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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수업 5주차 / 전반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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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석영 작성일21-06-06 14:27 조회7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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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1년 목요 대중지성 2학기 1교시, 채운선생님의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수업

5주차 강의의 전반부 후기를 맡게 된 석영입니다.

 

이번 주는 채운샘께서 '사실 지금까지 앞에서 이야기했던 게 다다!'라고 하시며,

다시 한 번 '의미는 사용, 용법에서 생긴다.'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에게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계속 곱씹어봐야 할 것 같고요.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이라는 게 뭘까.'에 대한 이야기로 수업이 시작됐습니다.

 

책의 여기저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 대해 말하는 부분들이 있어 그 부분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언어로 오염된 지성을 치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철학적 탐구>에서 했던 작업도 자신이 몇 년 전에 썼던 <논리-철학 논고>가 틀렸음을 말하며 자신의 과거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해체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가 깨고자 했던 과거 자신의 생각은 '언어가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생각이었는데요. 언어가 무언가를 지시하기 위해서는 언어 이전에, 변치 않는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즉, 언어가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말에는 '사물에 본질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지성의 오류들은 언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공중누각들임으로

언어라는 토대를 청소하면 누각들, 즉 지성의 오류들은 자연스럽게 해체된다고 보았습니다.

(1학기 때 중론에서 했던 공부와 매우 비슷한 부분이었습니다. '어떤 언어의 오류가 우리가 괴로움을 반복하게 하는가'하는 내용 말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우리에게 궁극의 진리를 알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토대 위에서 사유하고 있는가 하는, 내가 보는 세계를 의심하게 하고 무의미와 혹들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언제나 '난 알겠다!!(불끈!확실!)'이 아니라 당혹스러움과 의문의 형식을 띄고 있다고 합니다. ^^

그러나 동시에, 진리는 다 드러나있다, 배후에 숨겨진 진리와 의미는 없다 고 하는데....... 우리가 우리의 관념으로 어떤 것을 바라보고있기때문에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알쏭달쏭했는데, 혹시 어떤 사람에 대한 기대나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상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성질을 내는 모습을 보고 '왜 저러나'하는 건 그 사람은 그러면 안되는, 혹은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는 무의식적 기대와 관념이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걸 버리고 보면 참 재밌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들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맞는 예시인지 모르겠습니다. ^^; ㅎㅎ

 


다음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잘 이해하지 못한^^;ㅋ 제 나름대로의 짧은 정리를 말씀드리자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이해란 '연관들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의 뜻을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컨대 어떤 말이 어떤 맥락 위에서 나온 것인지, 맥락화가 잘 되어있을수록 우리는 그 말을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화가나는 것을 보고 그 화가 어떤 맥락 위에서 나온 것인지, 넓게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에게는 즉각적이고 반응적인 감정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떤 맥락화도 하지 못하고 단지 '저 사람이 화를 냈다'고만 생각하면 그는 잘못한 사람이 되고, 우리는 그에게 반응적으로 화가 납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과 화에 대한 '몰이해'입니다. 더 나아가 '궁극의 뜻을 알고자'한다면 '그 사람이 왜'를 생각하며 그 사람과 그 화가 실체화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겼는데요. 내가 누군가가 화내는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이 불안한 환경에 있구나', '대장 속 좋은 미생물이 부족하구나' 등등의 생각을 하는 것, 즉 여러가지로 맥락화를 시켜보는 것은 결국 내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름의 결론을 내려보자면, 보통 그런 상상은 당사자와 이야기해보면 '틀린'경우(그가 말하는 맥락화-서사화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그러니 그것은 그 상황과 사람에 대한 '몰이해'라고 말하게 되는데....... 음....... 같은 상황을 비트겐슈타인식으로 말하면 '이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채워넣은 맥락화들 역시 나의 상상이라는 걸, 또 우리가 모든 걸 알 수는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면 말입니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전에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설명'과 '기술'의 차이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냥 잊지 않고 싶어서 추가로 적습니다.)

설명은 정의를 내리는 것입니다.

기술은 정의를 내리는 것과 다릅니다. 그냥 그것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키보드는 컴퓨터에 글자를 입력하기 위한 도구다'는 설명,

'이 버튼을 누르니 화면에 글자가 입력된다'는 기술....... ! 이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ㅎㅎ

 

 

 

그럼 전반부 후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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