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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마음 탐구, 몸 탐구 – 1학기 3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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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야수 작성일22-03-06 20:59 조회1,491회 댓글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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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시 초기불교 입문하기- 붓다의 생애1 : 탄생에서 성도까지 (고미숙 선생님 강의)

 

3주차 수업은 출가한 뒤의 모습입니다.

청년사문 싯다르타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윤회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는 6년 고행을 하십니다. 이 과정이 중요하다고 하셨지만 이야기가 하염없이 흐를 듯하다고 다음의 깨달음의 장면을 언급하셨습니다. 출가사문이 된 싯다르타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열반을 이루겠다는 깨치는 진리를 찾고자 합니다. 그래야 깨달음입니다. 어떻게 해야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지? 그와 같은 질문을 가지고 스승을 찾고 두 분의 스승을 만납니다. 아라라 카라마와 웃다카 라마푸타로 부터 당시의 선정에 이르는 최고의 명상 수행법을 배웁니다. 그렇지만 출가 당시에 가졌던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은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분별에서 벗어나면 명료하게 알아야하는데 우리는 욕심이 들어간 채로 대립과 이원론적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무분별하다.”고 할 때는 상태가 안 좋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분별에는 대립과 갈등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긴장을 이야기 하십니다. 그 사람이 날 무시하고 공격할지 모른다는 분별지로 괴로움을 낳은 것이 되겠지요. 목성대중지성을 시작하고 도반들을 만나던 날! 설레기도 하였지만 긴장도 하고 떨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너와 나를 나누었던 분별심이 있었음을 보게 되네요. 에구...

지금 일어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예시로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어리석음과 분노와 욕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리석음과 분노가 까르마로 작동을 하며 우리의 이해관계로 얽히면 그와 같은 전쟁을 벌인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벗어나는 것도 이토록 어렵다. 그렇다면 괴로움을 계속해서 연출하는 이 길을 벗어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물으시는데 잘 모르겠더라고요. 어쩌면 우리는 싫어한다고 하면서 싫다는 마음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는 만큼 싫다고 하는 것에도 집착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도 끝까지 세세하게 관찰하고 탐구한 적이 없는 것 같네 라는 순간에 부처님은 궁극적인 데까지 관찰하고 탐색하고 해부해서 어디서 괴로움이 생겨나고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하겠다는 것이 부처님의 공부법이었다. 라고 하는 말씀을 들으며 대충 알아듣고 아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던 모습들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고 이와 같은 공부 자리에 온 것은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이어서 대충하지 않고 생명의 뿌리까지 밀고 가는 것이다. 부처님의 6년 수행은 몸이 견딜 수 있는 극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생리적으로 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통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를 보는 것입니다. 익숙해지면 괴로움이 줄어드는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역시 깨달음을 이루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라고 하시는데 진짜 다행이라며 같이 안심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평생의 고행을 하고 있다고 하시는데 아차 싶었습니다. 정신 차리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이 더 생겼습니다. 고미숙 선생님의 말씀처럼 요리조리 피하려다 마음의 지옥이 된다는 말씀에 공감이 되며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를 맞는다는 우스운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고생이 복이 되는 원리가 까르마를 지워주고 복이 되도록 한다고 하시는데 자신의 괴로운 상태를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괴로움을 직면한다고 하는 것의 구체적인 방법이 궁금해졌습니다.

고행을 중단하고 보리수 아래에서 무상의 큰 지혜를 얻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가부좌를 풀지 않겠다.고 하시며 깊은 통찰에 들어가십니다. 존재와 세계를 가로지르는 통찰을 하십니다. 이 과정에 마왕을 불러내어 한 판 승부를 하시기도 합니다. 마왕은 깨달음을 이룰까 염려가 되는 마음에 성적인 유혹으로, 또는 괴물과 검이 난무하는 군대를 보내어 방해를 합니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흔들리지 않고 수행을 이어갑니다. 심지어 쏟아지는 진흙비가 아름다운 빛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이 세상의 모든 것에 적대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과의 공감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모든 것과의 공감은 나 아닌 다른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 여서 그러한 이유로 적대감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일 듯합니다.

부처님의 출가 전 두 가지 질문을 정리해주셨습니다.

