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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의 한가운데서 욕망마주보기-진주댁입니다(A반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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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생글 작성일13-04-17 13:06 조회3,47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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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샘들이 여기에 수업후기를 올릴 때 참 부러웠어요.
과제 한 김에 저도 올려봅니다.
그나저나 저 ‘생글’ 별명을 ‘진주댁’으로 바꾸고 싶은데, 바꾸는 방법을 알 수가 없네요.
관리하시는 분 중에 저 대신 바꿔주셔도 되는데......성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폐경의 한 가운데서 욕망 마주보기
목요감성 A반 1조 황 진 옥(2013.4.17)
 
1. 두 할머니와 한 할아버지를 초대하며
 
  작년부터 폐경이 시작되었다. 내 몸은 나 자신조차 주체할 수 없는 거대한 반란을 도모했다. 익숙한 몸과 결별하고 낯선 몸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나는 사정없이 휘청거렸다. 일개 호르몬의 전환이 내 존재 전체를 초토화시키다니 실로 놀라웠다. 생리통을 참느라 식은땀을 흘려가면서 일에 몰두하고, 혹은 통증을 견딜 수 없어 기절까지 했을 때는 차라리 폐경을 간절히 소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생리통에서 해방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폐경을 나와 무관하게 여기고 도외시했다. 그 방자함의 크기만큼 나는 신음하고 또 신음했다. 피부, 치아, 관절, 시력, 모발, 체형, 수면, 발한, 기억, 발음, 음성 등에서 나타나는 고통을 수반한 심신의 변화는 내 일상 전체의 리듬을 무차별적으로 공략해 들어왔다. ‘우주의 대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금화교역’(金火交易, 고미숙『몸과 인문학』63쪽)이 일어나고 있는 내 몸의 현장으로부터 도피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폐경은 불가항력적인 힘을 과시하며 나에게로 왔다.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은 순응밖에 없었다. 그런데 순응하기만도 결코 녹록하지 않은 고군분투였다.
 
  폐경은 나로 하여금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의 틀을 바꾸었다. 폐경을 겪기 전의 나와 겪은 후의 나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달라져야만 살아낼 수가 있었다. 달라지는 내 몸과 일상을 비로소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나보다 먼저 폐경을 통과한 이 세상 모든 언니, 어머니, 할머니들이 떠올랐다. 그들 모두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뜨거운 눈물이 치솟았다. 특히 내 엄마가 폐경을 겪었을 무렵, 세상물정 모르고 속을 썩이던 청춘의 그 딸 내가, 어느새 폐경의 고지를 넘으면서 처참한 꼴로 아파하노라니 저절로 눈물범벅이 아니 될 수 없었다. 통곡하며 폐경을 끌어안았다. 허심탄회하게 폐경을 껴안는 그 자리에 배나무집 할머니(강석경『가까운 골짜기』), 페넬로프(로자문드 필쳐『조개줍는 아이들』), 그리고 민 노인 (박지원『나는 껄껄선생이라오』)을 초대했다.
 
  배나무집 할머니를 만난 것은 30대였다. 만나자마자 장차 내가 되고 싶은 할머니의 원형으로 삼았다. 참으로 귀한 인연이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여자로서 30,40대의 삶을 행진할 수 있었던 것은 배나무집 할머니 덕분이다. ‘배나무집 할머니는 볕에 그을린 땅색 살갗과, 주름이 고랑처럼 패인 손이 소금바람 솔바람 세상바람 다 맞고 온갖 풍상을 겪은 고목 같은 할머니다. 배나무집 할머니의 흙투성이 얼굴에는 동자같이 천진한 표정이 있다. 불평이나 남의 말하는 법 없이, 쉬지 않고 땅에 붙어 농사만 짓는 배나무집 할머니는 땅에 순응하며 살아온 자의 경건함이 깃들어 있고, 손상되지 않은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가까운 골짜기』68-94쪽). 그런 배나무집 할머니는 장자가 말한 ‘마른 나무와 식은 재(槁木死灰)’를 연상시킨다. 배나무집 할머니의 ‘밭일’은 ‘천지의 바른 기운에 순응하고 노니며’(왕멍『나는 장자다』87쪽) 욕심없이 자연스럽게 몰두할 수 있는 일이다. 폐경이후의 나도 배나무집 할머니가 ‘밭일’을 하는 심경으로, 욕심과 득실을 내려놓고 ‘글밭’을 일구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몸이 빚어내는 대로 내 몸이 허락한 만큼 담담하게 글을 경작하고 싶은 것이다.
 
