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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두번째 강의 -by 채운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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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웅상 작성일13-09-11 01:18 조회3,397회 댓글3건

본문

총균쇠 2번째 강의
 
 
1. 인간의 역사에 대하여
 
지구가 생겨난 것은 45억 년 전, 생명이 출현한 것은 40억 년 전,
그 이후 20억년 동안은 박테리아의 세계였고 20억년이 지난 다음에 겨우 진핵생물이 생기기 시작,
그렇다면 인간의 출현은 45억년의 지구의 역사를 하루라고 친다면 자정을 1분 17초 남겨둔 시각(354쪽)이며
지구 역사에서 인간의 역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파리 에펠탑 맨 꼭대기의 페인트 부스러기 정도이다.
또 달리 표현된 것은 우리가 두 팔을 편 상태를 지구 역사 전체로 본다면,
 
“맥피의 <분지와 산맥>에 따르면 그런 잣대에서 한 손의 손톱 끝에서부터
다른 손의 손목까지가 선캄브리아기에 해당한다. 고등생물은 모두 손바닥 안에서 생겨났고, 
‘인간의 역사는 손툽줄로 손톱을 다듬을 때 떨어져나오는 중간 크기의 손톱 부스러기
 하나에 들어가버린다.”(거의 모든 것의 역사 354쪽)
 
그러므로 생명체 역사의 진정한 비약은 박테리아에서 진핵생물이 출현한 그 시기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생명체는 먹이사슬에 따라 먹고 먹히고 먹고 먹히고 가 반복되는데
그렇다면 먹이사슬의 맨 위의 생명은 먹이사슬의 모든 생명들로 구성된다는 의미에서
사슬 맨 아래의 생명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 즉 microcosmos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空이라 표현(空은 없음이므로 곧 있음일 수 있다는-저의 해석입니다)한다.
 
예를 들어 흰개미를 보자.
흰개미의 소화기관에는 흰개미가 섭취한 섬유소를 분해하는 미생물,
즉 세균들이 우글거린다. 이런 세균들이 없다면 흰개미의 생명은 유지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흰개미를 흰개미라고 명명하고는 있지만 실은 흰개미라는 것의 실체는 없는 셈이다.
따라서 개체는 그 개체를 이루는 무수한 개체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체를 개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게 된다.
즉, 내가 나임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과 같다.
본질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세계가 이러한 이치라면 이것은 확장을 해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인간의 실체를 부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고, 인간이 만든 단일한 사회,
그 기원을 무시하기도 현실적으로 힘들다.
 
자~~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로 들어가보자.
인간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 문자를 한번 보자.(총균쇠에서는 문자의 의미를 너무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다.)
예전에는 문자에 의하기 보다는 구술에 의존했다.
축의 시대의 사상가들 즉, 공자, 붓다, 소크라테스, 예수 모두 글자가 있었으나 글자를 쓰지 않았고
말로서 사상을 설파했다. 오늘 날 문자로 전해지고 있는 이들의 사상은 모두 그들의 제자들이 글로 써서 전한 것이다.
 
 
듣는 것은 문자를 보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게 된다.
 따라서 귀 기울여 듣는 능력이 중요했던 이 시대는 인간의 기억력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문자가 인간의 기억력을 좀 먹을 것”이라고 문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말은 잉여와 잡음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듣는 사람이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구술에는 여러 가지의 버전이 존재하며 그래서 reality가 살아있다.
즉 기억을 말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내 사유가 슬쩍슬쩍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자의 탄생, 문자 중심의 문화와 접한다는 것은 국가의 탄생과 연관된다.
문자로 무언가를 정하는 순간 법이 생기고 canon(聖典)이 형성된다. 또한 문자로 남겨지는 순간,
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면서 계파도 갈리게 된다. 즉 문자는 공동체를 가시적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므로
국가 정비와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문화 사업에 주력하는 왕이야 말로 진짜 야심 있는 왕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이나 정조^^
 
 무언가가 새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타자에 의해서다, 즉 타자와의 부딪힘에 의해서다.
그렇게 본다면 유럽민에 의한 인디언 선주민들의 대량학살과 멸망의 과정은 비극적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단일한 사회가 이질적인 것을 만나서 파괴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명의 본질에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의 본질은 ‘단일한 것은 없으며,
부딪침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전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은 무엇인가를 탐구했는데
 데모크리투스는 그것을 ‘원자’, 에피쿠로스는 ‘원자+진공(=여백)’이라고 했다.
 ‘진공 즉 여백’이 있어야 원자가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회도 단단하고 단일한 무엇이라고 한다면 이 사회는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무엇인가가 일어난다는 것은 여백이 있음으로 가능하다.
 
