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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글쓰기 수업 후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정리: B조 안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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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화노인 작성일13-03-17 17:57 조회4,13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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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정현종 옮김/ 물병자리
                                     정리: B조 안은숙
조별 씨앗문장 정리 한 것과 암송을 확인 받았다.
왼쪽 앞줄부터 순서대로 암송을 하였다.
고미숙선생님 말씀 ‘이 책은 아무쪽이나 외워도 된다. 일종의 잠언이다. 못 외운다는 것은 게으름이다.’- 벌금형 경고
이 책에서 전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무엇에 기대지 말고 삶을 완전히 누려라!’이다.
의존, 기대지 마라!. 지금 우리는 의존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전시회, 음악회, 여행, 쇼핑 등등)
전시회, 음악회에 왜 가는 걸까? 그런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삶을 구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때 좋은 뜻, 나쁜 뜻이 없다. 어떠한 전제를 가지고 말하는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지식, 예술, 종교에 대해서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다.
종교적인 진리를 세속적으로 쉽게 만들어 펼치면 달게 느껴지는 것이다.
‘비웠어!’라고 말할 때 그 비움 안에 엄천난 전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
그러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에 이미지로 하면할수록 계속 덧칠만 한다.
내 것이 있는가?
크리슈나무르티는 ‘동방의 별’ 조직의 지도자이다. ‘동방의 별’은 브라만교와 불교를 합친 새로운 영성 단체이며 몇 10만명의 신도들이 있다. (20세기초)
크리슈나무르티는 어렸을 때부터 비범하였다. 이미 조직의 영적 지도자로 낙인되어 키워진 인물이다. (달라이 라마와 같은) 90세쯤 사망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동방의 별’ 조직이 절정일 때 조직을 해체했다. 해체 당시 해체 선언문이 굉장히 유명하다.
조직이 커지면 그룹그룹이 지어져 파벌이 생긴다. 전제와 망상이 생겨 갈등을 겪는다. 또 조직이 커지면 수도자는 영적 해방의 수도자가 아니라 조직 일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방의 별’도 해체한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 중에는 파편이 많다. 알고 보면 틀리는 게 많다. 그렇기 때문에 다 내려 놓아야 한다.
부처가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났을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했다. 뜻은 ‘자기는 완벽하게 해방 된 존재이니 내가 모든 괴로움을 해방시켜 준다.’ 많은 사람들은 많은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고귀하기 때문에 내가 해방 해 준다.’로 받아들인다.
의존을 생각해 보자!
카스트 제도나 국가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
모든 사람은 불교의 주체다. 당시 인도에서는 불교가 굉장히 혁명적 존재였다. 계급으로서 타파가 아니다. 불교는 제국, 국적, 계급에 반하고 남성, 여성까지 반하고 설파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받아들이자 국왕, 장원들이 재물을 바쳤다. 하나의 제도가 된다. 그러면 이것이 어마어마한 번뇌가 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 이렇게 하면 해방에 의한 메시지만 나오는 게 아니라 지옥의 문이 열린 것이다. 하나의 종교가 되고 이 종교가 어마어마한 권력이 연결된다.
내가 저지른 선행 뒤에는 반드시 악이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말한 성철 스님은 굉장히 터프한 분이었다. 수행도 박력있게 했다. 몸을 던져 온갖 실험을 다했다. 가야산 호랑이라 불렸다. 이런것들이 성철 스님의 기질과 잘 맞았고 대중들에게 어필됐다.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성철 스님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 성철 스님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 때문에 대중들은 성철 스님의 수행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 이미지만을 보았다.
‘자기가 했던 말들 대문에 지옥에 떨어져도 괜찮다!’ 자기의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는가를 생각할 때, 어떤 선의 이미지를 가지고 뒤의 사람들은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은 성공 할 수 없다. 남는 건 이미지뿐이다. 이미지와 교리 그것이 바로 도그마이다. 지금까지 역사에서 인간이 쓴 마음의 창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매번 구상되는 활발한 삶이 아니고 도그마나 교리, 그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식도 ‘이런게 과학이야’ 했을 때 그것을 가지고 깨달음으로 가는게 아니고 그것을 암송한다. 그러면 그것에 복종되는 것이다.
지식이나 종교는 어떤 지도자를 찾는다. 거기에 뭐가 있다라고 생각하여 각 종교를 섭렵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양이 많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그런 사람들을 추종하는 구룹이 있다. 왜 자기가 자기를 써포트하지 않으려하고 누구를 추종하는 것일까?
예술이 죽음과 결합하면 사람들이 엄청 관심을 갖는다.
예술가는 주로 이미지로써 이름을 남기고 종교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도그마, 교리로써 이름을 남긴다.
자기를 떠받드는 사람이 자기의 적이다.
파장이 생기면 안팎의 경계가 생긴다. 다른 파와의 관계는(사이는) 나빠진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제일 감정이 어그러지게 되어있다. 그게 인생이다.
그것이 우리 안에도 있다. 그래봐야 내 인생의 구원은 아무것도 없다.
‘서민’‘백성’‘민중’이라는 것도 또 다른 이미지, 망상이다.
대표자들도 서민이 되면 그들도 우리처럼 똑같다. 서로 무지의 네트워크이다.