  페넬로프 역시 30대에 만났다. 페넬로프는 평범함이 아주 특별한 보석일 수 있음을 일깨워준 60대 할머니다. 60대 중반의 할머니작가 로자문드가 소설『조개줍는 아이들』의 주인공으로 빚어낸 인물이다. ‘페넬로프는 정원을 손질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편지를 쓰거나 하는 사소한 일상적 행위에서, 무한히 느끼고, 생각하고, 애정을 바침으로써 스스로를 정화시켜 나갔다. 힘겨운 삶의 역경을 거쳐온 페넬로프가 미움도, 그리움도, 원망도, 집착도 다 떨쳐버리고 한 자유로운 존재로 삶을 마감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페미니스트들이 제시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하나의 해방된 여성의 표상을 보여 주기도 했다’(『조개줍는 아이들』2권 401쪽). 게다가 평생 집안 살림만 해온 평범한 주부이지만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열려진 넓은 품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세 자녀를 제쳐두고 가난한 한 쌍의 연인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자유로운 사유와 한없는 온기를 지닌 할머니였다. 페넬로프는 폐경이후의 나로 하여금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정화시켜가며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을 가라고 일러 준다.
 
  민노인과의 인연은 폐경이 준 선물이다. 만약 폐경을 겪지 않았다면 민 노인의 호탕한 매력을 발견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쳤을 수도 있다. 민 노인은 온화하고 자상하고 근엄한 할아버지가 절대 아니다. 그래서 더 매혹적이다. 노쇠한 기운이 느껴지기는커녕 박력과 활기가 넘쳐흐르는 호쾌한 사나이다. 민 노인은 ‘장생불사약이 뭐냐’는 물음에 당연히 ‘밥’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하고, 밥맛없어 하는 젊은이(연암 박지원) 앞에서 왕성한 식욕을 게걸스럽게 보여줌으로써, 군침이 돌게 하여 ‘저절로’ 밥을 먹도록 유도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씹어먹고, 긁어먹고, 찔러죽이고 처죽이는 자기 자신’이라고 냉철하게 말하기도 하며, ‘잠을 잘 안 자면 남보다 밤을 더 사는 것이니 결국 더 오래 산 결과를 낳는다’는 유쾌한 역발상도 하는 도발적인 할아버지이다. 민 노인은 ‘비록 익살스럽고 기걸한 풍이 있었으나 성질은 깨끗하고 굳어, 좋은 일을 행하려고 힘썼으며, 특히 『주역』에 밝고 『노자』의 말을 좋아했는데 대개 책이란 책은 보지 못한 것이 없다’(박지원『나는 껄껄선생이라오』81쪽). 그래서 그런지 사물을 꿰뚫어보고 진리를 통찰하는 혜안이 결코 녹록하지 않다. 게다가 익살, 유머, 용기, 기개, 풍모까지 더해지니 어찌 한 눈에 반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아마 17,8세의 연암 박지원에게도 특별한 노인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에 『민옹전(閔翁傳)』으로 추모 되었을 법하다. 폐경이후 나도 민 노인처럼 거침없는 명랑함과 생기발랄함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
 
  죽음을 향한 도정에 있는 폐경은 나로 하여금 민 노인의 통쾌함, 페넬로프의 평범함, 배나무집 할머니의 순전함을 모두 녹여 하나로 합친 ‘나’로 살고 싶은 욕망을 마주하게 한다. 비로소 폐경의 한 가운데서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망을 살고자 용기를 낸다. 진정 ‘폐경은 축복이다’(고미숙,『몸과 인문학』66쪽). 이제 타인의 인정과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민 노인, 페넬로프, 배나무집 할머니 모두를 내 속에 담아 복합적이고 융합적인 ‘나됨’으로 빚어 보려고 한다. 설사 그 욕망이 좌절을 겪게 하더라도, 삶의 끝자락을 향해 가는 폐경에서 마주한 바로 그 욕망을, 텅 빈 마음으로 천진스럽게 누리고 싶다. 한바탕 실컷!
 
