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공부 후기 >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일성.png

신채호 공부 후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해숙 작성일12-06-06 13:56 조회3,244회 댓글1건

본문

토-일요일에 걸쳐 신채호의 용과 용의 대격전, 조선혁명선언을 읽고


문리스 샘으로부터 신채호에 대한 강의를 들었지요.


 


그리고 월요일, 마침 일하러 간 곳이 신채호 님과 관련깊은 고두미 마을 근처라서


일끝나고 오는 길에 잠시 신채호 사당에 들렀습니다.


사당에 가서 멋진 수염의 신채호 선생도 잠깐 보고, 묘소 앞에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다왔죠.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보며 선생께 물었죠.


'당신이 그렇게 멋진 사람이었더냐고'


'민족주의자로, 세수도 서서 할만큼 기개 높은 양반인 줄은 하마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시대까지 이렇게 우리를 발목잡는 근대의식을


그렇게나 경계해 마지 않던 선각자였는지는 예전엔 미처 몰랐다고.'


 


단재 선생,


선생의 '조선혁명선언'과 '용과 용의 대격전'은 당신의 작품들 중에서 한 셑트로 묶인다죠?


꿈하늘을 비롯한 역사인물전은 애국계몽을 기치로 내걸 때의 작품들이고요.


문리스 샘에 따르면, 근대의 기점을 두고 여러 설들이 분분하다합니다.


김윤식 선생 등은 영정조시대부터


혹은 1876년 개항, 1894년 갑오경장,, 1919년 3.1운동 등등으로


문학 진영에서는 이인직의 혈의누부터 근대문학이 시작됐다고 본답니다.


선생,


선생은 소위 애국계몽기(1895-1905), 이 시기에 논설 주필로 당당하게 시대를 논하는 논객이었다지요?


(우리의 곰샘은 이 시기를 좀 다르게 봐서 근대계몽기(1895-1910)라는 용어를 제안하셧다 합니다, (애국계몽+근대의 여러가지 포함))


암튼 선생은 이인직, 이광수, 최남선보다 베스트셀러 작가는 분명 아니었던 듯 합니다.


혈의누, 무정 등은 당시의 신문소설이라는 어마어마한 대중 미디어에서 어마어마하게 히트친 작품들인데 반해,


당신은 그 범주에 들지 않는 글쓰기를 했습디다그려.


문리스 샘은 우리에게 장르를 해체해서 신채호를 읽어보자고 햇습니다


그러면 신채호도 글쓰기의 장에 선뜻 들어올 수 있다고. 그래서 우리가 읽어볼 가치가 분명히 있는 텍스트가 된다고.


문리스 샘은 당신 단재의 혁명선언과 최남선의 기미선언문, 이광수의 2*8선언문 그리고 미완의 선언서인 염상섭문을 비교해 주셧습니다.


기미독립선언에서 최남선은 '일본을 탓하지 않는다'라고 햇는데 비해. 단재 당신은 일본제국주의를 시작부터 탓하고 적으로 규정한다고 햇습니다. 이렇게 규정한 데는 '세계무산계급 대 자본주의'라는 뚜렷한 구도가 당신에게 확고히 그려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인식은 이전까지 당신이 가지고 있던 역사관과 다른 것, 맞지요?


당신은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 등을 우리에게 끌어올 때, 영웅적 역사론자 아니었던가요? 역사는 위대한 영웅이 만들어 왔다는 것.


그런데 이제 당신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전에는 ' 기존의 제왕의 역사'에서 벗어나 '민중을 구한 영웅의 역사 역할' 로 민중을 각성시키려 했었지요?


그런데 거기서도 당신은 한계를 느낍니다. 3.1운동을 거치면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타협주의와 충돌하면서 당신은 이전을 돌이켜 봅니다


돌이켜 보니, 구시대의 혁명은 특별한 지배 계층의 바뀜에 지나지 않았다고.


기실 혁명은 지배층을 바꾸는 게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라는 구도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게 맞는 것이라고.


그래서 당신의 조선혁명은 '새로운 역사 주체의 탄생'의 선언문이 된 거죠


.


나는 여기에서 '대상'이라는 낱말을 생각합니다. '구세주'라는 말도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군가 나를 구해주는 '대상'이 아닙니다. 구세주는 2천년 전의 예수가 아닙니다.


내가 속한 세상을 구하는 이는 다름 아닌 '나'가 아닐는지요? '자각'이란 말도 이럴 때 쓰여야 하는 말이 아닐는지요.


그렇다면 나도 그 누구를 '대상'으로 보면 아니 되겠지요.


 


단재 당신도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당신의 동료들인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애국’이란 기치 아래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당신은 쓴웃음을 짓고 말지요.


그래서 당신은 조선혁명에서 이렇게 말했다지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라는 열렬한 부르짖음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 불합리한, 민중 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하는 유일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선각한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 각오의 제1로소이다<조선혁명선언4장>-문리스 샘의 발췌-


 


그래서 조선혁명선언은 서명자가 따로 없다면서요? 혁명 주체가 따로 없기 때문에?


문리스 샘은, 그렇기 때문에 혁명선언은 독립선언처럼 지금부터 내가 가질(누릴) 독립된 주체로서 권리를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의 독립과 인민의 자주민임은 선언의 결과로 획득되는 권리가 아니라, 혁명을 통해야만 생겨나는 이름이기 때문에.


거꾸로 혁명은 결의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실천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조건에 대한 선언이랍니다.


 


그래서 조선혁명 선언은 폭력을 통한 파괴선언이 된 것인가요? 단재 선생?


기존의 것들을, 기존의 판들을 깨야만 해서요? 판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 혁명이 되지 않는다면서요?


 


이쯤에서 나는 아하! 하고 고개가 끄덕거려집니다. 지금 우리가 왜 단재의 혁명을 보아야 하는가를, 왜 단재 당신을 읽어야 하는가를.


우리는 지금 기존의 유려한, 미려한 글쓰기를 하려 하는 게 아니지요.


우리는 지금 화려하고 거대한 용들이 춤추는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절박감에서 지금 이 공부를 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글쓰기가, 우리의 삶이, 뭐 그리 완전하고 그럴싸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세상의 기존의 판들이(내가 알고, 추구해왔던 삶이) 질식할 듯한 외로움과 척박함을 생산해 왔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바로 요걸 똑바로 보고 요걸 파괴하면 단재 당신이 끝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드래곤이 나올란가요?


어쨌든, 당신이 다른 이들과 타협함이 없이 맘껏 자신의 신념을 펼쳐보였던 글쓰기에서 우리는 또 하나 배웁니다.


나의 삶이 거칠고, 허름하고, 시대에 덜 떨어진 것 같아도,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각’하는 삶이되겄지요?



 

댓글목록

인디언님의 댓글

인디언 작성일

<p>수업을 못들어 몹시 섭섭하던차에 </p>
<p>문리스샘 강의안과 해숙샘의 후기를 읽으니 숨통이 좀 트이는 듯하나</p>
<p>한편으로는 못들은 수업이 더욱 더 안타까와지는데요. ^^</p>
<p>&nbsp;</p>
<p>&nbsp;</p>
<p>&nbsp;</p>
<p>&nbs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