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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 5주차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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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막여우 작성일24-03-20 19:51 조회1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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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대중지성 5주차 후기입니다.

 

목요일마다 고미숙샘의 불교강의와 김주란샘의 주역, 계사전 강의를 듣고 배우며, 비우고 내려놓는 연습을 하게 되는 지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때론 웃음이 왁자하고 때론 심각해지고 그러면서도 평온함이 함께 해서 강의가 끝나고 나면 어느새 벌써 끝이야합니다. 단지 스승님들의 의도 있는열정적인 강의에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열심히 듣고 배우는 것으로 부응하겠습니다.

 

1교시 불교강의

   5주차 고미숙샘의 불교강의는 붓다 깨달음의 그 순간과 내용으로 삼명통과 중도, 12연기법이었습니다. 곰샘께서는 불교 개념 공부의 집중력에 대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생애가 주는 의미를 충분히 음미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 대한 개념을 자신이 이해한 만큼 내려놓고 비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 중도 >

   중도는 대표적으로 고락 중도와 유무 중도가 있다. 중도라고 하면 고통과 즐거움, 있음과 없음이라는 양극단을 떠나 그 사이 어디쯤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중생들은 그 사이에서 적절함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쪽 강변도 떠나고 저쪽 강변도 떠나고, 그 사이 어디쯤이라는 가운데도 떠나라고 하신다. 상대적 대립관계가 아니라 모순적 대립관계일 때 어느 하나가 존재하면 그 반대편의 어느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있음이 있으면 없음은 없고 없음이 있으면 있음은 없다. 그런데 오롯한 있음이 있나? 오롯한 없음은? 그 가운데는 또 어디인가?

   수타니파타에 양극단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가운데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저 문장대로 한다면 그 무엇도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나를 머물게 하고 존재하게 하는 단단한 땅이 없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먼저 일었다. 항상 무언가에 의지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연기법도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여 생긴다고 했는데 아무것도 의지할 곳이 없다면 어떻게 살지? 하는 생각. 그러다 부처님 법을 조금씩 공부하면서 우주 만물, 세상 만사가 다 무상하게 변하므로 부여잡을 것이 없다는. 사실은 머물 데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이 실상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는 중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머물지 않으면 된다. 의존하지 않으면 된다.

   그래도 그 사이를 뗏목을 타고 흘러 대양으로 흘러간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있음도 떠나고 없음도 떠나고 그 가운데도 떠나야 한다는 것의 그 너머를 사유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곰샘께서는 저 문장이 있음과 없음이라는 전제조건 자체를 떠나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고 창조하는 지점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삶의 전제조건 자체를 다시 사유하고 그 전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신다. 있음이란 언어로 인해 우리는 있음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없음도 마찬가지, 가운데조차도 마찬가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고정성에 의해 착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있음과 없음 그리고 가운데라는 언어에 매여, 끊임없이 변형되고 서로 섞이고 침투하고 그래서 모든 존재들은 매 순간 달라지고 흐르고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연기하는 조건(변화하기 때문에)이어서 오히려 가능한 것은 아닐까. 전혀 다른 우주의 탄생. 초기 승가공동체가 새로운 행복과 만족감을 창안하고 슬픔이 있는 곳에서 슬픔이 없는 곳으로 갔듯이.

 

< 삼명통 >삼명통은 숙제로 샘들께서 공부를 많이 하셨을 것 같아 간략하게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드라마틱한 깨달음의 순간, 열반의 순간이다. 초저녁, 자정 무렵, 새벽녘에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실상을 보시는 눈이 열리셨다.

   먼저 숙명통으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부터 왔는가에 대한, 나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으로 부처님 자신의 이전의 생만 아니라 수천억 겁에 이르는 생의 흐름을 알게 되고 보게 되신다. 일종의 생물학적 연기법으로 부처님 당신의 윤회를 보심으로 생사의 이치를 아시게 되었다. 이 때의 핵심은 당시 수도자들이 진정한 자아를 찾아 법아일여를 추구했는데 부처님은 진정한 자아, 아트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 자아라는 실체가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4대오온이라는 물질과 정신의 집착적 덩어리의 카르마가 윤회한다는 것.

   자정 무렵에 천안통이 열리시고 자신의 윤회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행위와 업보가 패턴이 다르지 않으며, 중생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모두 스스로의 카르마()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짐을 깨달으셨다. 이로써 숙명통과 천안통을 통해 우주 만물의 윤회의 프로세스(연기법)를 알게 되시고.

