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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글쓰기 수업_이광수의 <재생> 수업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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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yun 작성일15-09-07 16:21 조회3,3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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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는 대표적인 근대문학가로 책을 계속 읽도록 하는 힘이 있다. 계몽이나 민족주의가 아니라 휘둘리는 개인의 운명을 격정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기에 끝까지 읽도록 하는 힘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광수의 연보에 대해 살펴보았고 1902년 콜레라가 돌던 시절 9일 간격으로 부모님이 돌아가 초라하게 묻히는 슬픔이 있었다. 이광수 어머니가 세 번째 부인이었고 당시 아버지는 35, 어머니는 15살이었다. 어머니가 23살에 이광수가 태어나 너무 어려서 아이들을 어설프게 길렀고 사람들이 무시하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착하지만 무능, 무위도식, 생활력이 없었다. 이광수를 일찍 조혼시키려 부잣집 딸과 맺어주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 때 이광수가 너무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이광수는 부모에 대한 이야기, 가족, 전통사회의 조상들은 아예 없는 고아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루쉰이 국민정신개조를 위해 문학을 한 것과 성격이 다르다. 이광수는 도덕개조 의식(민족개조론 이후 도덕개조의식 강조) 행동하는 혁명성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도덕성을 배양하고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서 욕도 먹고 일종의 정신개조인데 무엇을 위한 정신개조인지를 고민하지 않았다. , 명성, 지위 보다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등 나이브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이광수는 끊임없이 사랑을 탐욕스런 방식으로 갈구한다. 이광수식 사랑은 기독교식 사랑으로 순수성, 맹렬함, 집작을 나타내며 결국 그 끝은 죽음을 가져온다.


  우리 자신은 현실에서 잘 모르는 듯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사랑의 방식도 사실 이와 별반 다른게 없지 않을까? 재생에서는 영어로 자기희생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가혹한 도덕주의를 위해 어떻게 자기를 희생할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돈 있는 백윤희와 영혼 있는 신봉구처럼 사랑과 돈이라는 이분법에 의해서 선·악이 극명하게 갈등구조로 되어있다.


  자동차를 타고 그 집에 가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도덕과는 문란한 퇴폐적인 생활로 순영이 가게 된다. p.62(19)에서 순간 욕망에 빠져드는 순간을 잘 묘사했다. 신봉구를 배신할 수 밖에 없는 물질의 쾌락에 불타오르게 되고 결국 온천에 가서 욕망에 지고 만다. 그래서 백윤희만 잘못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또한 순영은 순수한 남자에게도 끌려 둘 다 갖고 싶어 했고 그렇기때문에 순영이 받는 대가가 처절했을 것이다. 두 개의 욕망을 다 원했기에 죽음으로 밖에 해결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여성인물로서의 새로운 캐릭터의 창조였다. 순영은 줏대가 없어 금방금방 남자들에게 잘 넘어갔고 이광수가 도덕성이 없음으로써 변절의 성격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가장 끔찍한 모습의 죽음(p.598~599)을 안겨주는 것으로 응징한다.


  신봉구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순영에 대한 사랑이었는데 배신당하고 나서 결국 돈을 벌어 복수하겠다고 한다. 돈의 욕망으로 인해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들어가지만 묵비권을 행사한다. 감정이 극과 극을 달리며 개인적인 사랑 때문에 다른 것을 잊어버렸음을 깨닫고 반성하는데 이것도 갑자기 변한 것이다.


이광수의 주인공들은 성찰이 없다. 그래서 감정의 격차가 큰 것이 아닐까?

 순흥도 아내가 있었고 가족들에게 사랑을 베푼 적이 없었지만 아내는 폭탄을 안고 대신 자결했다. 변질의 존재들은 자멸의 길로 가지만, 이념적으로 견고한 존재들은 희생의 길로 간다. 결국엔 아무도 재생될 수 없는 파탄의 길을 보여준다. 이광수의 길은 결국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도한 도덕이 주는 폭력이 있는데 결국은 이런 것이 3·1운동 이후의 우리민족의 미래가 아닐까? 우리 민족이 변절해서 파멸하거나 여성=조국, 님 이라고 연결되던 때에 이 조국 사랑은 아무런 현실인식도 없는 조국 사랑인 것이다. 현실기반의 탄탄한 논리도 없고 계몽주의자 선각자들은 조급하고 감정적, 격정적으로 똘똘 뭉친 여성=조국이라는 사람들이었다. 원한만 가진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냥 갈 수 밖에 없다. ‘만 안은 채 계속해서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 열렬하게 사랑하면서 자기를 희생시키기는 하지만 아무런 비전이 없는 것이다. 이광수가 가는 길은 결국 창씨개명으로 가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근대 계몽이 갈 수 있는 것은 도덕성이라는 것밖에는 없는 닫힌 구조를 보여준다. 안으로 쌓이는 정념은 결국 우리에게 벗어날 수 없는 한을 만든다. 한은 만들어진 이며 전통사회에서 한이 있었던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해소되지 않고 풀리지 않는 한! 원래 한국인의 정서는 한이 아니라 감정을 다 쏟아내서 풀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재생에서는 한의 정서가 깔려 있다. 제목의 재생은 삶이 아닌 한을 재생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백윤희는 퇴폐성, 환락을 아무 양심 없이 풀어내버리는 존재이므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물일 것이다.


식민지 근대에서 우리가 가야하는 길이 어디인가를 봤을 때 정말 갈 곳이 없었구나를 알 수 있다.


- 우리가 착각하는 것: 절대불변의 사랑에 대한 믿음, 이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의 한-> 자기파탄, 우울증, 죽음충동이 생긴다. 


이광수가 말하는 조국은 누구에 대한 사랑인가? 순영에 대해 뭘 사랑한 건지를 자꾸 의심하게 된다. 사랑의 관계성은 습자지처럼 얇았고 이광수의 조국에 대한 사랑도 습자지처럼 얇지 않았을까?  


 재생은 파국적인 작품으로 인물구도를 잘 봐야 한다. 루쉰의 길과 다르다. 루쉰의 복수가 감정의 여진이 전혀 없지만 재생에서는 복수를 하는 자와 당하는 자 모두감정의 여진이 남아있다. 신봉구라는 피해자는 능동적이기도 하고 피해의식에 대해 해소하려고 하는 노력도 하나 그 길이 근대의 사랑방식, 기독교적 사랑 방식에 갇혀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뻔한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어디로 갈지 모른다. 하지만 재생에서는 가는 길이 너무 뻔하다.


  순영은 자기의 욕망을 건드린 남자는 가해자, 자신은 피해자로만 생각하고 순영자신도 다른 살마에게 가해자가 된다.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이 나에게 피해준 것만 생각하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준 것을 생각 못 한다. 내가 어떤 마음을 썼기에 그걸 불러왔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다 자기가 불러들인 것이다. 성찰하지 않는다면 이만큼밖에 못 산다. 재생의 주인공들은 모두 소통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고 소통시키려 했으나 결국 이것 밖에 안 되지 않았을까? 무엇인가 해소되지 않는 감정의 잉여가 끝까지 여진으로 남아있는 글로 섬뜩한 작품이다. 재생을 읽으면서 불편한데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가고 있는 근대와 같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자꾸 다시 보게 되는 것 같다.


  이광수의 사랑, 근대를 하나하나 따져볼 필요가 있고 파격적이고 격정적으로 감정을 나누면 정상적이게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주인공을 쓰고 있는 이광수의 정신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원하는 건 루쉰과 소세키 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광수임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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