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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주차 2교시 후기-3조 남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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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Ziny 작성일22-12-09 14:53 조회2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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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결석 후유증일까. 선생님 말씀이 이어지지 않은 채, 부분부분 들렸다 말았다 한다. 들린 것만, 그러니까 ~ 그렇구나라고, 당시에 이해한 부분만 떠올려본다.

 

흐름과 소용돌이

물은 흐른다. 바위를 만나면 바위를 돌아, 물결을 만들며 흐른다. 물은 소용돌이를 만들기도 한다. 소용돌이는 흐르는 물속에서 마치 어떤 형체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물은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소용돌이로 고정되고 고착되어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휘돌아 흐른다. ‘흐름이란 어떻게 보면 흐름 속에서 형성되고 흩어지는 듯 보이는(물결이나 소용돌이) 것들 보다 먼저다.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같은 이치일까? 의식도 흐름이라면, 생각 이전에 흐름이 먼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사라지는 것이 물결이라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집착 같은 생각은 소용돌이 같다. 선생님은 존재의 출현 방식도 그럴 것이라 하셨다. 우주적 흐름 속에 있다가 불쑥 소용돌이 형태로 드러나 삶을 영위하다가, 소용돌이가 흩어지면 흐름 속으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그래서 사망은 돌아가셨다표현되기도 하는 것일까? 아무튼 그런 생각을 따라가면 우리 존재는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어떤 사물이 아니라 전체적 흐름속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사건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에셔의 그리는 손

오른손을 그리고 있는 왼손, 왼손을 그리고 있는 오른손,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것과 저것이 이어져 있고 얽혀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적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그림이다. 이 말을 인과적으로 해석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인과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이것(왼손)이 있고 저것(오른손)이 있는데, 이것과 저것이 서로 어떻게 상호 연결 되어 있는 것이지?’라고 묻는 것이다. 인과적인 생각은 이것과 저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오른손과 왼손이 각각 존재하고, 뇌신경세포의 작용으로 지금 나는 컴퓨터 타이핑을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방식이다. 에셔의 그림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왼손이 오른손을 그리고, 오른손이 왼손을 그리면서 왼손과 오른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를 과정으로 말하고 있다. !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원인과 결과를 따져가며 인과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서인지, 그리하여 어떻게 된다는 것인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가늠하는 것이 참 어렵다.

 

홀로그램

공간에 만들어지는 홀로그램은 환상이다. 실제로 만져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상 전체를 알아볼 수 있는 상이 생기는 것이 놀랍기는 했다. 그런데, 홀로그램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전체는 부분의 합이라고 생각해왔다. 부분은 전체의 1/N 아닌가? 그런데, 홀로그램에서 부분은 대상 전체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 필름이 3차원에 존재하는 사물을 2차원 평면에, 일대일 대응하는 점들을 모아 대상의 전체 그림을 만드는 방식과 다르다. 홀로그램은 3차원 대상에 비추는 전방위적 빛의 여러 각도를 기준광에 중첩시키고 간섭시켜서 자기 안에 접고 있다가 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맞나? 아무튼, 그래서 각각의 각도에서 빛으로 보이는 부분이 전체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일상에 이것을 적용한다면, 이를테면 책을 읽는다는 것, 강의를 듣는다는 것,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대상이 나에게 들어오는 것이다. 나에게 들어오는 것들은 나의 프레임에 따라 정보가 접힌 채 부분만 들어올 수 있다. 하지만 부분은 전체를 담고 있다! 나의 프로세스에 따라 접힌 질서는 내 안에서 펼쳐질 수도 있고, 접힌 채 들어와서 영 펼쳐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책이 읽히지 않는 것은, 강의가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 사람과 잘 되는 것 혹은 잘 되지 않는 것은, 내 역량의 문제이다!

 

원통 실험

원통에 노란, 빨강, 초록색 점성 있는 물감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고 한쪽으로 저으니, 혼합된 색이 나타났다. 믹스된 것이다. 반대 방향으로 다시 돌리니, 원래 상태, 즉 입자 상태로 돌아왔다. 선생님은 이것이 접힌 질서(Implicate order)와 펼친 질서(Explicate order)와 관련 있다 설명하셨다. 선생님은 자신의 두 손에 손깍지를 꼈다 풀어헤치는 동작을 하셨다. 손깍지를 낀 채로 있을 때가 접힌 질서라면, 그때의 질서는 왼손가락과 오른손가락의 공간적 접근도로 볼 때 가까이 있는 것이 각각의 손가락 질서일 것이다. 펼친 질서에 따라 손깍지를 풀면 오른손과 왼손은 각각의 원인에 따라 손과 팔, 어깨와 더 가까운 질서로 되는 것이다. 펼친 질서는 과정을 다 마치면 손깍지를 낀 접힌 질서로 다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초전도체 실험

이 부분은 정말 모르겠다. 극저온일 때, 양자와 전자가 얽히지 않고 짝을 지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활동하는 상태가 만들어진다는 것인가? 거시세계의 나는 미시세계의 열을 낮추는 노력을 통해 자유로운 상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그 모든 세계가 전체라면 전체의 열을 낮추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일까?

 

데이비드 봄의 마지막 질문 - 왜 전체를 생각하는 방식으로 사고해야 하는가?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전체성이 충족되지 않는다. 이것이 없어도 저것이 아무런 연결고리 없이 존재하니까. 타자는 상호작용의 측면에서만 필요하다. 전체가 독립된 조각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면 그의 정신이 작동하는 방식은 전체를 염두에 둔 질서 있는 행동으로 연결될 수 없다. 존재는 파편화된 실재가 아니라 전체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나는 폭력을 싫어해라고 생각하는 내용이 아니라, 파편화되고 조각된 채로 생각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전체의 부분인 나는 과정에 있고 전체를 담고 있으니까, 끊임없이 분절된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고자 노력하자는 말인 듯 싶다. 내가 남을, 나 이외의 사물을 구분하면, 구분한 대상들보다 나아야 하고 좋아져야 하고,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의 흐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일상을 떠나, 딸과 2주간 유럽을 다녀왔다. 비행기도 타고 기차도 타고 전철도 버스도 타고 사이사이 걸었다.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여 길을 걷다 온 셈이다. 계사전의 시대였다면 축지법을 써서 천리경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전체적인 흐름의 과정 중에서, 이 경험은 높은 곳에서 뚝 떨어지는 폭포수의 흐름 같은 것일까? 한동안 폭포수의 속도와, 속도와 함께 생겨난 포말들로 흐름을 따라가기 영 힘들었다2022년이 저물고 있다

 

그동안 함께 공부한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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