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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 4주차 후기(푸코의 주체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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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눈웃음 작성일21-03-29 00:08 조회2,4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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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차 후기를 무려 2주가 지나 6주차 후기가 올라온 이후에 쓰는 게으름이 너무 부끄럽지만

시간 앞에 용기있는 죄인이 되는 마음으로 후기를 올려봅니다.


(일성 첫 오티때 개략적인 자기소개와 같이) 매일 야근과 회식으로 점철된 주중과 이로 인해 주말은 녹초가 되어

시체처럼 잠만 자던 생활이 너무나 공허하고 허무하여 뭔가 삶의 돌파구가 필요했던 차에

감이당과 일성 수업을 알게 되었고, 지방에 매인 몸과 매주 계속되는 철학 강의를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코피 터지게 고민을 하다가 시작도 안하고 고민만 하는 건 너무 바보같아서 일단 호기롭게 도전은 하였으나,

막상 바쁜 일상이 시작되고 '모 아니면 도' 식의 완벽주의적 성격이 후기를 이렇게나 늦게 올리게 되었네요.

후기라는게 결국 수업을 들으면서 들었던 저의 생각, 느낌, 감상을 포함하는 것이기에 

제가 이해하고 느낀 범위 내에서 올려봅니다.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은 이제 6주가 지나고 조금씩 주제와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서 훨씬 나아졌지만,

처음에 저에게는 정말 검은 것은 글자요, 하얀색은 여백이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평소, 외국저자의 책이 번역 잘못으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 번역체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던 터였고, 이 책은 더군다나 난해하기 짝이 없는 철학책이였기에 더욱 그랬던거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책 읽기가 너무 어려워 채운 선생님의 강의에만 의존한 채

어떻게든 개념을 잡아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4주차 강의가 되니 채운 선생님의 강의가 귀에 쏙쏙 들어오고

제 삶속에서 이 담론들을 어떻게 접목시켜야 되는지를 깊이 고민하게 해주는 부분이 있어 매우 인상깊게 들었습니다.


4주차 강의에 채운 선생님께서는 먼저 푸코의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푸코는 질문합니다. 1. 철학은 무엇인가? 2. 진리란 무엇인가? 3. 주체와 진리(진실)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때 근대 16세기의 고해성사를 말씀하시면서, 이때의 고해성사는 범죄 그 자체 뿐 아니라 범죄를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 내면까지 문제시하고 있고,

19세기의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적 여성, 환상을 가진 아이, 변태성욕(동성애)에 대한 이이갸를 하며

억압된 무의식은 꿈이나 말실수로 나타나며 이러한 억압은 겉으로 드러내면 치료가 된다고 하는데, 

내면과 무의식을 나의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푸코는 이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플라톤, 로마시대의 철학적 담론을 살펴보게 되는데요,

플라톤은 '자기배려'는 정치로 연결되며, 나 자신이 무지하다는 자각이 철학의 시작이고,

자신의 혼을 돌보는 것, 모든 상황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의연하고 초탈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시대 역시 '자기 배려'는 시작도 끝도 자기 자신이며,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문제로

이것이 철학의 목적입니다.


'잘사는 것인 무엇인가'는 외면에 있지 않습니다.

'잘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실험하고, 답을 찾아가는 만큼, 접근하고 있는 만큼 알게 되고

이것이 자기 변형, 자기 구원입니다.

어떤 절대적이고 더 나은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나아가려고 고행하는 만큼

각자의 진리 구성이 있고, 그것은 각자의 세계에서 어떻게 구현하려고 노력하느냐가 관건인 것입니다.


여기서 에피쿠로스 학파(우정 중시, 자연을 '원자'로 구성)와 스토아 학파(공동체 중시, 자연은 '거대한 섭리'로 촘촘히 연결됨)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이 둘은 서로가 다를 뿐 누가 더 옳은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나"를 구원하고 배려해야 "남"을 구원하고 배려할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한 답시고 내가 동요하고 있는 것은 결코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니며,

나를 동요하게 하는 표상을 점검하고, 시선을 나에게로 고정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실천은 생활의 기술(technique)이 필요하며,

이는 아주 구체적인 방법으로 꾸준히 연습하고, 단련하고, 연마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로의 전향" 개념을 설명합니다.

플라톤은 표상은 '빛'이 동굴 안으로 투영되어 만들어진 '그림자'인데, 전향은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자기가 원래 가지고 있는 인식능력을 상기(reminiscence)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헬레니즘 로마시대에는 자기에게 속해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며,

부, 명망, 욕망 등 외부에 있는 것을 쫓느라 내 마음에 집중하지 않음을 비판합니다. 

기독교에서의 전향은 위의 둘과 좀 개념이 다른데, 개종 즉 갑작스러운 변화는 밖에서는 주어지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신을 향해 돌아앉음으로써 자기 단절이 일어난 상황이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문제는 '나'에게 속해 있음으로 인해 평온함을 얻는 것, 내 영혼을 동요하는 표상을 점검하고 제거해

나가는 것, 끊임없이 단련하고 고행하며 접근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마친 거 같습니다.


손으로 메모하면서 적은 것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을거 같은데요

이날 강의에서 무엇보다 좋았단 것은 제 스스로 평소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제대로 건드렸기 때문인데요.

제가 평소 (꽤 자주) 외부적인 부분에 집착하고 온갖 비판을 쏟아내며 '지적질'을 하느라

정작 내 자신의 문제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회피하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

문제는 '나' 자신을 구원하고 배려해야 '남'을 구원하고 배려할 수 있다는 새삼스런 깨달음이였습니다.

내 시선을 남에게 향하게 하지 말고 나에게로 고정시켜야 하며,

그 시작으로는 내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좀더 구체적이고 정교하게 만드는 작업일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노트에 몇가지를 끄적였는데요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나는 어떤 것을 못 견뎌하는지...등등을 생각해 봤네요.

아직 그 질문을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했고, 당연히 답도 못하고 있지만,

이날의 강의로 내 시선을 "바깥"에서 "안"으로 돌리게 되는, 어떤 전향의 시발이 되었다는 느낌은 강하게 듭니다.


적다보니 구구절절, 애국가 400절이 되었는데요.

푸코는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의 철학적 통찰이 제 삶속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되어 평온한 정신상태를

가지게 되기를 바라보며 긴 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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