다중성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 세상이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문법을 사용하지 않듯이 모두가 같은 것에 웃고 울고 하지 않듯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우리는 살아가면서 더 많은 ‘나’를 발굴해 욕망하고 그 ‘나’들을 통해 매번 새로운 별자리를 만들며 살아가야 한다. 나는 ‘복수(複數)’다. (신근영, 『칼 구스타프 융, 언제나 다시금 새로워지는 삶』75쪽)
  
2. 엄마로서의 실존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글쓰기
 
  20대에는 사랑과 육아에 몰두했다. 훌륭한(?) 선생님을 꿈꾸며 교대에 진학했으나, 교생선생님까지만 될 수 있었다. 대학 1년, 데이트를 하느라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다가와 담배 딱 한 개비를 구걸했다. 그런데 남자가 가게로 뛰어가 담배 한 갑을 사와서 공손히 드리는 게 아닌가. 그래서 결정했다. 이 남자에게 무조건 시집가기로. ‘신사임당’ 별명까지 가졌던 딸의 갑작스러운 돌변에 엄마는 절대 반대를 외치며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지만, 철학관을 전전하더니 결국 남자의 사주가 좋다는 말에 백기를 들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핀잔을 감수하며 시집을 갔더니, 쌀을 외상으로 들일 정도로 가난했다. 가난 속에 나를 내버려두고 남편은 군대를 가고, 제대 후에는 공부를 해야 했다. 나는 글이 돈이 되는 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내 글이 쌀값이 될 수준은 아니었다. 아기의 과자값 정도에 불과했다. 아기용품을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방송국, 신문사, 잡지사에 원고를 보냈다. 그런데 그 아기가 다섯 살이 되자 병원에 입원할 일이 생겼다. 그 사건은 최초로 가난이라는 ‘벽’을 절박하게 실감하게 했다. ‘자식을 곁에서 보살피는 살림하는 엄마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식에게 꼭 필요한 돈을 버는 엄마가 될 것인가’하는 두 모성의 갈림길에서, 자식의 곁을 지키는 모성을 포기했다. 1980년대 당시의 지방에서는 여자가 집안일을 하지 않고 바깥일을 하면, 팔자 센 여자로 여기는 풍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그런 세태를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돈 버는 바깥일을 하는 엄마, 팔자 센 여자의 길을 모색했다. 하지만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실존으로서의 글쓰기를 강렬하게 부러워하고 있었다.
 
  엄마로서 바깥일을 욕망하자 인연은 예비 되어 있었다. 마침 모잡지에 실린 나의 글을 본, 진주시 여성회관 관장의 부름에 의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성의 자립을 도우고 봉사활동을 주업무로 하는 여성회관에서, ‘봉사하는 셈치고’ 준공무원의 마음가짐으로 일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흔쾌히 수락하고 비정규직의 세계에 발을 내디디게 되었다. ‘봉사하는 셈치고’ 이루어진 계약이었기 때문에 임금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정기적인 고정 수입이 있다는 것은 자식을 둔 엄마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충분조건이었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나의 심성으로 돈벌기는 만만하지 않았다. 6남매의 셋째 딸로 자라면서 눈에 띄는 재주가 없다보니 ‘양보 잘하는 착한 아이’로 실존했던 것이 걸림돌이었다. 부딪치는 모든 문제를 양보로 해결하며 ‘착해지려고 노력한 그것이 바로 반대인 악’(크리슈나무르티,『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177쪽)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 무엇을 양보하고 희생해서 인정받고 사랑받을 것인가에 목말라했던 착한(?) 실존의 습관은, 자식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엄마에게 ‘악’으로 작용했다. 욕심, 분노, 싸움, 주장, 경쟁 등의 단어를 아예 잃어버린 내가 세상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이기 때문에 도태될 수가 없었다. 주어진 일처리를 완벽하게 해내는 것으로 승부할 뿐 다른 길이 없었다. 시비 거리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맡은 바 일을 실수나 착오 없이 철두철미하게 해내느라 안간힘으로 무장하고, 에너지가 소진 될 정도로 긴장했다. 그리하여 ‘남편이 만질 게 없는 말라깽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여자’로 점차 되어가며 오로지 엄마로서의 소임에 전존재를 걸었다.
 
