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성 2학기 10주차 후기 - 3조 이대중 >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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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 2학기 10주차 후기 - 3조 이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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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대중 작성일23-07-07 21:49 조회436회 댓글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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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가 있지만 고쳐야 할 부분을 확실히 짚어주시는 정군샘의 코멘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싶었습니다. 받아적다보니 어느덧 방학이 반이 지나가 버려 너무 늦은 후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니 딱 마침 다시 공부를 시작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3학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공부하기를 북돋아주시는 그의 말씀들을 다시 읽어보시고 그새 분명 사그라들었던 공부 의지를 꺼뜨리지 말고 되살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정군샘이 나에게 말해준다~라고 상상하시면서 읽으시면 재미가 있으실 꺼에요후기의 요점은 요런 말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다시 힘내서 공부해보자~입니다.

 

이유를 밝히기에는 긴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고 논의를 안해요. 이런 고난도 기술은 안돼요.

다 자기 나름의 선의 속에서 행동해요. 선악의 척도라는 것이 불가능한 지점이 생길 수 있어요. 마지막에 가서 어떤 것을 결정하는 건 선하냐 악하냐가 아닐지 몰라요. 현대정치학에서 보면 결단성이 중요해요. 누구나 선의를 갖고 하기 때문이에요. 마지막에 가서 내가 뭘 할지를 결정하는 건 나의 결단인 거에요.

문학과 철학은 대립하지 않는 것 같아요. 산문이나 소설같은 경우는 산문과 소설 대가의 작법과 훌륭한 철학가의 작법 사이에 통하는 지점이 많은 것 같아요. 논리적이지 않으면 훌륭한 소설을 잘 쓰지 못해요. 또한 훌륭한 철학도 아주 적절한 비유와 직관적인 통찰을 담아줘야 됩니다. 이 둘은 별로 다르지 않아요. 감성적이기 때문에 이성적이 안되고 이성적이기 때문에 감성적이 안된다는 건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에세이에는 자식 얘기를 쓰지 마세요. 너무 일상적으로 흘러가 버려요. 그냥 이론적으로 쓰시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인텔리젼스가 없다라는 말이 말이 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인텔리젼스라는게 대부분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그걸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 말을 발화한다는 것 자체가 인텔리젼스의 결여를 보여주는 것이랄까요. 겸손은 그것이 도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고, 겸손하지 않으면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을 상실하기 때문에 겸손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혜란 무엇인가라고 했을때 ab다 라고 규정하는건 굉장히 깔끔하긴 하지만 별로 쓸모가 없어요. 지혜를 요런 상황에서 요렇게 드러나는 것과 같이 그 상황들을 굉장히 많이 생각해놓고 있으면 쓸모가 많아집니다. 쓸모가 많은 것이 훨씬 더 좋은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운섭샘하고 대화를 많이 하세요. 운섭샘을 한스푼씩 넣고 싶네요.