원자로 다시 돌아가보면 원자는 여백이 있어서 운동을 한다. 원자의 운동, 즉 자유낙하운동을 한다.
그런데 매번 그렇게 똑같은 방식으로만 운동한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낙하를 하던 어느 날 갑자기 방향을 ‘미세하게’ 바꾼다. 이것이 ‘클리나멘(편위)’이다.
클리나멘은 생성의 조건이다. 처음에는 미세한 것이지만 나중에는 엄청 커질 수가 있다.
클리나멘은 왜 생기는가? 이유는 없다. 그냥 가다가 방향을 트는 것이고, 그것이 존재의 본질이다. 
이렇게 미세하게 방향을 틀게 하는 것이 진공이며
 이렇게 튼 방향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는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을 사회에 적용해보자. 사람들은 초기조건이 완벽한 어떤 것을 생각한다.
이를테면 Golden Age(황금시대)가 있었고 그 이후 점점 타락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인간이 만든 이야기일 뿐이다.
어떤 태초에도 황금시대는 없었다. 인간의 기원을 올라가 보면 누군가의 침략은 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사회란 불완전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생명체의 세포막을 보자. 세포막을 통해 내 외부가 갈린다. 이 때 세포막은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빼내는, 즉 걸러내는 작용을 한다. 이 걸러냄을 통해 첫째, 내, 외부의 공생이 가능하고
 둘째, 내가 나일 수 있는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걸러내는 막의 작용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혈관 막도 혈관 내 외부를 끊임없이
다르게 유지함으로써 생명을 유지시키고 있다.
 
생물계에서도 변이가 많이 일어나는 종들이 급격한 환경변화에서 살아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한 혈통끼리만 산다면 금방 멸종할 것이다. 동일성이 점점 확대되면 멸하는 것이다.
 인간도 점점 지금처럼 동일화, 균질화로 간다면 멸종하게 될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로 침입할 수 있는
여백이 없으면 망한다.
따라서 ‘동일성’은 언제나 결과일 뿐, 다른 것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원인이다.
 ‘적자(適者)’라는 말도 'fit' 즉 ‘맞춘다’라는 의미다. 나를 맞추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인간의 시간을 가지고 다른 것을 판단하는 척도로 삼는다.
 하루살이의 경우 하루를 평생으로 산다.
그러므로 다른 시간성, 다른 공간성의 관점이 필요하다.
침략으로 하나를 멸종시킨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긴
하지만 전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 일도 아니다.
“천지가 불이 나다”란 말이 있듯이 자연법칙은 우주 전체의 균형만 생각할 뿐이지
인간의 마음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 표상 안에서 사유하고 행동할 뿐이다.
 즉 ‘일어나야 될 일이 우연하게 일어날 뿐이다.’
존재의 본질은 부딪침, 즉 운동이다. 흘러가고 부딪치고 뭔가 생기고 없어지고,
자연, 우주의 차원에서 보면 계속 움직이고 부딪치는 역동적인 상황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인가?
세계는 ‘Design’ 곧 ‘설계’된 것이다. 우리는 설계된 것을 구조라고 생각하고
설계를 잘하면 그 안에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애들을 잘 키우면(잘 설계하며) 행복할 것이고
도시를 잘 설계하면 모두가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더욱 더 완벽하게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세계에 대한 완벽한 상태를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유토피아에 대한 인간의 허상에 불과하다.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없다. 가면서 쳐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역사시대는 요순시대 이후를 말하는데,
그 이전에는 인간과 동물이 같이 뒤엉켜 살던 혼돈의 시대였는데
역사가 시작되면서 동물과 함께 한 시대는 야만의 흔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동물이나 식물, 세균이 없었으면 인간의 세계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문명의 기원은 ‘dirty’했다.
 
2. 균에 대하여
 
균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숙주를 살린다.(물론 숙주를 죽여서 잘 번식할 수 있다면 죽이기도 하겠지만^^)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균 덩어리다. 우리 몸 내부에 이질적 물질이 들어오면 우리 몸의 세포들이
이것에 반응하고 분열하고 결합한다(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
그런데 암은 이런 과정이 없다(암은 동질화만 지향).
이것을 사회에 적용해보면 한 사회에는 이질화하려는 경향과 동질화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어느 것이 강하냐에 따라 사회의 성질이 결정된다.
 
균은 주로 동물에서 연유한 것이 많다고 예전에는 생각했는데,
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생긴 균의 변종들을 보면 오히려 인간이 가축에게 균을 번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다. 그런데도 오늘 날은 세균에 대한 극도의 공포와 증오가 있다.
 
