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자다-길진숙샘 강의 정리 A반-2조 이흥선 >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목성.png

나는 장자다-길진숙샘 강의 정리 A반-2조 이흥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전화노인 작성일13-04-07 09:32 조회3,900회 댓글1건

본문

나는 장자다.
2013년 4월 4일 길진숙샘 강의 A반-2조 이흥선
오늘은 암송으로 수업을 시작 하지 않았다. 장자를 읽고 질문을 해달라는 샘의 요청으로 수업이 진행 되었다.
‘나는 장자다’ 이 책은 장자는 장자대로의 글을 많이 곱씹어야 하고, 이 글을 해석한 왕멍은 왕명대로의 많은 곱씹음이 필요한 책이다.
 
질문 하나- 道의 궁극은 무엇인가?
도는 텅 빈 것이다. 규정과 정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변화란 사건마다에서 상식에서(현상, 만물, 나) 다른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제물론에서“ 삶을 있는 그대로 봐라” 라고 했다.
이세상의 삶과 저세상의 삶은 똑 같다. 그러므로 내가 있는 현장에서 다르게 가라.
吾喪我에서 吾는 참자아를 뜻하는데 세상으로 튀어져 나왔을 때 즉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고 ,我는 꾸며진 자아를 뜻한다고 했다.
오상아 같은 뜻으로 坐忘, 忘我, 心濟가 있다.
坐忘-공자와 안회에서 1. 仁義를 잊었어요. 2. 禮樂 즉 형식과 절차를 잊었어요, 3.坐忘을 잊었어요.
坐忘이란 大通즉 막힘없이 통함을 의미한다. 그 어떤 누구와도 통함을 의미한다. 규정성 더 나아가 나, 오상아를 잊는 것으로 아상도 사라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공자는 좌망의 뜻을 몰라 제자인 안회에게 좌망을 묻는다. 여기에서 공자는 제자인 안회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즉 관계성의 전복과 규정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心濟이란 안회가 위나라로 가겠다고 공자에게 말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인간세로 나온다는것(?) 이다. 하나로 모으고, 마음으로 듣지는 것 보다 기로 들어라. 기는 텅 비어서 타자와 깃들 수 있다. 비움이 곧 마음의 濟開다. 불교식으로 下心을 의미한다.
마음으로 보는 것은 소통이 어렵다. -마음의 원형이 있고 몸의 원형이 있다고 본다면 삶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그러나 현대 우리들의 삶은 부합하는 것만 받아들인다.
成心 (굳은 것), 成 形(굳은 몸) 보다 氣로 세계를 만나면 형체가 보이지 않아서 몸이 되고 정신이 되기도 한다.氣는 물질의 기본요소라고 동양에서 말한다. 즉 파동으로 만나는 상태 덧씌우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질문 둘 -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것이 불필요 할까?
군더더기 같은 지식(무용성)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우주를 보고 심신즉 나를 본다. 대지에서 품어내는 바람이 구멍으로 들어가서 내는 소리地籟, 사람의 숨이 대나무에 닿으면서 내는 소리인 人籟, 스스로 내는 줄 알고 소리를 내게 하는 어떤 것天籟
성리학에서는 만물의 궁극적 원리를 理보았다. 신은 있는가?
장자는 우리 몸을 들어가서 몸이 이미 成 心, 成 形이다 라고 주장한다. 우리 몸은 쇠하고 부대낀다. 슬픔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마음도 고정이 아닌 것으로 달라진다. 계속해서 약해진다. 끝으로 가면 소멸 밖에 없다.
인생의 참주제자는 누구인가? 유가에서는 心의 主人
우리 몸에서 누가 군주이고 누가 부하인가? 주제자는 누구인가?
절대 중심을 해체하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본다. 참주제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기와 기의 만남에서 유가 생긴다. 극한으로 계속 가면 오로지 운동만이 있다.
땅의 숨과, 구멍의 부딪침(운동)으로 소리가 난다. 인감의 숨 퉁소의 운동으로 소리가 난다.
빌브라이슨“거의 태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났으니 어찌 사랑하지 않으리요?”라고 했다.
없음에서 지구가 나왔다. 차별 구별이 있을 수 있을까? 형태가 만들어지고 분류하면서 차등과 차별이 생겼다.