내면과 외면 문제인데요. 저는 내면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면이 있다면 되도록 없애려고 해요. 그니까 내면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에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내면을 가정하면 진짜 나를 가정하게 되요. 나한테 아주 솔직하고 정말 진정한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구요. 그게 내면의 역할이죠. 그렇게 되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이 가짜가 돼요. 예를 들어 직장에서 그런 거 많이 하잖아요. 부장님이 주시면 마셔야지요~! 그런거 제가 못하는데 내면이 있다면은 이걸 하면 그런걸 하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구요. 아니에요~! 그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게 바로 그 사람이에요. 딱 그게 아닌 내가 있을 수가 없어요. 이 전체가 전부 나에요. 남들은 아직 모르고 있는 어떤 거, 저는 이런게 있다는 생각은 되도록 안해요. 내면의 다른 말은 뭐냐면 자의식이에요. 우리가 공부를 올해만 할 게 아니잖아요. 3년 하고 말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안타깝지만 죽을 때까지 할거에요. 아직도 기회가 많다구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어떻다 저떻다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어요. 길게 보고 지금은 5키로를 10분에 뛸 수 있지만 줄여갈 수 있어. 내면은 가져다 버리세요. 되도록이면 없는게 좋아요. 내면, 자의식, 진정한 나 그런게 과연 있는가. 또 한가지, 우리가 여러 사람이 되볼 필요가 있어요. 지피지기하라는 얘기가 아니고, 우리는 자기 각자의 삶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어떤 극이 상영되는 극장이에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각자의 삶을 상영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는 여러 연기를 해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의 배역을 하나씩 하나씩 지우면 우리 자신이 사라져요. 우리는 어느 경우에 연기를 하고 어느 경우에 진짜 나로 돌아오고 이러는 게 아니고, 모든 경우에 연기를 하는 거에요. 이해되시나요? 우리는 각자가 자기 삶의 배우들이에요. 그러면 이건 수용성 얘기랑 비슷한데 내가 할 수 있는 배역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생의 갈등을 넘어서기가 수월해질 수 있어요. 어떤 때는 연기를 하고 있는 나를 아주 가혹하게 밀어붙일 필요도 있고, 어떤 때는 굉장히 쾌활한 인간이 되어서 그걸 즐겨볼 필요도 있고, 지금 안그렇지만 굉장히 유식한 사람이 되어 볼 필요도 있고, 아주 용기있는 사람이 되어 볼 필요도 있고, 이걸 내가 할 수 있는게 많으면 많을수록 어떻습니까 내가 굉장히 커지는 거에요. 이게 존재 역량이 커지는.. 제가 장자를 잘 모르지만 장자가 절대 자유를 얘기할 때 이런 맥락이었을 거에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초월적 자유에 관한 얘기는 분명히 아닐 꺼에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절대 자유, 그러니까 그걸 지향해 볼 필요는 있어요. 그니까 나의 내면이 어떤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배역이 몇 가지인가.. 이게 생각보다 적어요. 그래서 우리가 캐릭터라는 걸 갖고 있잖아요. 캐릭터의 폭이 아주 넓으면 좋겠지요. 낭만닥터 한석규, 그런 역할도 하지만 시한부 인생의 역할도 잘 하잖아요. 굉장히 폭이 크잖아요. 우리의 역량이라는 건 그런 폭인거 같아요.

법륜스님이 길가의 풀 얘기는 어떤 맥락인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길가의 풀은 굉장히 유능하죠. 우리처럼 움직여서 막 어디를 다녀서 먹을 거를 구하지 않아도 돼요. 그 자리에서 떨어지는 빗물 먹고, 땅에 있는 양분만 가지고도 자기를 키울 수 있어요. 그리고 뽑아놓아도 다시 살아나 있어요. 농활에서 오전 내내 뽑아놓은 풀이 새참 먹고 오니까 고스란히 살아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유능하죠. 얘네는 수용력의 한계치가 굉장히 높은 애일 꺼에요. 우리는 그렇게 빗물 받아먹고, 땅에 떨어진 거 주워 먹고, 그런거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아마 스님들이 예전에 탁발을 다니셔서 뭐가 나올지 모르는데 그걸 받아먹는다는 게 그게 수행이라면 아마 그 능력을 확대하는 수행이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요. 주어진 걸 먹는게 내가 가진 수용력의 한계를 넓혀가는 거죠. 그래서 수용력의 한계라고 하는 건 여러 가지 척도들을 무너뜨려야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취향처럼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한다는 게 우리를 구성하는 척도들이잖아요. 이걸 계속 내려 놓는 거에요. 이걸 다 내려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부처님이 되는 거죠. 만변할 수 있는 존재가 되거나. 우리가 이 형태를 유지하고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건 그 척도들이 있기 때문일 꺼에요. 우리가 이렇게 이 형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그 척도들이 우리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 척도에 맞게 각자의 개성들이 이렇게 드러나는 걸 꺼에요. 그 말은 뒤집어서 말하면 그 척도들 때문에 우리가 변화를 못하는 거구나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변하고 싶을 때 우리를 가로막는 건 그 척도들 일꺼에요. 너는 공부를 왜하니 물으시면 할 수 있는 한 그런 척도들을 내려놓고 싶어서에요. 변화폭이 아주 큰 존재가 되고 싶은 느낌이 있어요. 그리고 그런 점에서 보면 그렇게 막 아주 다양한 이 패턴으로 변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세상에 불편한 사람이 없겠죠? 그렇습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렇다라고 잘 직시해서 나의 척도들을 아주 명징하게 인식해볼 필요는 있지만 나는 그러니까 이건 안돼 이런 패턴은 깨버려야 돼요. 하루빨리.

발표하는 날이 됐어. 근데 아프데. 그럼 안돼요~!

