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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수업후기 <무정> 이광수 - 문성환샘 강의 5/23 B반-안은숙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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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화노인 작성일13-05-25 09:27 조회3,41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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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 B반 <무정> 이광수 - 문성환샘 강의
-조별 씨앗 문장 검사 및 암송
이광수라는 작가는 특별하다. -한국 근대문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 같다. 있는 동안 무시할 수 없는, 그래서 만지면 덧나는 사람( 돌이켜 보거나 건드리게 만드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무정⌟이라는 작품은 현대 문학에서는 고전이다.
우리가 문학이란 이름으로 말하는 이광수, 우리가 ⌜무정⌟이란 이름으로 말하는 ⌜무정⌟을 제대로 실감을 갖고 이야기 하는가?
“실감”
한국 근대문학이라는 말들이 갖고 있는 실감은 굉장히 다르다.
이광수는 1892년에 홍명희는1888년에,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났다.
이들의 공통점은 도쿄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광수는 유학에서 돌아와 신문관(당시 최고의 문화 선두 그룹)에서 필지 작업을 했다. 셋이서 굉장히 끈끈한 사이였다.
최남선은 서울 한양의 중인 계급(아버지는 관상감 일을 했고 한약 약재상을 하며 부를 독점했다) 3명중 가장 부유했다. 15살에 최초의 조선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갔다. 50명중 최연소였으며 일본어를 가장 잘했다. 그러나 유학 생활은 3개월도 채 안되었다. 이유는 동료 유학생들의 잔심부름과 불건전한 행동의 처리사(통역) 일을 맡아 해 더 이상의 이런 생활에 모멸감을 느꼈던 것이다. 돌아온 1년 후 다시 일본 와세다 역사지리과로 유학을 간다. 이때는 완전 자비로 갔다. 당시 러일 전쟁 중이었다. 그러나 이 유학 생활도 3개월을 못 넘긴다. 일본 대학 축제 때 법정대학 현수막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은 조선 왕 외조에 관한 건이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인데 조선 왕이 일본에 오면 왕의 대우를 해 줄 것인가? 식민지에 맞는 대우를 해 줄 것인가?를 놓고 벌인 일본 학생들의 토론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 유학생들은 데모를 하였고 결과는 이 사안만 취소시키고 보따리를 싸야만 했다.
1908년 귀국 후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 겸 출판사인 신문관을 만들었다. 11월에 <소년>이라는 잡지에 ⌜해에게서 소년에게⌟ 최초의 근대시가 실렸다.(신체시) 이 시는 조선 역사상 문명이 바다로부터 온다는 것을 말해 주었고 이런 방식은 새로운 시대적 패러다임의 통찰이었다. 이런 대단한 작품을 당시 6명만이 사서 보았다.
우리는 엄청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최남선은 도쿄 수영소의 최신식 활자 인쇄기를 들여온다. 이 최신식 인쇄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도 같이 데려온다. 이것은 당시 조선 외무부의 1년 예산보다 많은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고 오직 그 사람의 작품으로만 남아 있다.(최초의 근대시, 신체시라는 말로 말이다)
우리가 문학이라는 것을 책상에 앉아서 시, 소설, 희곡, 수필등 감상적인 작품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문학은 경험을 총체적으로 대변하고 있던 작품 중의 하나였다. 이런 실감들을 느끼지 않으면 오늘날 아침 드라마를 보면서 조마조마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홍명희는 계급적으로 양반이며 가장 계급적 특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다. 후에는 사회주의로
최남선은 중인이지만 부유했다. 전근대 시기의 과도기에 있었던 사람이다. 후에 학자, 대학교수로
이광수는 고아이면서 근대에서 밀쳐진 사람이다 후에 근대 문인으로
이 세 명과 신채호를 합해 놓으면 최소한 한국 근대 문학이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고민을 했는지 볼 수 있다.
이광수가 최남선을 보았을 때 나이 차이는 2살씩 나지만 세대 감각들은 한 세대가 차이 났다고 보았다.
이광수는 1917년 와세다 대학 철학과 1년생, 26세 때 매일 신보에 ⌜무정⌟이 6개월간 1면에 연재 되었다. 이로써 이광수는 조선 계몽주의로 우뚝 섰다.
6개월간 신문 1면에 쓴 엄청난 분량을 쉬지 않고 국문으로 연재했다는 건 엄청난 필력이다. 이광수의 ⌜무정⌟은 초판을 1000부 찍었다. 당시 초판 1000부는 엄청난 것이었다. (참고로 문샘은 2000부를 찍었지만 아직도 다 팔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1년 정도 지나면 만부가 팔렸다고 최남선의 <창조>에 실려 있다.
이 실감을 갖지 않고 한국 근대문학을 얘기 한다는 것은 반칙이다.
우리가 오늘날 ‘문학’하면 떠올리는 단행본의 생각은 그 당시에는 없었다. 당시는 연재, 기고, 잡지에 실렸던 것, 하나의 소식란으로 매일 접했던 것이다. 그래서 책으로만 엮인 단행본은 새로운 것이었다.
