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 3학기 8주차 정화스님 <화엄경> 강의 후기 >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목성.png

목성 3학기 8주차 정화스님 <화엄경> 강의 후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모긴 작성일23-09-18 20:45 조회49회 댓글0건

본문

정화스님의 화엄경 강의는 역시나 해박한 생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그 많은 정보를 따라가기는 벅차고, 무엇보다 나는 후기를 쓰기 위해 몇 시간에 걸쳐 받아적은 한글파일을 실수로 지워버렸다ㅠㅠ 물론 다른 때라면 울면서라도 다시 받아쓰기를 해야겠지만 이번주에는 에세이를 써야해서 시간이 없다. 진짜다. 이렇게 되면 그냥 철판깔고 정화스님 얘기 중 내가 딱 이해하는 정도만 쓰고 사라지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정화스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우리 몸의 DNA에는 138억살된 수소, 40억년 지구에서 생긴 생물의 유전자 정보가 남아있다. 일중일체(一中一切), 즉 하나 속에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이 문자 그대로 사실인 것이다. 우리 몸을 형성하고 있는 물질은 지구의 어떤 다른 생명체의 물질과 거의 같다. 생쥐와 인간의 DNA95%가 일치하고 오직 그 5%의 유전자 중 변이를 일으켜 바퀴벌레도 생쥐도 인간도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생명체의 차이를 만드는 유전자는 그 유전자 자체가 의해서가 아니라 조합의 상이함에 따라 완전히 달라보이는 생명체를 구성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한번 만들어진 생명체가 최초의 구성된 조합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상즉상입(相卽相入), 각 생명체의 유전자들은 다른 생명체들과 끊임없이 유전자를 주고받는다. 유전자 뿐 아니라 아예 우리 몸 자체가 수많은 미생물들의 집이다. 우울증의 원인도 특정 미생물의 결핍에서 온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쯤되면 과연 미생물이 우리를 조정하는 것인지, 우리가 미생물을 조정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이렇듯 나는 수많은 생명들과 연계되어 있는 커다란 그물 속의 한 점이다. 내가 나로 단독으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과 누구와 관계맺는가에 따라 드러나는 연기적 존재다. 그러므로 참나의 개념을 비롯하여 변치않는 궁극의 나를 찾는 작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의 존재를 찾고 그것을 지속시키고자 노력한다. 

우리의 마음이란 이렇게 연기에 의해 우연적이고 찰나적으로 구성된 나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힘에 의해 나타났다. 기억은 과거를 붙잡고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고자 있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기준으로 미래의 내 존재를 예비하기 위함이다. 멍게는 일단 살 자리를 찾으면 뇌를 녹여없앤다고 한다. 더 이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어지면 에너지소모가 많은 뇌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도 일단 사고의 패턴이 정해지면 마찬가지로 생각을 하지 않고 기존의 습관에 기대어 욕망을 필터로, 자동화된 듯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얘기를 나눠도 결국 자기의 패턴대로만 얘기를 하는, 상호이해는 바라기 어려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고의 패턴을 깨는 공부를 하지 않고, 그 패턴을 강화시키는 공부만을 습관적으로 반복한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업이란 이렇게 활동을 하는 한 계속적으로 생겨나는 생명활동의 습관이자 의식 이전의 작동방식이다. 행동은 자취를 남기고 기억을 남기기 때문이다. 기억이 생기면 향후의 행동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기억에 남고 그것은 생각의 지도를 만들며 다시 그에 따라 움직이는 행동의 지속적 패턴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중에 어느 하나를 의식해서 습관이라는 패턴을 깨닫는 것이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이유다. 무의식적 습관을 인식하고 나서 의식적으로 바꿔보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면 신경세포망의 구성이 달라지면서 행동의 변화를 꾀할 수 있다. DNA가 동일해도 그 작용양상이 달라질 수 있는 방식은 결국 새로운 행동패턴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환경조건을 조율하는 것이다. 책을 읽기 싫다면 책을 읽을 수밖에 없거나 책을 읽는 것이 즐거워질 수 있는 새로운 환경 속으로 자신의 일상을 옮겨보는 것 등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소위 이라고 하면 굉장히 굳건하게 축적된 잘못이나 죄업 등, 마음 무겁게만 생각했다. 그동안 남몰래 한 부끄러운 짓들이 몽땅 떠오르면서 이불킥을 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이기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행동하는 것 자체가 업이라고 하니, 일단 사는 한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일이구나 내려놔지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집착을 만드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중에 이불킥 하는 숫자는 조금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