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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 무문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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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민 작성일12-04-06 13:45 조회2,8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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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가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언어를 통해 언어의 길을 끊는 선불교의 공안들을 봤다. 


언어는 실재를 반영하는 것도, 그에 대응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흔적, 끄적거림으로 존재하며,


언어를 통할때 '의미'는 자신의 고유성을 갖지 못하고 늘 다른 것으로 미끄러진다(무무관 239p).  


또 언어는 사유의 틀(분별, 번뇌, 공포 등등), 호오를 만들고, 업장을 두텁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이런 언어로 세상을 살아간다


또 언어는 우리를 알음알이로 인도하며, 기미나 흔적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깨달음은 단순한 알음알이가 아니며, 알음알이로는 신체가 변하지 않는다.


선은 여러가지 기미, 흔적들로부터 깨달음으로 들어가 끝장을 보려고 한다.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주체를 상실하고, 문자에 집착하는 사람은 경계에 떨어진 미혹한 중생이 된다. 


그래서  선승은 언어를 언어답게 쓰지 않고 언어도단을 감행한다.


스승은 제자를 궁지로 내몰고, 닥달하고, 손가락을 자르고, 고양이 목을 가르며 업식의 틀을 깨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극한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이후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다.


거기엔 어떤 신비적인 낌새나 초자연적 실재가 없다.


오히려 실재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 없이, 욕망의 흔적과 조바심 없이 관하게 되며, 그것이 곧 구원이며, 법계인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현재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 공간을 산다.


깨달음의 장도 지금 여기이며, 깨달을 후에 살아갈 곳도 지금 여기이므로,


다만 이렇게 가고 머물고, 눕는것, 상황에 따라 응접해 나가는 것이 도이고 법계이다.  


그래서 언제나 지금 여기 자기 자신을 문제로 삼을 수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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