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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목성 / 1학기 2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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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윤 작성일24-02-28 11:28 조회177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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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목성 2주 차 후기를 쓰게 된 2조 김기윤입니다.


이날은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녹아 슬러시처럼 변해서 깨봉으로 오르는 언덕을 오르기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깨봉까지 오시기 위해 먼 길을 나선 선생님들도 계셨을 텐데, 다들 무사히 도착하셔서 무탈하게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주역계사 강의>와 <청년 붓다> 낭송 후 1교시, 곰샘의 불교 강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요즘 목성에서 곰샘이 해주시는 불교 강의를 무척이나 재미있게 듣고 있습니다. 곰샘의 말씀에서 아주 편안하면서도 파토스가 느껴지고, 중간중간 던지시는 유머에 다들 한바탕 소리 내어 웃으니, 가만히 앉아 듣고만 있어도 즐겁습니다.


이번 주에는 부처님 생애 중, 유년기 - 출가를 중심으로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출가하시기 전, 싯다르타라는 이름의 왕자였습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12세 때 한 해의 농사가 잘 되길 기원하는 행사인 친경제에 참여하여 모든 생명들이 얽혀 있는 고통의 사슬을 관찰합니다. 빼빼 마른 농부는 이미 지쳐 숨을 헐떡이는 소에게 계속 일하라며 채찍질을 해댑니다. 쟁기가 지나간 자리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고, 그 벌레를 새가 날아와 낚아 채 갑니다. 모든 생명이 괴로움 겪고 있습니다. 노동에서 벗어나 향락을 즐기고 있는 왕족들은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있을까요? 태자의 눈에는 그들 역시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그들의 부와 향락은 농부와 시민들이 뼈 빠지게 일해서 바친 세금으로 유지될 수 있었고, 이 부를 지키기 위해선 성벽을 쌓고, 군대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무언가에 의존하는 행복은 그것이 사라질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야기합니다. 하물며 타인의 희생을 통해 얻는 행복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결국 모두가 괴롭습니다. 

  태자는 이때 관찰한 모든 생명의 고통에 연민을 느낍니다. ‘왜 다들 이렇게 아픈 것인가?’, ‘이 고통의 사슬을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가 태자가 친경제 행사에서 던진 질문입니다. 태자는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잠기고, 괴로움을 겪는 생명에 대한 깊은 공감을 합니다. 이윽고 자아가 해체되며 진정한 행복을 느낍니다. 이때의 경험이 태자의 출가에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바로 고통받는 생명들에 대한 교감에서 시작된 태자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왜 괴로움을 전전하고 있는 걸까요? 곰샘께서 교감에 대한 예시로 친경제 때의 채찍 맞는 소에 대한 태자의 공감 능력과, 멋진 자연 풍경이 담긴 사진을 SNS에 올릴 때 그 풍경을 만들었을 무수한 생명들의 고군분투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씀이 제게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위와 같은 예시들을 듣고 있자니 ‘교감의 핵심이 고통인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통을 키워드로 타인과 교감하려 하니 뭔가 마음이 묵직해졌습니다만, 곰샘의 답변으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곰샘께서는 모든 생명은 행복은 추구하지만 그 행복을 얻고자 하는 행위들에서 고통이 야기되는 것이라고 하셨고, 부처님께서도 이들이 행복하길 바랐다고 하셨습니다. 즉 핵심은 행복이었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혹은 이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행위들을 합니다. 그것이 괴로움을 불러오지요, 술을 마시는 것도, 결혼을 하거나, 돈을 벌고 집을 사려는 것도 그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곰샘께서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깨달을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깨닫고, 보리심을 갖게 되면 그동안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다고 생각되는(?) 감각적 쾌락과 욕망들을 더 이상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결국 우리는 감각적 쾌락과 욕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1교시가 마친 후 조별 토론에서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중 제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 몇 개만 소개하겠습니다.


‘질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저희 조에서 나눴던 이야기 중에, 내가 생각하던 어떤 삶 혹은 기준에 어긋나는 상황에 부딪쳤을 때 떠오르는 것이 질문인 것 같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흔히 질문이라고 하면 ‘너는 무슨 색깔을 좋아하니?’, ‘너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니?’ 등 바깥의 대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을 떠올리기 쉬운데,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가진 전제들이 흔들리거나 균열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때가 비로소 내가 변화하는 시점이고, 질문을 통해 다른 세계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번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위의 이야기와도 이어지는데요, 강수영 샘께서는 그동안 ‘깨달음’하면 번뇌가 없는 평온한 이미지가 그려지기에 번뇌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가 흔들릴 때 번뇌가 생기고, 그때 비로소 나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렇다면 번뇌를 빨리 제거하려고 하는 마음은 내가 깨달을까 봐 걱정하는 욕망에서 나온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셨다고 합니다. 뒤이어 ‘내가 정말 부처님처럼 살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해봐야겠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깨닫고 싶고, 부처님처럼 살고 싶은 걸까요? 식욕, 성욕, 탐욕 등 많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놓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수영샘 말씀대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정말로 깨닫고 싶은지?’일 것 같습니다.