인간의 삶은 왜 이토록 괴로운가?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인가? 이었습니다. 집중력과 통찰력으로 살아라. 관찰과 통찰을 통해서 모든 존재가 겪는 고통에 공감하는 자비의 파동이 핵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존재의 고통에 대하여 사유할 때 무한한 지복감을 느낀다. 우리는 고통을 생각하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은데 그들과 연결되어있을 때 그것이 무아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벗어나는 체험! 그 순간 해방이 된다! 무아를 터득하면 자비로 존재한다. 지혜와 자비를 내면에서 일깨워낼 때 우리는 더 이상의 어리석음이 수많은 고통을 만들어내는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열반으로 가는 길에 고따마 존자가 깨달은 힘의 두 가지는 무아와 연기법으로 외워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라는 존재 안에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없으며 고유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으며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쉽지 않습니다. 꾸준히 탐구하고 관찰하고 공부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는 듯합니다. ^^

깨달음을 얻으신 후 무엇을 하셨을까요? 49일 간 7개의 나무를 옮겨 다니며 환희를 누리십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리의 보리수나무와는 7일 동안 눈을 감지 않으시고 지그시 쳐다보셨다고 하네요. 감사의 표현을 그와 같이 하셨다며 구경의 경지에 이르러 중생과 가까워진 느낌이 드셨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깨달은 자 붓다는 모든 것을 꿰뚫어 알았다. 여기서 알았다가 핵심이다. 그리고 다른 명칭이 생겨나는데 여래 입니다. 알았다가 여기의 핵심입니다. 이 길을 열었으니 자신이 그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 감탄이 나오지만 중생의 습이 두터운 탓인지 순간 두려움과 의심이 바로 일어납니다. ...함께 공부하는 대중지성의 힘으로 정신 차리며 가야겠습니다.

보통사람이 갖고 있는 분별력과 통찰력을 이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세계의 법칙과 존재의 원리를 아는 것. 이게 깨달음이다. 라는 말씀과 49일 지난 후의 부처님은 이제 무엇을 하셨나요? 라는 질문에 사람들을 만나러 전법을 떠났을 거라는 대답에 건너뛰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수하고 똥, 오줌을 누시며 양치하셨어요. 일상을 허투루 하지 않는 모습을 상기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걸친 옷을 보시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죽어가면서도 선한 일을 하고 줄 것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의 진리에 대한 열망과 선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증여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보잘 것 없고 아는 것이 없고, 부족하다는 생각을 바꾸기 어려웠습니다. 그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진리에 대한 열망과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증여라면 당장 해야 할 일 인것 같습니다. 저도 함께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 무아 이것이 지혜라면 거기서 일어나는 존재의 해방감이 자비일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와 자비를 내면에서 일깨워낼 때 우리는 더 이상의 어리석음으로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윤회를 하지 않을거라고 하셨습니다. 수많은 고통을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전쟁과 같은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을 멈추었을 때 이것이 해탈이고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리석음과 고통을 멈추는 것! 격정에 휩싸이지 않으면서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서 이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때 원리를 통찰하게 된다고 하셨지요. 아주 세밀하게 어떻게 연결되는지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후기를 쓰다보니 기다리던 수업을 신청했던 처음이 떠올랐습니다. 일단 신청하고 나서 다시 살펴본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의 첫 학기 수업이 붓다의 생애여서 흥미로웠고 떨렸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불교에 입문한 뒤 어느 법문에서 부처님은 혁명가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무척이나 큰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제게 혁명가는 피 흘리며 싸워 쟁취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로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궁금함이 생겨났고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혁명가에 대한 저의 선입견과 편견이 떨어져 나간 경험과 그 분의 삶을 통해 거친 번뇌들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레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원리가 세밀하게 어떻게 연결되는 찾으려면 역시 밀도 있게 취미생활 하듯이공부해야겠습니다.

 

3교시 동의보감과 시대- 조선의약생활사174-411

 

이문건의 <묵재일기> 조선시대최고의 의약생활사를 중심으로 세미나를 하였습니다. 처음 이 책을 받아들고 책의 두께에서 압도당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책을 펼쳐보고 더 캄캄하였습니다. 마치 논문 한 편이랄까 연구서를 읽는 듯한 느낌이었지요. 그러나 얼마 못가서 저자의 논문은 아니라...”는 말씀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어색함과 멀리하려는 감정들이 처음 대하는 모든 사물에서 느끼는 감정인 듯 했습니다. 이 책과 친해지는 방법은 자주 보고 읽고 하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발제를 담당하신 선생님들 덕분으로 세미나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이문건이 일기를 자세하게 적었던 이유를 알고자 하는 과정에서 이문건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이문건의 필력과 태어날 때부터의 남다른 기질(?), 병에 대한 탐구심,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던 스승 조광조의 시체를 거둔 그의 용기와 유배를 갔을 때 비전을 가진 이들의 성향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살피었습니다.