등장인물의 관계도 분석 등은 문학에서 아주 작은 영통 접하는 것이니 그 실감을 느끼는 차원을 알아보는 자리에서 한국 근대 문학은 시작 되어야 한다.
국문으로 이정도로 형상화 한 작품을 당시 사람들은 만나보질 못했다.- 굉장한 인기가 있었다.
근대 문학이란 Nation, 국가의, 민족의 문학이다.
1984년 갑오경장, 홍범 14조에는 한문, 국한문, 국문을 공식 문장으로 인정한다.
비로소 국문 글쓰기라는 생각들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국한문, 국문을 쓸 줄 몰랐다. ‘흥부가’이지 ‘흥부전’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대본으로 갖고 있지 활자가 아니었다.
신문, 잡지에서 문장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1896년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순국문으로 발행했다. 주시경도 있었다. 이런 실험들이 10년 정도 걸쳐서 비로소 ⌜혈의누⌟(이인직)가 나왔다.- 생동감 넘치는 문장, 시간적 배경이 동시 작품으로
사건이 나와 동시대적으로 교린하게 된다.
우리는 민족과 국가라는 경계의 감각만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당시 가람들은 지금 자신들이 놓여 있는 시간 위에서 실험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훨씬 다이나믹 했다. 글이 갖고 있는 투박함, 원초성을 갖고 있다.
이광수의 ⌜무정⌟은 향후 한국 문학의 판도를 바꾸는 정리문 이었다.
신소설은 연극, 삽화에 의존하게 된다. 거꾸로 본다면 작품이 홀로서기가 안 되는 것이다. 즉 작품이 형상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글만으로 안 되니 글속에 삽화를 넣고, 또는 연극화했던 것이다.
⌜무정⌟이 등장하면서 10년 동안 삽화가 등장하던 신문에 삽화가 사라졌다. 오직 글로만 승부했다. 이전에 ‘독립신문’ ‘혈의누’가 등장했던 것에서 또 다른 것이 등장한 것이다.
⌜무정⌟의 첫 장면은 불멸의 장면이다. 지금 글을 읽고 있는 동시대의 시간적 배경을 갖고 있다.
<살펴보면> 근대적 시간- 오후 2시, 4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김장로 집, 3시
짧은 문장 안에 근대적 시간으로 들어와 있는 인물이 있다. 지금까지는 이런 구성은 없었다. 경성학교, 달라진 교육제도, 교과목이 들어 왔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현장화해서 작품에 넣었다.
‘-었다’, ‘-했다’의 과거형 종결 어미는 지난 20년 동안의 문장 실험 결과였다. (1896년 독립신문에는 ‘-하더라’로 쓰여졌다.)
이광수는 ‘그’라는 3인칭 대명사를 사용했다. 이 말은 근대이후 만들어진, 그 전에 인칭대명사라는 것은 없었다.(이광수를 라이벌로 의식한 김동인)
결정적으로 모든 모던한 내용들을 흡수 하면서 모든 소설을 애정 소설로 썼다는 것이 이광수 소설의 인기 비결이었다.
⌜무정⌟에는 삼각형 구도, 가난하지만 능력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공식이 있다.
이형식
장미빛 미래 보장 도덕적 명분 감당(과거의 세계)
욕망 선영 박영채 의리
이형식의 갈등처럼 보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욕망의 세계에 완승담이다.- 이것이 이광수의 특징이기도 하고 한국 근대 문학의 암울한 상징이기도 하다.
이광수는 지향하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욕망이다. -가진자들(홍명희, 최남선)과는 달랐다. 자수성가형 사람이며 도의적인 책임은 있으되 빚진 것은 없다. 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그렇게 노골적일 수 없었다. 이것이 이광수 소설의 특징이다. 이후에는 점점 현실을 초월하게 된다. 1919년 2월 8일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여 발표하고 1937~1941년 수양동우회 사건을 이어 변절하는 이광수는 그의 소설속의 주인공은 점점 현실을 초월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이광수는 현실 초월을 하지 못한다. 반일 행각(창씨개명: 香山光郞 향산광랑, 가야마 미츠로)을 했다.
우리는 한국 근대사를 볼 때 식민지 시기의 시대이기 때문에 단지 두 가지로 걸러낸다.(친일/반일) 그러나 오욕의 역사까지 들어와야 근대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그 현장들이 굴절, 역설, 왜곡 된 것이 우리의 근대이다. 이 경험은 우리 밖에 없다. 계보적 접근은 가짜다. 폐허, 백조, 장미촌든 같은 시기에 왔다. 수양동우회 사건 때 이광수의 창씨개명이 변절 아니면 60여명의 동료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도 우리는 또 다른 물음이 있어야 한다.
근대 작품을 읽을 때 다른 시각으로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광수에게는 가면이 없었다. 어떤 이유이었건 그에게는 그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길이었지 않았을까?
친일파이냐 아니냐만 말할 수 없다. 이렇게만 말한다면 지금 우리의 좁은 역사관의 편견이 아닐까?
다른 문학 작품을 읽을 때도 관계의 맥락들에서 자기 성찰을 하면서 보아야 한다.
rd 다음 주 과제
- 나비와 전사 ½ 읽고 씨앗문장 쓰고 암송
- ⌜홍루몽⌟ (3권) 열심히 읽기
댓글목록

문리스님의 댓글

문리스 작성일

헉. 목성의 후기는 촘촘하군요.  제가 제 강의를 듣는 느낌...? ^^

양파님의 댓글

양파 작성일

안은숙샘, 매번 놀랍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정리를 잘하시는지요. 덕분에 수업 한번 더 듣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