나의 무지는 저들의 무지, 저들의 무지는 나의 무지로 생각해야 한다.
진선미의 세계와 세속의 무게를 구분한다. 두 개의 구별이 있다. 소위 일상적인 것- 세속적인 욕망의 세계(쾌락)
쾌락은 종교, 지식, 예술의 세계와 다르다. 그러나 구조는 똑같다. 똑같은 마음장을 쓰는 것이다.
쾌락에는 기본적인 슬픔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하라. 그것은 피할 수 없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호의로 가득차 있다’ 이성적 호의를 받고 싶어하는 여성들. 호의를 받는게 대단한 특권이라고 착각한다. 호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생각하지 못한다. 순수한 호의가 없다. 각별한 호의는 그 사람이 나에게 기대가 있다.
타인을 통해서 내 마음을 투사 할 수 있다.
여자는 기억만 생각한다. 기억에서 벗어나라. 기억에서 떨치면 번뇌는 없다.
쾌락은 슬픔이다. 왜? 이것이 기억의 이미지를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분노의 원인은 내가 만든 이미지에 있다.- 자기가 자기를 친다는 것
대중문화가 통속적으로 전국적으로 교양 시키고 있다.
배우고 배우지 않은 자와 아무 상관없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가?
진심으로 사랑하면 질투가 존재하지 않는다. 독점하려고 할때 질투한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슬픔, 질투, 분노가 들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공포를 떠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질문을 돌파해야 지금 당장 잘 살 수 있다.
지옥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갈망을 안고 가니 불덩이가 되어 귀신이되는 것이다.
반복이 되면 기계적으로 되고 그것이 굳어지면 그것으로 살아 갈수 밖에 없다.
뾰죽할 수 없다. 체제가 바뀌고 정치적 변혁이 일어나도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것과 직면하는 지식이 앎인데 이것을 현대 교육이 가로막고 있다.
이런 앎으로부터의 자유.
명상도 어느 순간의 앎이 되어서 이미지로 작동한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것까지 기댈대를 싹 없애고 있다. 그렇다면 비우는 것 밖에는 없다. 갈아 끼우는 것이 아니고 지금 있는 것을 다 비우는 것이다.
죽음이 괴로운 건 아쉬움 때문이다. 남는게 없으면 자유로운 죽음이다. 여한 없이 살고 가면 된다. 기억, 이미지를 비운다.
기대하고 소유하고 쾌락을 더 누려야겠다가 있을 때 죽음은 더 괴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크리슈나무르티가 내적혁명으로 가는 근본적인 컨셉이다.
배움만이 새로운 것- 자연에서 배우라. 교리로 보지 마라.
자연에는 이미지로 남아서 가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변화이다. 이런 태도가 배움이다. 대하는 태도에서 교리로 받아들이거나 이 사람은 지식인이니까 뭐가 있을까?로 받아들이지 마라. 이런면에서 다산과 연암은 다른 삶을 다르게 구원했고 다르게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교리로써 전제 했던 건 성리학이 이미 도그마로 전제된 것이다. 성리학자들은 뭔가 있을거야란 이미지로 경직 시킨 것이다.
이것을 생명의 장으로 바꾼 사람들을 우리는 고전으로 배우는 것이다.
◈ 다음 주
- 읽어올 책: 칼 구스타프 융, 언제나 다시금 새로워지는 삶/ 신근영/ 북드라망
(작가가 직접 수업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 씨앗문장 정리하기 및 암송 (많은 벌금을 생각하며..)
◈ 공지
- 에세이 준비는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에서 8강 ‘글쓰기’에 관련된 부분을 통독하여 참조하세요.
- <장자>는 2차시에 걸쳐 길진숙 선생님이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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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공부보험 4회차
크리슈나무르티의 책에서 ‘과거의 나에 대해 죽음을 택할 때, 그 자유 속에서 나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내용에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평생 ‘질문 안하는 혹은 못하는 나’의 일관된 모습을 ‘죽이기’로 하고, ‘질문하는 나’를 용감하게 ‘실천’해보았습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라면, 사주로부터의 자유도 포함되지 않을까요? 사주가 나를 구속하고 억압해서 나를 끌고갈 수 있으니까요.” 과거의 나를 죽이는 그 순간의 목소리는 떨렸고, 전달은 어설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미숙샘은 “사주는 나를 알기 위한 뗏목이다. 나를 알고나면 그 뗏목을 버려도 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하게 스르르 답이 저에게로 왔습니다. ‘사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바로 그 사주를 공부해야 한다.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그 자유를 얻기 위해 나를 공부해야 한다.’ 감이당 목성공부 속에서 사주를 사랑하게 되고 운명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예감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설렜답니다^^ 
의역학수업에서는 64쾌를 무조건 외워서 시험은 통과했지만(막힌 한 곳을 시연샘이 툭 건들려준 덕분. 자리를 잘 잡은 덕분. 시연샘! 고마워요) 천간과 일간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도대체 적용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제가 스스로 으하하하 우스워서 유쾌했던 날이었습니다. 열심히 설명해준 소은샘!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천간과 일간이 다를 수도 있는 거죠? 아무래도 제가 그런 것 같아서요. (무식한 질문이면 어쩌지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