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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석한 글쓰기 존재론 - by 채운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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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생각통 작성일13-05-17 21:12 조회3,257회 댓글2건

본문

“글을 왜 쓰나요?” 1학기 때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이었습니다. 이유는 가지각색이었는데요, 어떤 측면에서는 비슷했던 것도 같습니다. 저의 경우, 이번 에세이 발표 시간은 실로 남달랐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남의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거구요. 두 번째 이유는 근대화된(만들어진) 저의 욕망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심신이 피곤하여 죽을 것 같았지만, 그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즐겁기까지 했습니다. (^^) 에세이 발표가 끝날 무렵에는 ‘나는 이번에도 헛방을 놓았구나’하는 깨달음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제 1학기 끝났잖아요.(라고 한다면 혼날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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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글쓰기 존재론에 대한 강의는 계속된다는 겁니다. 이번 채운 선생님의 강의 역시 제겐 그런 의미였는데요. 많은 부분이 흥미로웠지만, 아무래도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글쓰기를 위해선 책 읽는 행위가 전제될 수밖에 없을텐데요.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책읽기와 글쓰기
책을 읽었는데, 그 모든 내용에 “맞아! 내 말이!”라고 동의가 된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각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장치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책 읽기란 무척 허망하지요. 어떤 측면에서는 제대로 책을 읽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일례로, 카프카는 독서를 했을 때 도끼로 뒤통수를 내려치는 듯한 충격을 받지 못한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까지 했습니다. 어떤 개념을 품는다는 것은 내 안에 이물질이 난입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요. 그렇다면 나의 익숙한 개념과 전투가 일어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힘들지 않다면 익숙한 자기 논리, 즉 암 덩어리를 키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개념과의 전투가 벌어져야 또 다른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그 다른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가 되겠네요.
 
같은 맥락에서, ‘발제문’과 ‘듣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채운샘이 강의 중 직접 겪은 일을 예로 들었는데요. 발제문을 듣고 질문을 하라고 하면 그때 다시 읽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발제문을 작성한 사람이 글을 읽을 때 ‘질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듣지 않았다는 거라고 하셨는데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저는 마음세미나 때부터 발제문과 에세이를 접했는데, 전혀 들리지 않아 고생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논리를 지키기 위해 귀를 틀어막았다고밖에는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1학기 에세이 발표 때 ‘들리기’ 시작했다는 그 경험이 제겐 꽤나 의미심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신파적 질문이 남발되는 것이 문제로 남아있기 합니다;;) 누군가 발표를 할 때, 질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 다른 이의 세계를 받아들일 때의 전투력을 상실한 셈이죠.
 
책읽기와 글쓰기의 태도
글을 읽는 바람직한(?)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글을 읽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책을 접했을 때 스폰지처럼 흡수하겠죠? 사람들이 7~80년대에는 맑스에, 90년대에는 푸코와 들뢰즈에 열광했던 것은 현실적인 문제와 닿아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겐 그렇게 절실한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만들어낼 수도 없고 말이죠. 그래서 바로 성실성이라는 태도가 등장합니다. 이해가 될 때까지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능력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10번을 혹은 100번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그만큼의 노력을 기울일테니까요.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가수 조용필은 좋은 사례가 됩니다. 환갑을 넘은 나이에 아이돌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는 것 말고 놀라운 게 또 있습니다. 바로 그의 창법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죠. 세월을 이겨낸 목소리의 비결은 바로 연습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노력해야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매일 3시간씩 연습을 한 것이 아닐까요? 책 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는 두 번째 읽을 때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면 무조건 다시 읽어야 합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도 핑계이며, 내 수준을 탓하는 것도 핑계입니다.
 
이옥이 남긴 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조선 후기 정조 때의 문인이었던 이옥은 <묵취향서>라는 글에서 책읽기를 술에 취하는 것에 비유합니다. “크게 취해서 취함이 극에 달한 자는 반드시 토하게 되는 것이니. (중략) 그런데 나는 술에 있어서 취하면 토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이 글을 읽고서 이것을 지은 것은 또한 내가 취하여 토한 것이다” 글에 취하면 토하듯이 글을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옥은 글을 억지로 쓴 것이 아니었고, 벼슬을 얻기 위해 쓴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취한 것입니다. 이옥처럼 누군가가 나를 빌어서 쓰는 것, 그것이 바로 글쓰기입니다. 나는 과연 취하도록 글을 읽은 적이 있었나, 토가 나올 것처럼 목구멍에 말들이 가득했던 적이 있었나, 반성하게 되는 대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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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운 선생님께서는 보통 강의를 시작할 때, 전 강의에 대한 <5분 미니 강의>를 주문한다고 합니다. 5분 동안 제대로 말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고 하셨는데요. 하지만, 5분 동안의 강의를 위해 이전 강의를 곱씹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거란 생각이 들어 정리를 한번 해 봤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남긴 팁 하나를 전달하며 마칩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매번 떠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러기 위해서 비판적 독서로는 어림도 없구요, 젖어드는 독서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만일, ‘니체’를 읽었다면 니체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구성해보고! ‘루쉰’을 읽었다면 루쉰의 언어를 삶을 구성해보는 것이 좋은 연습이 될 거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이누이트족에게 고래가 와 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문득 누군가 다가올 테니까요.
댓글목록

햇살사랑님의 댓글

햇살사랑 작성일

글을 읽다보니 "생각통" 분이 누구일까?  궁금해졌어요.^^  너무 감사합니다.
다시금 강의 내용을 새길 수 있어서 힘이 납니다.

생각통님의 댓글

생각통 댓글의 댓글 작성일

그렇게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 햇살사랑님이 누구신지 저도 궁금한데요~ 하하! 열공하고 다음주에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