이다.


* 우리가 이렇게 감이당이라는 공동체에 와서 공부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을 기르기 위해 오는 것이다. 친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미워할 줄 아는 열정조차도 없는 것이기에 미워한다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다. 사람과 연결되기 위해서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것을 잊지 말고 모두가 그런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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