  세상과 사람들이 나를 할퀴고 지나갈 때마다-소통이 미숙했던 내가 오히려 세상과 사람들을 답답하게 했을 수도 있음을 폐경기에 도달한 지금은 흔쾌히 시인할 수 있다- 독서가 유일한 구원이었다. 특히 대하소설『토지』를 읽으면서 영혼을 출렁출렁 헹궈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박경리의 『토지』가 구사하고 있는 언어 때문인 듯했다. 박경리는 진주여고의 전신인 일신여고 졸업생으로 고교 선배다. 그래서 그런지『토지』속의 진주 사투리에 온전히 몰입, 동화하면서 박경리의 사유를 온전히(?) 내 것으로 할 수 있었다. 『토지』읽기는 숭고한 독서체험이었다. 그 기막힌 일체감을, 솔출판사가 주관한『토지』완간기념 전국 독후감 공모에,「박경리『토지』와 나의 교감주변」이라는 제목으로 원고지 50매를 훌쩍 넘겨 녹여내 보냈다.『토지』에 대한 감동이 워낙 컸기 때문에 글 쓰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회관의 직무에서 잠시 놓여날 수 있는 즐거운 유희였다. 결과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1등이었다. 그때의 글쓰기 경험을 잊을 수 없다. ‘사람은 글을 쓰고, 글은 사람을 쓴다’(왕멍,『나는 장자다』92쪽)는 말을 실감했다. 적절한 어휘와 자연스러운 전개가 저절로 척척 떠올라 스스로도 경이로웠다.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는, 희열에 차 만세를 부르며 마구 날뛰었던 기억은 항상 새롭다. 그 순간, 참 짜릿하고 행복했던 것까지.
 
  여성회관에서 일한 지 7년 째 접어들면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월 20만원도 채 안되던 임금이 200만원(1990년대 당시)에 육박할 정도로 승승장구 했다. 최고 정점을 치며 올랐더니 쇠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기만 하면 세상살이는 탄탄대로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오산이었다. 세상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능력 때문에 제거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우쳤다. 일개 비정규직의 힘이 너무 막강해질까봐 관(官)은 견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른 비정규직 영입을 추진하는 모습은 나에게 칼이 되어 꽂혔다. 그 칼은 내 온몸을 난도질했다. 민 노인의 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씹어먹고, 긁어먹고, 찔러죽이고 처죽이는 자기 자신’(연암 박지원『민옹전(閔翁傳)』)이었다. 내 나이 서른아홉, 피를 철철 흘리며 그때 처음 술을 입에 댔다. 그 당시 나는 융이 말한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기’에는 미성숙했다. ‘나란 사람이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으니 당연히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신근영,33쪽)
 
  몇 년 후, 나를 기필코 밀어내고자 안간힘을 쓰고, 내 자리를 대신한 사람의 처지를 듣게 되었다. 그 남편이 사업이 망해 수감된 상태였고, 자식 둘을 뒷바라지하느라 힘겨웠다는 형편이었다는. 그때 생각했다. ‘아, 그때 내가 밀려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구나, 물러나오길 참 잘했어.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웠더라면 더 끔찍할 뻔 했구나.’ 나의 쓰라린 고통이 곧 다른 사람에게 적선(積善)이 될 수도 있다는 우주의 이치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고통 속에서 나 역시 누리는 행복이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니 한결 삶에 겸허 해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순 속에 있다. 정확히 말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 모순이다......자연은 선악의 양면성을 가졌다. 하지만 그것이 선과 악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자연 중 어떤 부분은 선하고 다른 부분은 악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빛과 어둠은 하나의 태양으로부터 나오며, 그 빛과 어둠의 경계는 시시각각 달라진다. 하나의 태양으로부터 모든 생명 에너지가 출발하듯, 자연으로서의 생명 역시 삶충동 하나만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이로운 것은 선으로, 해로운 것은 악으로 여기게 될 뿐이다. 무조건적인 선과 악은 없다.(신근영,『칼 구스타프 융, 언제나 다시금 새로워지는 삶』131쪽,144쪽)
 
  나의 30대 끝자락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백수의 시기를 예감하면서 진주시 교외에 위치한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를 결행했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였는지도 모른다.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 속에서 박경리의 고고한 실존적 글쓰기를 흉내 내고 싶은 심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떠남’은 곧 ‘만남’이었다. 비정규직 일자리를 잃으니 아주 새로운 ‘마당의 자연’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마당의 흙과 생물은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종국에는 내가 나를 끌어안을 수 있는 저력도 주었다. ‘설 자리를 잃은 채 허공 속을 헤매던 융에게 노트를 기록하는 것, 글쓰기가 곧 치료’(신근영,33쪽)였듯이 나 역시 마당과 내밀하게 소통한 일기를 쓰며 마음을 치유해 갔다. 정말 음악도, 영화도, 그림도, 드라마도 필요 없었다. 오로지 마당이면 충분했다.
 