이런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해석해 보자.
고대 사회에는 세균 때문에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없었다. 
중세에도 공포의 대상은 마녀라거나 미지의 광인 같은 거였는데
지금은 미래와 세균이 공포의 대상이다.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안보이는 것들에 대한 외경(두려워하면서도 존경스러운 것)이 있었는데
근대인들의 공포에는 외경이 빠져 있다. 근대인은 물신에 대한 것 말고는 외경심은 사라져버려서
근대인의 공포는 오직 증오와만 결합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타자를 내안의 또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근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게 되는 관점이 된다.
따라서 지금의 사회는 공포스러운 것, 이질적인 것은 의도적으로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예전에는 발생하는 일들을 감당하면서 살아왔으며 공포는 자연재해에 대한 것만 있었다.
그리고 자연재해를 여러 번 겪으면서 리듬성을 찾았고 그러면서 정주가 가능하게 되었다.
 리듬성이란 세계에 대해서 직관적으로 질서를 부여하는 능력이다.
 이 때 이 리듬성을 찾는 것은 언어을 통해서 가능하다. 왜냐하면 언어는 세계를 끊어 내는 것,
즉 우리가 사고할 수 있는 것 속에 세계가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럼으로써 언어로 타자와 만날 수 있게 된다.
 
정주생활을 가능케 한 리듬성의 발견에 인간의 기술이 더해져 갔는데
기술이 생겨나는 과정도 우연의 산물이다. 
어느 날 해봤는데 잘 되어서 조금씩 계속 늘려가는 식으로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역사라는 것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점점 확대되어 가면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우연이라고 밖에 할 수없는 불연속적인 단절을 겪으면서 진행되어 온 과정이다.
이 우연이 바로 여백이다.
 
3. Autopoeisis(자가생산) - ‘그냥 안다는 것’에 대하여
 
근대에는 ‘그냥 아는 것’은 지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냥 알았다. 그냥 아는 것은 몸에 밴 앎이다. 몸에 밴 앎이 진짜 지식이다.
Autopoeisis(자가생산)는 생명이 가지는 직관적 능력 같은 것인데
무엇을 만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 지를 그냥, 자동으로 아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박테리아가 당을 찾아 가는 것은 목적을 가지고 찾아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움직이다 보니까 당이 있는 곳에 도달하는 거이다.
순간 순간 좋으려고 하는 것을 찾아가다가 당에 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려면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뵈야 한다.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은 내 몸을 의식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내 몸은 세포들의 움직임 때문에 존재한다.
즉 부분이 변하면서 매번 전체가 바뀌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분의 변화가 전체의 변화를 수반한다.
 배치를 바꾸는 것도 개체의 변화이다.
전쟁이라는 것도 보면, 전쟁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 관점에서 보면 균형을 가지는 것이다.
평화만 유지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동질화만 기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호모토피아(동질성의 세계)를 향해 달려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개발이 진행되지만 개발이 진행될수록 슬럼화도 같이 진행된다.
그러면 또 시각적 동질화를 위해서 장애인이나 광인들은 안보이게 시설로 보낸다.
또한 근대는 동질화시키면서 동시에 분리도 진행한다.
동질은 동질끼리 모아서 다른 동질과는 분리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나이 차이가 나도 같이 공부를 했지만
지금은 학년별로 분리하고 나이별로 분리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타자성이 공존하는 ‘헤테로토피아’였다.
중세만 보더라도 교회와 시장이 같이 붙어 있었고,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도 절과 집이 같이 있었다.
그런데 근대가 되면서 도시가 생기면서 근교, 외곽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인간은 다른 타자가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타자성은 언제나 공포인 동시에 기쁨이므로 생성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지구는 ‘헤테로토피아’이며
헤테로토피아로서의 인류학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총 균 쇠>에서 병균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라는 질문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총이나 쇠로 상징되는 무기나 기술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균은 인간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나는 필기를 왜 이렇게 많이 했던가...
내용이
너무 길어서,,,
 
읽기가 심히
힘들겠다는...
 
 
 
 
 
 
 
 
댓글목록

양파님의 댓글

양파 작성일

그냥 아는 게 많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큰 욕심이겠죠. . 쓰기에 공력이 많이 들어갔네요,읽기 걱정까지 해주시고 ㅎㅎ .  정리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필벽성옥님의 댓글

필벽성옥 작성일

"천지가 불이 나다" 는  "불인(不仁)하다"의 오타네요^^

보행자님의 댓글

보행자 작성일

채운샘이 강의 하시기 무서워 하시겠다는...
강의 내용이 꼼꼼히 필기되어 있으셔서...
마지막 부분이 참 좋네요.
새로운 질문과 연결되어 있어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