모든 존재는 차별과 구별이 없이 똑같다. 우주적 시원의 차원에서 구별 차원이 없었다. 언어 즉 명령할 수 있는 이름을 만들고 차등과 차이가 만들어 졌다. 신이란 절대 중심을 만들면서 차별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道란 만물 생명의 본질이다. 유가에서는 도를 인간이면 마땅히 가야할 길(결정적)하늘이 정한 길로 인의예지로 본다. 장자는 도를 규정할 수 없는 만물이 사는 방법 길이라고 주장한다. 길은 다녀서 이뤄진 것이다 물은 일컬어 져서 이뤄진 것이라고 한다. 노자는 도는 규정할 수 없다. 매순간 부딪치면서 만들어 졌다고 말한다. 원리가 있어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실체도 없고 정리도 할 수 없다. 이미 만들어진 길 대도, 도는 대도도 없다고 한다. 가다보니 길이 만들어 졌고 법 규범이 만들어 진 것이다.
길은 반복 속 변주가 된다. 만물마다 자기의 도가 있다. 인간의 도로 하나를 규정할 수 없다. 시공에 따라 나의 도는 달라지고 나의 의도로 만들어 진다.
도가 사람의 도를 넓히는 것이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역사적으로 서로 도왔기 때문에 오늘날이 있다.
삶을 재구성하므로 고정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규정 불가능 모르는 상태 나는 다 알고 있는 상태로 간다면 새로움을 발견 할 수 없다. 다른 것을 보기와 다르게 보기가 곧 깨달음이다.
태허에모여있는기
매번 보는 타자들과 어떻게 관계를 할 것인가? 道를 道라고 규정하면 道가 아니다. 이것을 통해서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길을 가다가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전제를 깨는 과감함이 있어야 한다.
無氣 : 기가 몸이 되고 몸이 소멸 되어서 다시 태허로 들어가는 것의 반복
아상이 아니기 때문에 윤회는 아니다. 우리도 氣의 덩어리로 이루어 졌다. 내 몸은 타자들의 공동체다. 천지가 우리의 부모다. 근원적으로 만물은 형제자매다 氣란思의 동포다.
내가 가진 군더더기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
실샘의 공부이유: 경계가 없는 사람 너무 멋진 사람과의 만남(곰샘)에서 무슨 공부를 했기에 막힘이 없을까? 따라 해보다 보니 여기다.
인생은 규정한 대로 되지는 않는다. 규정불가능성이다. 가다보면 뭔가는 된다.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배움이 필요하다.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다름을 표현 하는 것이다. 세상을 본 것 을 표현하는 것이다.
말은 흐트러져서 소멸된다. 그래서 글로 표현한다.
지식의 중독, 과시에서 공부는 불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은 남의 말을 절대 듣지 않는다. 중독: 박학에 머물고 싶다. 이것은 아는 것도 공부도 아니고 그냥 군더더기다.
포기 할 수 없는 마지노선? 경계를 정해 놓는 시선 객체와 주체의 구분은 일정하다 이것을 人爲 라고 한다. 등급 속에서 위계 차별이 나온다. 동일화 하려는 욕망이다. (이것과 저것 시비 귀천 선악 음양)
숙, 홀, 혼돈의 예는 인간의 관점이라면 동일함을 가려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선이지만 폭력이다. 여기서 동일함은 나와 다름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제도다. 제도를 부정한는 것이 아니라 고정되지 않으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와의 긴장감은 가지면서 나의 윤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를 고민하는 것이다.
氣의 소통은 있는 그대로 기준 없이 상대성의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 道樞다. 道의 지도리 열면서 닫고 닫으면서 여는 것으로 天均을 하기 위한 양행을 말한다. 대대하는 것도 포괄하는 것이 道다
오직 살뿐 살게 할뿐 다름을 인정해라 돌고 도는 것을 인정해라.
선악의 재단은 끝임 없이 도추해야 한다. 그래서 朝三暮四가 나왔다.
흉년에 저공이 7개의 도토리를 원숭이에게 주는 과정으로 이것은 天均을 위해서 속임수나 교활함으로 원숭이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전에 활동이 많은 원숭이 리듬을 읽어서 마음의 미묘한 파동을 읽는 것이다.
존재가 어떤 아우성을 치는지 大通이 소리를 듣는 것이 大道다. 저공이 양행을 한 것이다.
전쟁, 빈부, 귀천이 정해 진 것인가? 정상 비정상이 있는가? 모두 우리가 만들었다.
결핍이 결함인가? 내 외형에 끄달리지 말아라. 이것은 부득이하게 오는 것이다. 운명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이고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다. 安明은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해 지는 것이다. 저절로 그러한 自然이 운명이다.
 