자연과 접촉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지적 능력을 발전시키게 된다. 수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미술관과 연주회를 가고, 텔레비전을 보며 그 밖의 여러 가지 오락을 즐긴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용하고, 예술에 관해 많은 생각과 말을 한다. 만일 당신이 자연과 직접 접촉한다면 나는 새를 보고, 하늘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고, 언덕 위의 그림자들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면, 당신은 어떤 그림을 보기 위해 미술관에 가고 싶을 것인가? (크리슈나무르티,『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141쪽)
 
  마당은 땀 흘리며 노동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무념으로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었다. 그런 와중에 전원생활 수기 공모를 보게 되었다. 이미 써두었던 ‘마당일기’를 참고삼아 응모했더니 당선작으로 뽑혔다. 마당에게 입은 절절한 은혜를 녹여 쓴 것 뿐이었는데...그렇지만 나의 40대에도 30대처럼 박경리와 같은 실존적 글쓰기의 삶은 예비 되어 있지 않았다. 기필코 글쓰기로 실존하고 말리라는 각오로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공공도서관을 단골로 이용하다가, 도서관 관장의 권유로 문화교실 강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역시 ‘봉사하는 셈치고’ 지역아이들을 위해 강좌를 맡아달라고 관장은 제안했고 나는 수락하고 말았다. 40대의 시작과 동시에 시작된 이 운명을 살아온 세월이 십년이 훌쩍 넘었다. 오로지 글쓰기로만 실존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나 또한 그런 삶을 간절히 원했건만 그런 실존은 언제나 새로운 인연으로 인해 어긋나고 말았다. 그건 아마 나의 글쓰기 능력이 실존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나의 잠재의식은 이미 알아채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인연을 나 스스로 불러들이도록 한 모양이다.
 
3. 폐경이 준 선물 중의 하나, 글쓰기
 
  감이당과의 인연은 순전히 내가 자초한 것이다. 여성회관 관장도, 도서관 관장도 아닌 오로지 내가 앞장서서 맺게 된 인연이다. 내가 나의 인연을 스스로 기획하게 된 것은 폐경 덕분이다. 폐경을 맞이한 나에게 몸에 대해, 실존적 글쓰기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이 이상 더 안성맞춤인 배움터는 없다는 판단을 했다. 폐경은 죽음에 보다 더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 죽음이 두렵거나 초조하지는 않다. 다만 남은 삶의 여정은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을 가고 싶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감이당의 글쓰기 수련을 통해 오래 전 잃어버린 글쓰기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욕망한다.
 
  만약 폐경을 겪지 않았다면 감이당 공부를 감행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폐경이 감이당 공부를 선물했다고 할 수 있다. 나도 언젠가는 폐경의 은혜, 민노인을 새롭게 발견하게 해 준 감이당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어떤 선물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 내가 받은 선물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가난이다. 가난은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여행, 휴가, 운동, 등산, 산책, 쇼핑 등을 앗아갔다. 소처럼(辛丑生) 일만 하며 살았다. 당연히 우울할 여가도, 몸이 아플 겨를도 없었다. 가난이 준 선물이라면 선물이다. 받는 선물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하지만 주는 선물은 더 큰 행복을 누리게 한다. 더 큰 행복에 대한 ‘욕심’으로 선물을 줄 수 있는 경지의 나를 욕망한다. 이제 그만 착한(?) 실존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폐경이니까. 하하.
 
  융이 신화나 민담들을 가치로운 글로 새롭게 탄생시켰다면, 나는 대학원에서 전공한 독서 이론과 그 이론을 적용하는 독서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좌충우돌의 체험을 ‘독서교육의 성공과 실패’, ‘만화의 폐해와 유익’ 등의 글로 형상화하고 싶다. 그런 나의 글쓰기가 작은 새의 노래처럼 되기를 바란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창가에 앉더니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새는 온 가슴을 다해 노래했다. 그러다가 노래를 그치고 날아가버렸다. (크리슈나무르티,『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141쪽)
 
 
 
댓글목록

시연님의 댓글

시연 작성일

헐~~진옥샘 후기 올리는 거 부러웠다고 지금 에세이쓰신거 이렇게 요기 다 보이게 활짝 펼쳐 놓으신거예요???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되요^^;;
제가 마음에 여유가 없어 찬찬히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의 뿌듯한 마음이 팍팍 느껴지네요.
수고하셨어요^^
그나저나 목성님들 왜 이렇게 에세이를 빨리 올리시는거여요.
 정말 범생이들.... 얄~~미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