우리가 지금 연습에 몰두하고 읽기에 몰두하고 이러는 걸 그냥 순전히 고통으로만 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재밌지 않으세요? 결과가 어떻든 간에 재밌는게 있어요. 우리가 알아간다는 거 자체가 주는 쾌락이라는 게 있다구요. 여기에 집중하면 에피쿠로스적으로 우리 삶을 구축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박사 학위를 받으러 온 것도 아니고 이걸 한다고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여길 와가지고 이러고 계시잖아요. 이것 자체가 굉장히 에피쿠로스적인 거라구요. 우리가 수행할 때 수행을 고통을 참는 거로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에요. 이 수행 자체가 주는 쾌감이 분명히 있어요. 수행과 쾌감은 한없이 먼 것 같지만, 기쁨 같은게 분명히 있다는 거에요. 감이당에 와가지고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하고, 그렇더라도 그렇게 계속 하는건 그 기쁨이 분명히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게 단선적이지가 않다는 거에요. 행복한가 라고 물었을 때. 예를 들어 결혼 생활에 대해 행복한가 물었을 때 딱히 그렇게 행복하지 않아, 그렇다고 이혼할래 그것도 아냐 어떤 점에서는 행복하고 어떤 때는 이짓을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하는 그런 게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어요. 에피쿠로스는 그걸 따져 봐야 된다고 말하는 거에요. 무절제한 생활이 나쁜 건 미래에 나쁜 게 아니라 무절제한 생활 자체가 지금 고통이 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항상 내가 뭐가 되어야지, 이 의견이 맞다고 생각하고 이걸 받아 들여야지라고 생각하면 그게 바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안돼요~. 그렇게. 생각하는 대로 되는 거, 세상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훈련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 훈련도 철저한 계산 하에서 해야 해요. 자유인이 된다는 건 치킨을 먹고 싶으면 먹고, 안 먹고 싶으면 안 먹고 이 상태가 된다는 거에요. 이게 이제 나의 역량이 커진 상태겠지요. 완성된 상태는 어떨까? 알 수 없어요. 계속 훈련할 뿐이에요. 조급해만 하지 않으면 돼요. 우린 계속 훈련하면 돼요. 훈련할 시간은 짧다면 짧지만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어요. 공부를 하루 이틀하고 말게 아닌 것처럼 이 훈련도 하루 이틀하고 말게 아니기 때문에 차츰차츰 하면 되는 거지요.

글을 쓰셨으면 그게 초안이 아니에요. 그 글을 토대로 이걸 잘 정리해서 논리적 구성을 갖춘 글이 초안이에요. 그럼 수정은 어떻게 하냐 그걸 또 한번 정리한 게 수정인 거에요. 글은 몇 번의 단계가 필요해요. 한번 쓰고 한번 정리하고 그걸 또 한번 수정하고 마지막에 오타 탈고하고, 이런 식의 과정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체가 뭘 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 라는 말을 좋아해요. ‘자유란 필연적 본성에 따라 사는 것이다.’ 라고 하며 우리는 본성을 한가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그 본성에 맞추는 것이 자유라고 하니까 자유같지 않죠. 제가 10년 전 운전을 못했는데 지금은 한달에 1,200키로씩 운전해요. 역량이 커진 거에요. 역량이 커진 게 뭐냐 하면 공통 감각이 커진 거에요. 단순하게 말하자면 올해 일성 강의를 거절했다면 저는 선생님들과 조응해서 이런 형태의 강의를 생산하는 걸 하지 못했겠죠. 그 말은 뭐냐면 선생님들과 공통감각을 형성할 수 없었다는 얘기일 꺼에요. 그러면 저의 본성의 어떤 부분을 발휘하지 못했게 됐겠죠. 본성은 이뤄내는 행위에요. 내가 이걸 발휘해서 어떤 걸 생산해 낼 수 있으면 그게 본성이에요. 그러면 이거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어떻겠어요? 공통 감각이 커지겠죠? 그러면 이 세계와 나 사이의 구분이 줄어들 꺼에요. 이 세계는 뭡니까? 스피노자가 말한 이 세계는 신, 생산하는 세계에요.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어 낸다고요. 비가 내리는 사건을 만들고, 홍수를 생산하고, 지진 행위를 생산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식물을 생장시키고 그런 게 세계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이 세계에 어떤 점을 표현하고 있어요. 내가 공통감각이 커진다는 건 이 세계에 어떤 점을 점점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이 세계의 표현으로서의 내가 이 세계에 어떤 부분을 더 많이 생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거에요. 스피노자의 자유는 이런 자유에요. 그러니까 어떤 한계, 자기 계발과 관련하여 너의 한계를 돌파해라.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어떤 것과 조응해서 뭔가를 계속 생산해 내는 것, 이게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에요.