   새벽녘에 누진통으로 지금까지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구경의 경지를 이루시고, 모든 것을 알게 된 일체지를 얻게 되셨다. 숙명통과 천안통에서 윤회의 인과를 아셨다면 누진통에서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의 괴로움의 소멸과 해탈의 길이 있음을 깨달으셨다. 누진통은 번뇌를 깨뜨리는 것이다. 우주 법계가 무상하므로 라는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오로지 생성, 소멸하는 운동(과정)만이 있다. 생과 사가 없는 경계에서 뗏목을 타고 유영하는 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중도를 깨달으시면서 12세 갯복숭아 나무 아래서 품었던 질문, 어떻게 하면 모든 중생들이 폭력적인 먹이사슬에서 벗어나고 노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으셨다. 사성제(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깨달으심. 연기적 조건에서 벗어나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 12연기 >12연기도 숙제 때문에 많이 공부하셨을 것이라 믿고 ㅎㅎ

12연기가 우리가 윤회하는 시간적 축이라면 삼계 즉 욕계, 색계, 무색계는 공간적인 축에 해당한다.

 

무명 : 밝음이 없음이다. 밝음이 없다는 것은 어둠이고 어둠은 모른다는 것이다. 무엇을 모르는가? 불교적 세계관인 연기           법과 사성제 등을 모르는 것이고, 만물의 상호연관성을 모르기 때문에 자아가 홀로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므로 탐진치의 삼독이 발생하고 괴로움이 생긴다.

행   : 무명에 의해 행하게 되므로 강력한 자아에 근거한 행동이 일어나는 것. 의도와 의지를 갖고 행하는 모든 행위 특히          신 (),(), (마음)의 삼업에 의해 카르마가 생기고 이 카르마에 의해 윤회하게 된다.

식   : 정자와 난자가 결합할 때 식이 결합되고, 정신의 사유구조가 만들어진다. 식은 모든 생명체의 보이지 않는 정보다.

명색 : 명은 이름, 정신작용을 색은 형태, 몸등을 말하고 그에 속하는 기관, 기능, 작용등이며, 안과 밖을 구별하는 작용을          한다.

육처 : 명색으로 연하여 육처가 생기는데 여섯 가지 감각기관, ‘안이비설신의를 말한다. 육처를 통해 세상을 만나게 되고           세계를 의식하고 세계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 육처로 연하여 촉(접촉)이 생기는데 시각적 접촉은 눈에, 소리의 접촉은 귀에, 냄새의 접촉은 코에, 맛의 접촉은 혀            에신체적 접촉은 몸에, 정신적 접촉은 마음에 의해서 조건지어진다.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단계다.

; 촉에서 6가지 감각 기관에 의해 접촉된 것에 대한 느낌으로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이 있다. 느낌이라는 작용만 있지 느낌의 작용에 대한 관찰이 없는 상태, 인위적이지 않은 상태의 느낌.

: 갈애다. 갈애는 느낌에 근거를 두고, 느낌에서 발생하고 느낌으로 인해 증대된다. 욕망이 생기는 단계. 사춘기 때의         자기밖에 모르는 상태의 애착. 자기에게 즐거운 것을 무의식적, 의식적으로 수용, 배제하려 한다. 공격적일 수 있다.

: 갈애에 연하여 생기는 취는 대상을 거머쥐는 정신 상태로 갈애의 정도가 강렬해질 때 그것을 취착이라한다. 이때 자        기 욕망이 체계적으로 형성되면서 세계관이 형성되면서 한 인간의 퍼스낼리티가 결정된다.

: 존재에 대한 욕망, 존재론적 집착이다. 세계는 이미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심과 욕망으로 하여, 감각        기관과 그 접촉의 의지를 통해 비로소 존재한다. 인간의 마음이 의지가 객관세계를 만들고 나아가 내 존재가 영속하        기를 바라는 욕망.

: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오온이 출현하는 것.

노사 : 태어났기에 늙고 죽는다. 늙고 죽는다는 관념은 생에 대한 집착이 낳은, 모든 고통을 만들어내는 본원적 고통이다.

 

*보통 사람의 보편적인 능력 안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으로 열반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지혜가 있으면 저절로 자비심이 생긴다. 출발할 때는 자비심으로 출발한다.

***얻는 것 없이 진리에 헌신하는 마음.

 

 

2교시 주역강의

2교시는 풍전소축, 산천대축, 화천대유 괘를 공부했는데요. 우선 풍천소축괘를 서주희샘과 김기윤샘이, 산천대축괘를 홍선화샘과 고은경샘이, 화천대유괘를 최혜정샘과 김현샘이 렉쳐를 해주셨습니다. 샘들께서 스스로 공부한 내용으로 렉쳐를 해주셔서 신선하고 새로웠습니다. 관심을 갖는 포인트가 샘들 마다 달라서 좋았습니다.

