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6주차 전반부 후기 >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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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6주차 전반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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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희자 작성일21-06-13 18:49 조회5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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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6주차 수업 전반부 후기를 맡은 진희수입니다~

이번 수업은 이해한다는 것과 관련한 질문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석영샘이 질문을 하였는데, 맥락화가 잘 될수록 이해가 된 거라고 한다면, 그 맥락을 자기의 상상으로 채워넣을 수도 있는데 그것도 역시 이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였습니다.

 

1. 맥락은 영어로 콘텍스트(context)인데, text라는 말을 먼저 살펴보면 20세기 서양 철학자들이 작품이나 책이란 개념 대신에 썼습니다. 그 이유는 한권의 책, 하나의 작품이라고 하면 이것을 생산해낸 절대적인 주인인 저자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반해 한 권의 텍스트라고 하면 저자의 의도, 저자의 생각, 저자의 세계관 이런 것들이 고스란히 녹아든 저자만의 생산물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이는 우리가 짤막한 글 한편 쓰는 경험을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글을 쓰려고 내가 개요를 잡고 쓰기는 하는데 갑자기 어디서 생각이 옵니다. 어떤 표현은 얘기를 듣다가 우연히 생각이 나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 텍스트라는 말 자체가 이미 저자. 개인의 뭔가로 귀속될 수 없고, 아주 복잡한 씨줄 날줄이 막 얽혀가지고 짜여진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콘(con), 함께 모여있는 모습을 맥락이라고 말합니다. 여러 관계성들이 복합적으로, 종합적으로 얽혀져 있는 그 상황을 context라고 하는 겁니다.

 

2. 언제나 한 권의 책을 만날 때는 그 책이 놓여있는 맥락을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유도 그 시대조건과 무관하게 위대한 건 없습니다. 자기 시대의 주류적 사고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그 한계(경계)에 서서 한 발은 자기 시대에 걸치고 한 발은 자기 시대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19세기의 사람이 21세기의 사람들의 생각을 미리 볼 수 없습니다.

 

아마 그래서 2학기에 비트겐슈타인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삶을, 그 당시의 철학과 언어에 대한 사고방식, 그리고 그가 쓴 논리철학 논고를 배우고 나서 철학적 탐구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였구나 싶었습니다.

 

3. 이런 사유에서 서양의 현대 철학이 강조하는 건 관계론적 사고방식입니다. 개체로서의 A,B,C가 있고 관계가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의해 A가 생산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불교의 방식과도 같습니다. 불교에서도 나라는 독립적인, 그 자체로 존재하는 건 없고 어떤 연기 조건 속에서 출현합니다. 그러니까 context를 이해한다고 하는 거는 그 텍스트가 놓여있는 종합적 맥락을 파악한다는 뜻입니다.

 

4. 이걸 먼저 이해한 후 그 텍스트로부터 나와의 접속지점을 찾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맥락과 내가 언어에 대해 고민하는 지점들이 비트겐슈타인이 보는 그 종합적인 것과 맞물려 갔을 때 뭔가 하나가 풀려가는 겁니다.

 

5. 그러니까 이해한다는 것은, 그 시대와의 관련 속에서 텍스트에서 내가 독해한 용법 속에서 알게 되는 만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신은 그 당시의 신 개념과 다른 아주 이상한 용법으로 쓰고 있는데 그건 그 당시의 신의 용법과 스피노자의 맥락을, 에티카의 맥락을 따라가면서 읽어야 알 수 있습니다.

 

6. 사람을 이해하는 것도 어떤 전후 맥락 속에서 그가 그런 말을 하는지를 알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달라집니다. 상상을 포함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어떤 제스츄어를 취할 수 있을 때 그래도 그를 이해했다 내지는 이해하려고 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7. 이해한다는 건 결국 말에 고정된 의미가 있어서 이 말을 정의로 이렇게 풀 수 있다가 아니라 그 말이 행해지는 전체적인 장 속에서 그 말이 지금 어떤 규칙들로 어떤 용법들로 사용되고 있는가 라는 걸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한다는 것이 씨줄 날줄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연관을 보는 것이고, 연관을 보면 관계를 볼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불교의 연기관과 자연스레 연결이 되네요. 새삼 목성의 치밀한 커리큘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ㅎㅎ

남은 두 번의 수업도 즐겁게 따라가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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