 

 

2교시에는 주란샘의 계사전 강의가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는 주란 샘께서 <주역계사 강의>의 3장~7장을 풀어주셨는데요, 

3장의 무구자, 선보과야 无咎者, 善補過也에서 ‘선善’이 능숙하게 함을 의미한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 구절의 뜻은 ‘결함이 없다는 것은 허물을 잘 보완하는 것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무구’는 계사전에서 강조하는 이로운 가치 중 하나입니다. 

동양에서는 좋음 속에 나쁨, 즉 길 속에 흉이 있다고 봅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번 만큼 누군가는 적게 벌 것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그것을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슬플 것입니다. 그러나 무구, 즉 허물이 없는 것은 위와 같은 길흉의 상황에서 남는 찌꺼기, 허물, 번뇌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므로 가장 적절한(?) 상태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무구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선 입니다. <주역계사 강의>의 남회근 선생님께서는 무구란, 저절로 과오나 허물이 사라지는 상태가 아닌, 허물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 즉, 능숙함이란 처음부터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과오나 미숙한 지점을 계속 보완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 좋은 결과물인 것 같습니다.

결함이 생겼다면 그것을 무구하게 만들면 그만입니다. 다음에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 곧 결함을 줄여나가는 방향의 첫걸음일 것이고, 능숙해지는 길 = 선해지는 길 일 것입니다. 

 그러나 남에게만 좋다면 내 몸과 정신이 축날 것이고, 나에게만 좋다면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원성을 살 것입니다. 허물을 없애는 것이 ‘선함’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세상과 나의 관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댓글목록

바둑인문학자님의 댓글

바둑인문학자 작성일

우리는 누구나 타고난 본성과 에너지가 있죠. 그 에너지를 감각적 쾌락에 쓸것인가, 타인과 공감하고 세상을 살리는데 쓸것인가 선택에 매순간 마주합니다. 부처님처럼 억만겁보시의 내공을 갖추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생각을 바꾸고, 쾌락을 멀리하기는 쉽지 않겠죠. 그래서 조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가장 지키기 쉬운 것부터 해나가는 것이죠. 가령, 일회용 나무젓가락 대신 쇠젓가락을 써서 쓰레기를 줄이겠다, 종이컵보다 개인컵을 써야겠다 등등 
우리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조금씩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라다크님의 댓글

라다크 작성일

번뇌가 생길때 나를 돌아보게 되고 나의 탐진치 삼독을 깨닫게 됩니다.
감정에서 빠져나와 그것들을 바라볼 수 있으려면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겠지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깨트린님의 댓글

깨트린 작성일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정말로 깨닫고 싶은지?’일 것 같다는 수영샘의 말씀이 참 많이 와 닿습니다. 조모임에서 나온 얘기도 함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써니홍님의 댓글

써니홍 작성일

우리는 감각적 쾌락과 욕망을 자제하고 허물이 없도록 선으로 나아가는 노력을 하고자 공부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렵지만 꾸준히 하다보면 나름대로 지혜와 교감이 생기리라 믿습니다.^^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도깨비님의 댓글

도깨비 작성일

돌아서면 잊어버리게 되는데, 이렇게 정리한 글을 보니 새삼스럽네요.  "우리의 가치가 흔들릴 때 번뇌가 생기고, 그때 비로소 나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대목에서 생각이 많아집니다. 기존의 생각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지만, 기존의 생각이 틀리거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그렇게 의문을 가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을 때 바로 그 지점, 나와 어떻게 다른지, 왜 다른지를 자꾸 생각해 보는 것부터 해야겠네요.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자기 존재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게 되겠지요. 후기 감사해요.

김민정님의 댓글

김민정 작성일

건강을 위해 체중을 좀 줄이라 권고를 듣고 '그러자!' 결심했을 때도 그런 것 같아요. 분명 그렇게 하는 게 맞다 생각하고, 그러자고 마음도 먹었고, 건강하고 가벼운 몸을 가지고 싶은 것도 맞는데... 그건 확실한데...  막상 실천하려면 그게 잘 안 되거든요.  그럴 줄 모르고 냉장고에 사다 둔 맛난 음식들도 아깝고, 친구들과 맛난 거 먹자 잡아둔 약속들도 생각나고, 어차피 뺄 거면 조금 더 있다가 독하게 마음 먹고 한꺼번에 빼면 안 될까 싶은 거예요. 붓다처럼 지혜롭고 자유롭고 싶어서 그걸 배우자고 왔는데, 정말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맞는지 내 마음을 잘 돌아봐야겠다 생각이 들었답니다. 멋진 후기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