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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몸의 우주성> 세미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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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면이 작성일22-05-02 23:20 조회913회 댓글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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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몸의 우주성>을 이야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자는 의식이나 철학의 입장이 아닌, 몸에 입각해서 사상사와 종교와 신학을 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미나가 진행될 수록 우리는 다시 돌아 주체와 인식과 의식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근대인인 우리는 "주체"라는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척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미나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시는 적극적인 학인들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샘들이 있어 세미나가 활력이 넘칩니다. 후기를 빌어 샘들에게 감사드려요. 저도 세미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날카롭고도 문제적인 질문을 올려보고 싶습니다.

 

여러 질문이 있었지만,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에 대해 적어볼게요.

 

<김자영샘 질문> 이원론적 사고가 서양에서 발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비극적 죽음을 가진 사람들은 있었다. 그런데도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사람(소크라테스, 예수 등)이 아이콘으로 선택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동양에서 성인은 장수하는 유형이다. 나이들고 몸은 쇠약하나 정신은 고양된 인물을 성인으로 생각한다. 반면, 서양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영웅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서양은 왜 죽음에 집중하게 되었을까?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예로 들어보자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닌 플라톤이 아닐까 싶다.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는 억울하지 않았다. 하지만 플라톤이 스승의 죽음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스승의 사상에 대해서 썼다. 플라톤은 생명의 윤회, 전생과 영혼의 불멸에 대해 스승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영원의 이데아를 상기하는 것이 지혜를 구하고 사랑하는 철학의 근본임을 알았다. 여기서 서양적인 것이 드러난다. 이데아가 중요한 것이다. 철학의 근본은 현실에 있지 않고 이데아에있다. 이원론적 조짐이 보인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예로 들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넘어선 영원 가운데 있는 가치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준다. 현세의 세력이 스승을 죽였지만 현세의 세력은 영원의 죽음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다. 이것이 플라톤과 예수의 제자들에겐 중요한 지점이었다. 스승들이 현실에 의해서 부정당하고 오욕 당했기 때문에 현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현실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상주의적 세계관이 탄생한다.

 

<남궁진샘 질문> 17쪽 그릇인 몸은 언제나 어두워 알 수 없는 것으로 체험된다.

몸을 그릇으로 느낄 때 그 안에 무언가 담겨 있고, 담을 수 있고 꺼낼 수 있다고 체험할 수는 있겠지만, 어두워서 알 수 없다고추론하는 것일까요?

 

  그릇은 뭔가를 덮는 것, 뭔가가 담기는 것, 뭔가가 많은 데 그것이 뭔지는 모르는 것, 그래서 어두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그릇이 여성이다, 몸이다라는 도식이 보편적 기본적 상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성은 무언가를 담고 그릇도 몸도 무언가를 담는데, 그것을 다 알수는 없다. 이 알 수 없음의 감각이 중요하다.

  몸의 열린 부분, 경계가 중요하다. 동의보감에서는 몸의 열린 부분을 7규라 하고, 불교에서는 6경이 만나서 세상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즉 다른 것이 만나면 또 다른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몸은 열려있다. 그런데 그릇이니까 외부와 내부가 있다. 닫힌 계가 아니라 열린 계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안과 밖이 교류하면서 누미노제적인 생성하는 힘이 만들어진다. 그게 구멍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온갖 창조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이대중 선생님 질문> 근대인들은 의식, 특히 자아의식을 과하게 성장시키며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그렇다면 무의식과 의식을 균형 있게 발달시키는 것이 이상적인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럴수있을까?

 

  자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누구나 무겁다. 그래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고, 해방되고 싶어한다. 축의 시대에서도 보았듯이 축제 같은 광란의 도가니가 인간을 숨쉬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방편으로 터질 것을 염려해 압을 빼주는 것일 뿐이다. 한편 다른 방식으로 이 자의식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불교 등이 있다. 자의식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 보다  자의식은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찾아보는 것이 좀 더 빠르지 않을까?

  자아는 근대에 발명된 것이다. 자아에 대한 의식이 생기면서 몸 따로 마음 따로, 나 그리고 외부로 나누게 되고 언제나 대상화한다. 나를 볼 때도 나를 타자화해서 본다. 나조차도 대상화해서 볼 수 밖에 없는 소외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동양의 전통 속에 서양의 신화 속에 다른 것이 있다.

   우리는 괴롭다. 문제는 괴롭다는 것이고 이걸 해결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출발인 사성제도 ’, 즉 괴롭다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는 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의식과 의식의 균형있는 발달은 질문이 아니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곳에 와서 공부하는 것도 괴로음을 해결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 아니였을까?