양태는 뭐냐면 모드에요. 지금은 렉쳐 모드죠. 집에서는 주부 모드, 아빠 모드, 게임 모드가 되기도 해요. 우리는 끊임없이 모드가 바뀌어요. 이건 이 세계가 뭔가를 생산하고 있다는 게 표현되고 있다는 거에요.

우리가 인간인 이상 그렇게 수준 차가 많이 나지 않아요. 아인슈타인이나 파인만이나 하이데거나 들뢰즈나 나나 그렇게까지 차이가 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인간적인 수준 안에서봤을 때는 굉장히 차이가 많이 나겠죠. 하지만 인간 바깥의 시선으로 보자면 거기서 거기에요. 아주 뛰어난 침팬지와 바나나를 좋아하는 침팬지 정도의 차이라구요. 그 말은 뭐냐면 우리가 각자 수준에 따라 그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족하다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요 상태애서 더 큰걸 바래요. 지금 걷지를 못해, 근데 막 날고 싶어 해. 이게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지금 해야 될 걸 못하게 된다는 거에요.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해요. 부자유스러운 것이기도 해요. 그런면에서 지금 두영샘의 암송은 최선의 자유를 찾아낸 것이기도 해요. 내가 이거는 제대로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게 쌓이다보면 터지는 게 있겠죠. 아주 훌륭합니다.

 

 

어쨌든 요 상태를 돌파해 나간다는 것이 처음 공부할 때는 굉장히 중요해요. 원래 다들 아시다시피 반자율적이잖아요. 시간이 많으면 공부합니까? 아니죠. 시간이 많으면 놀죠. 공부는 언제하냐? 바쁜데 해야 될 때. 해야만 할 때, 누가 잔소리를 할 때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요런 과정이 있는 게 정말 중요하고 요걸 한번 넘어섰다는 데에 아주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다음주 한 주 잘 쉬시고, 다음 주 일요일이 되면 그때부터 공부를 하세요. 일요일 4시 반이 됐다 그러면 공부를 시작하시면 됩니다. 열심히 공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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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구름22님의 댓글

구름22 작성일

대중샘!
후기 쓰시느라 넘 애쓰셨네요.
갈수록 알찬 후기 덕에 도움이 많이 되네요.
정군샘의 귀한 말씀을 기록으로 친절하게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량이 많아 정말 고생하셨겠어요.
감사합니다.

엇박님의 댓글

엇박 작성일

고생의 보람이 있으신 후기, 잘 읽었습니다. 그래도 운영샘과 연주샘이 렉처 최우수상, 수민샘이 아차상 받았다고 기록에 남겨야 할 것 같아서 한 줄 보탭니다.

수민님의 댓글

수민 작성일

발표하기 전엔 긴장된 떨림으로, 끝나고 나서는 편안함으로 좋은말씀 이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이렇게 마주하니 새롭고 또 다른 배움으로 다가오네요 ^^  기록의 힘을 다시한번 느끼는 시간입니다.
이 글 보려고  종종 들를듯한 느낌적인 느낌이라면서 ㅎㅎㅎ
대중샘 ~ 상세히 그날의 이야기 기록으로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사람A님의 댓글

어떤사람A 작성일

일일이 녹취들으며 또 문장으로 풀어내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을 대중샘...귀한 말씀 기록으로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수고롭긴 해도 보람있는게 또 이 작업이긴 하네요..2학기까지 과정 잘 마치신 우리 도반님들...모두 감사하고요~
남은 3,4학기 또 힘내서 함께 으쌰으쌰~~잘 달려 보아요~홧팅요!!^^

니은님의 댓글

니은 작성일

이래서 녹취가 필요하구나 느꼈습니다. 그날 정샘의 주옥같은 말씀을 이렇게 자세히 적어주시니 정말 이해가 잘 되고 도움이 많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샘~~!

솔하님의 댓글

솔하 작성일

정샘의 코멘트 하나하나가 오래 기억하고 싶고 넘 좋았는데 기억 밖으로 희미해지지 않게 이렇게 모음집으로 엮어주셔 감사합니다. 보고 보고 또보게 될 거 같아요. 3학기 새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는 충분한 격려와 응원 입니다.^^
대중샘.. 후기 잘 읽었습니다.~

김경아님의 댓글

김경아 작성일

마치 음성지원되는듯 그날의 정군쌤의 표정까지 생생히 그려지는 후기 잘 봤습니다~요런말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3학기도 힘내보자는 응원까지. 감사합니다 대중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