신도가(뒷꿈치 없는 이)와 정자산(작은 정나라의 유능한 재상으로 춘추시대에 외교적 당당함이 관중만큼 멋지다.) 비유-같은 스승에게 배운다는 것은 같은 뜻을 가졌다는 뜻인데 정자산은 신도가에게 부정적이다.---여기는 필기를 빼먹었어요....
왕태의 비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가득 채워서 간다. 장애와 장벽이 없음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실천이다 몸이 말해 준다.
우리 몸이 어떤 것으로도 변할 수 있는 유기체임을 알아야 한다. 기간 없는 신체는 몸으로 느끼고 오는 것 이것이 진정한 제자와 스승의 만남이다.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들레쥬와 흡사한 장자는 소수자 되기를 말한다.
物化: 소통이 아니라 제도 법 양식도 없다. 무위에서 배워서 왔다. 만물되기를 말한다.
 
호접몽에서 나비가 된 양주, 깨어나서 다시 양주가 된다.
나비와 장주의 형태는 구분 되지만 물화 되었다. 너와 나의 경계가 없다.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다. 그냥 되기다.
왕태 되기 호태타 되기 기본은 무위다 저절로 읽어 내기는 재조정이 끈임 없이 된다.
仁을 유가에서 규정하지만 이것은 대자대비다. 존재를 거슬리지 않아야 한다. 시비를 따질 수 없는 경지가 물위다.
예) 작은 샘 물속의 부대낌이 많은 물고기와 넓은 물속의 물고기
제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경계는? 나의 마지노선은? 무엇인가? 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도 깨어 져야 한다.
인류가 마지막까지 포기 하지 못하는 것이 소유다. 모두가 지키고 있기 때문에 마지노선이 있다. 소유 소비가 무의식에도 박혀 있다.
문턱을 넘는 것이 새로운 삶이다. 삶/죽음 꿈/현실의 경계도 없는 것이다. 賞이란 흔들리지 않는 삶은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 것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거울은 보내지도 맞이하지도 남겨두지도 않는다. 감정을 남겨두지 않는다.
감정에 휘둘려서 집착이 되는 것이다. 평정과 응무소주를 해야 한다.
아름다운 죽음 을 맞이한 장자
통념을 확실하게 깨고 가는 장자 VS 유가사상
생사의 경계가 없다.
존재가 그 이후에 바뀌는 것은 늙어서도 관계 조정이 필요한데 탐심으로 어렵다. 벗어라.
내려놓기를 해야 새로운 새 노년을 살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내 욕망이 무엇인가 들여 다 보는 계기가 된다.
重言 은 설득력을 위해 끌어다 쓴것(공자, 안회의 인용)
글쓰기에서 다른 말을 하고 싶다면 나만의 말을 찾아라, 내 스타일을 만들어라.
댓글목록

생글님의 댓글

생글 작성일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있어야, 이렇게 정리를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언제 쯤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아니 과연 도달할 수 있기나 할까요?  이런 능력들을 보는 그 자체가 저에게는 소통의 공부 맛을 보게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