  원시인들은 세상을 통합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소외를 느끼지 않고 연결감 속에 있을 수 있었다. 통합된 상태, 세계와의 연결감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행복할 것 같다. 루카치도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길을 갈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나이가 들어 치매가 걸리면 되는가돌아가려고 철학하는 것이 아니다. 분석적인 지성이 한계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지성의 한계가 있다고 느껴지니까 옛날로 가야하지 않은가?

  이 책의 제목은 몸의 우주성이다. 저자는 몸에 입각해서 사상사와 종교와 신학을 보려고 한는 것이지 의식이나 철학으로 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배우고 있는 베르그손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신체를 조절하고 분별의식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극에 대한 반응을 할 뿐이며, 선택의 기회가 열릴 뿐이다. 우리가 자동기제에 사라잡히지 않은 선택들을 하려면, 새롭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주체를 이미 설정하고 있으면 새롭게 달라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주체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운 사주를 생각해보면, 사주는 전체를 조합으로 본다. 조합은 우주의 조합과 상호작용하면서 변하고 있다. 주체 없이 존재성과 관계성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세상은 변하고 있다. 주역의 세계관도 음과 양이 섞여서 만났을 때 만물이 생긴다고 본다. on, off의 개념인 것이다. 거기에 주체가 없다. 그것들이 어떻게 결합했는가의 차이일 뿐이다.역은 체인지, 변화 자체이다. 베르그손의 이야기와 흐름으로서의 세계가 역이 아닐까?

댓글목록

목인님의 댓글

목인 작성일

'통합된 상태, 세계와의 연결감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행복할 것 같다...'
잃어버린 세계와의 연결감을 되찾으려는 무의식적 행동 중 하나가 이렇게 함께 하는 공부가 아닐까요.
이렇게 함께 한 현장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다름, 그리고 또 이어지는 공감이 이후 별과의 연결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고소미님의 댓글

고소미 작성일

정리의 달인에 한표 더 보냅니다ㅎㅎ 샘의 글을 보며 세미나 현장으로 다시 들어가는 듯 생생 합니다. 무거운 자의식은 언제나 과제처럼 다가오는 데 공부 내공이 생기면 가벼워질까요?  더불어 공부하는 것에 괴로움을 해결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는지? 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강적님의 댓글

강적 작성일

정리의 달인 미연샘다운 후기 잘 봤습니다. 한 공간 안에서 같이 세미나에 참여해 듣고 말하고 했는데도, 말은 참 잘도 잊혀지는 것 같아요. 이렇게 글로 보게 되면 참 새삼스럽게 새록새록 그때 오갔던 말들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정리와 후기가 중요한가 봐요.

이대중님의 댓글

이대중 작성일

후기 잘 읽었습니다~! 면이가 양면샘이셨군요~ㅎ 오후 세미나는 늘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맘이 큰데, 또 논점에서 벗어난 이상한 소리를 할까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고 그러네요. 미연샘이 말씀하신 '주체'의 틀에 대해 요리조리 다시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목도리님의 댓글

목도리 작성일

즐독하였습니다, 미연샘 줌에서만 뵜지만  아나운서 못지않은 음성이  귀에 잘들어 왔습니다, <김자영샘 질문> 이원론적 사고가 서양에서 발생하게 된 또라른 이유는 아세아는 농경문명이 위주였었고  서양은 공업문명이 위주인 이유가 있으며 정신과 사후에 대한 고찰이 많았으므로  이원론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본숙님의 댓글

구본숙 작성일

우와!! 신기하게도 미연샘 후기도 음성이 지원됩니다!!.ㅎㅎ 2시간 가까이 주란샘과 샘들께서 자유롭게 말씀하신 내용들을 이렇게 정리를 잘해주셔서 넘 잘 읽었습니다. 막힘없이 쭉쭉 읽혀나가는 글이란 힘이 있군여!!

이형은님의 댓글

이형은 작성일

“스승들이 현실에 의해서 부정당하고 오욕 당했기 때문에 현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현실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을 읽는데 현실을 개탄하며 비분강개했을 예수와 소크라테스 제자들의 심정이 느껴졌어요. 미연샘이 사관이었다면 그야말로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였을 거예요. 다만 별로인 왕을 만났다면 빼달라는 거 안 빼줘서 고초를 겪었을 것 같긴 하네요 ㅎㅎ 자세한 후기 고맙습니다!

박운섭님의 댓글

박운섭 작성일

다들 정리의 달인이십니다. 거의 사관 수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후기에 대한 수요 가운데 야사를 섞은 삼국유사 같은 내용을 능력자들께서 좀 더 많이 담아주셨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