 

   풍천소축, 산천대축, 화천대유 괘는 모두 하괘 즉 내괘가 모두 강건한 ()이 오고 상괘 즉 외괘가 모두 다르다. 풍천소축과 화전대유는 음이 주도하고 산천대축은 양이 주도한다. 힘을 쓰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선 풍천소축을 보면 상괘에 공손함의 의미를 갖고 있는 ()이 온다. 풍괘는 음이 하나인 괘다. 주역의 괘에서 적은 수를 가진 힘(음이냐 양이냐)이 주도한다. 그래서 풍괘의 음인 육사효가 소축괘 전체를 주도하고 이끌어간다. 소축의 때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길들여야 조금 쌓을 수 있는 상황이다. 육사효는 음으로 순종적이고 포용적이니 힘으로 5개의 양을 힘으로는 제압하고 이끌어갈 수 없다. 해서 자신이 가진 공손하게 포용하는 힘으로 다섯 양들을 길들인다. 다섯 양들을 오래도록 길들여서 가득 쌓아 완성에 이른 것을 상전에서는 이의문덕(以懿文德), 글과 덕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 한다. 근데 소축의 때이기 때문에 많이 쌓으면 안 된다. 쌓을 수도 없다.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공부의 양과 질에 만족해야 한다.

   그에 비해 산천대축괘는 양이 양을 길들이는 형세다. 하괘의 강건한 ()을 상괘의 강건하고 멈춤의 의미를 갖고 있는 산인 ()괘가 길들인다. 또 두 개의 음효가 함께 양들을 길들이므로 소축괘의 유약함이 없다. 그래서 양들의 폭력적이고 동물적인 힘을 근원적으로 뿌리 뽑아 제거해서 물질을 쌓는 데만 정신이 팔린 양들을 제압한다. 강한 힘이 강한 것을 길들이니 많이 쌓을 수 있다. 많이 쌓으면 우리는 더 많이 쌓고 소유하려 한다. 하지만 주역은 사람들의 그러한 경향을 늘 경계한다. 주란 샘은 산천대축괘를 사람 안에 우주가 들어온 모양이라고 했다. 멋진 해석이다. 상구효의 하천지구, .하늘의 길이니 형통하다.”라고 한다. 이는 쌓인 것이 재물이든 정신적 자산이든 흩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야 막힘 없이 사통팔달할 수 있게 된다. 소축괘에서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으로 쌓이는 것을 말하기보다 정신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쌓음의 괘다. 상전에 이기축덕(以其畜德)이라고 하며 그 덕을 축적한다고 한다. 산천대축의 쌓음은 얼마나 되어야 할까?^^

   마지막으로 화천대유는 상괘에 밝음, 문명, 불을 상징하는 ()괘가 오고 이괘의 육오효가 다섯 양들을 길들인다. 풍천소축의 육사효는 힘이 미약했지만 화천대유의 육오효는 혼자서도 능히 양들을 제압한다. 지존의 자리에 있으면서 중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고 양의 자리에서 음의 포용하고 수용하는 마음으로 강건한 양들을 길들이니 양들이 기꺼이 따른다. 그럼에도 혹여 양들이 넘볼까봐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주역에서 위치, 즉 지위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대유괘는 하늘 위에 밝은 태양이 있는 형상이다. 하늘의 태양은 자의식 없이 조건 없이 만물에게 골고루 그 빛을 나누어준다. 그래서일 것이다. 대유의 때는 풍족한 소유가 가능하다. 그런데 소유에 대한 우리의 기본 전제를 뒤집는다.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오는 것이다. 상구효의 자천우지, 길무불리. “저절로 하늘이 도와주니, 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를 정이천은 군자는 가득 차도 넘치지 않으니 하늘이 돕는다라고 하고 계사전에서 는 하늘이 돕는 것은 천리를 따랐기 때문이고, 사람이 돕는 것은 신뢰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래 상효의 자리는 극한의 자리로 풍요함의 시기가 지나가야 하는데 대유괘의 상구효는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육오효 군주의 신뢰를 얻고 천리를 따르기 때문에 길하다고 한다. 풍요로운 때에 군자의 마음과 태도에 대해 말해준다.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순리에 따르는 것, 풍요로움은 살림(생생)을 위한 것이라는 것.

 

1교시 내용이 좀 많아 주역은 간략하게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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