저는 어린손자의 성장과정을 적으며 울고 웃고 했을 할아버지로써의 이문건이 인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낳고 잃는 과정에서 그가 느꼈을 비통함과 애잔함이 느껴지기도 했지요.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던 아들의 자식을 혹시라도 잃게 될까 염려하는 마음도 느껴지고 그래서 더욱 아이의 성장에 집착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덕분에 어쩌면 우리는 당시의 아이들이 성장과정에 겪었을 육체적 고통에 대한 것과 병증에 대한 처방까지 상세하게 알게 된 것에 고마움을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이문건의 입장에서는 노비는 재산이었고 관리 차원에서 그들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었다고 해도 그의 가족과 친척 그리고 집안의 노비에 대한 처벌이 무자비하게 생각도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체벌에 대한 많은 의견이 오고 갔습니다.

그렇지만 사견(私見)이 아닌 당시의 시대 구조적 상황에서 그것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성승현 선생님의 말씀에 공감이 되었습니다. 제도나 시대적 상황이 계속 변화하는 상황에서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주제는 할고였는데요. ‘할고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아픈 사람을 봉양하는 것입니다. <묵재일기>에서는 이문건의 손녀인 숙희가 15세의 나이에 위독한 할머니의 병을 고치려 할고를 합니다. 이외에도 삼국사기에 왕이나 최고 권력자들의 병증은 실려도 보통사람들이 병에 걸렸을 때는 관심이 없는데 딱 한 가지 효에 관한 덕목을 칭찬하고자 1건을 싣습니다. 그것이 향덕의 할고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존재에 대하여 나와 다르지 않음을 느끼며 생명을 살리려는 연민의 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행위가 나라에서 권장하듯이 하거나 제도로 된다면 왜곡되거나 하는 부분들이 있다는 말씀이 오고 갔습니다. 의학 드라마에서 보았던 어떤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장기를(?) 이식하는데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 네가 해야한다며 만약 하지 않는다면 불효를 하는 것과 같은 암묵적으로 강요를 하는 모습에 씁쓸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드라마여서 앞, 뒤 상황이 불분명하게 극적인 효과만을 노렸지만 마땅히, 반드시라는 명목으로 관습적으로 강요되는 행위들은 불편함을 만들게 하는 조건인 듯 했습니다.

오래 전 부터 온갖 약을 써서 듣지 않는 병에 대해서는 점술과 무속신앙과 기도에 의지하며 치료를 하는데 이와 같은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와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부분에 관하여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칠 시간을 넘기며 활발하게 논의될 수 있도록 풍부한 질문거리와 함께 발제를 해오신 선생님들 덕분에 즐겁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댓글목록

김은진님의 댓글

김은진 작성일

취미생활하듯이 공부해야겠다는 마음가짐! 저도 뒤따라가보렵니다. (총총) 반야수 선생님과 공부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어 너무 좋습니다. 귀한 후기 감사합니다. :)

안성옥님의 댓글

안성옥 작성일

이렇게 많고 세세한 강의와 토론이 오고 갔었군요  다시한번 수업에 참여하는듯 세심한 묘사와 마음글 쏙쏙 들어옵니다. 따듯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저의 후기순서가 두려워 집니다.

신미숙님의 댓글

신미숙 작성일

같은 얘기를 들어도 이해와 이에대한 의견의 깊이가 얼마나 다양한지 알 수 있는 후기였습니다. 저도 앞으로 더 나아지길 바라며 ㅠㅠ..

나경님의 댓글

나경 작성일

우주는 우리가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연결시켜준다. 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든 것이든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그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주희님의 댓글

주희 작성일

우와~ 세세하게 후기를 정리해주셔서 덕분에 지난 시간 내용을 천천히 복습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고통에 대해 사유하는 건, 괴로운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모든 존재의 고통에 대해 사유할 때,
연결감을 느끼면서 무한한 지복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ㅎㅎ
후기 감사합니다!

김민정님의 댓글

김민정 작성일

쌤 덕분에 지난주 수업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볼 수 있었네요.쌤의 생각도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영희님의 댓글

조영희 작성일

샘의 생각까지 이렇게 글로 써 주셔서 더 넓은 시각으로 수업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 수업을 이렇게 한 눈에 꼼꼼히 복습할 수 있게 정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님의 댓글

나무 작성일

강의를 들을 때 내용을 기억하려 쥐려하면 오히려 들은 것도 달아나더라고요. 흐름이 깨진달까요... 이렇게 자세히 강의 내용을 후기로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진석님의 댓글

강진석 작성일

후기 잘 보았습니다. 이번 후기를 읽고 자세하게 듣지 못한 것을 반성하게 되며 이러한 자극이 책을 한번 더 보게 하고 삶에도 무엇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생각하게 합니다.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