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이 들려주는 아함경 이야기1 >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목성.png

정화스님이 들려주는 아함경 이야기1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전화노인 작성일13-10-29 08:17 조회3,095회 댓글1건

본문

정화스님이 들려주는 아함경 이야기 1
                                                              김해숙 (목요감이당대중지성)
 
 누구나 알지만, 사실은 모르는 불교. 하지만 세상의 모든 길은 불교로 통합니다. 이름하여 불통(佛通) 시대!”(무빙비전탐구 블로그 불교가 좋다머리말 중에서) 
 
출가-자유를 얻기 위한 변혁의 첫걸음
 우리를 불통(佛通)시대로 안내해주실 길라잡이 정화 스님은 말씀하셨다. “고민한다는 것은 답이 보이지 않지만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고타마의 출가도 이 지점이라며 정화스님은 요즘 세태를 비유해 주셨다.
요즘 개업병원이 하루에 네 곳씩 문 닫고 있는 추세다. 이 개업의들이 예전에 공부짱인 의사지망생이었을 때 이런 추세를 누가 짐작했을까? 세월이 흐르면 기존의 사회 질서에 대해 변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예전엔 국가 경제 시대였고, 현재는 글로벌 경제 시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경제시스템이 허물어지고 있다. ‘부자되세요!’라는 덕담(?)이 무용해진 현재 우리의 상태가, 우리 사유에 일대 변혁을 일으킬 때라는 걸 알아야 한다. 기존 생각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때, 그 때가 바로 다시 생각해 볼 시점이다.
 
미생물의 세계도 그렇다. 어떤 미생물이 포도당을 먹으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많던 포도당이 어느덧 고갈되어 버렸다. 포도당이 사라진 그 현장에서 미생물은 자기 내부를 들여다본다. ! 그동안 젖당 스위치를 꺼놨었네!. 이제 포도당 스위치는 끄고, 젖당 스위치를 올려야겠다. 어라! 젖당 스위치가 없었네! 이제 젖당 스위치를 새로 만들어 쓰자. 생존을 위한 이 두 가지 행동은 존재가 바뀌어야 살 수 있는 미생물의 변이 능력을 잘 보여준다.“
요컨대 사건이 사유를 만들어낸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석가모니의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죽음이었다. ‘병들고 죽음이라는 사건. 이 고민이 고타마의 인생에 그림자를 크게 드리운다. 그래서 그는 죽음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숨쉬기를 관찰한다. 숨쉬기를 하다보면 외부지각이 끊기는 상태가 되고 이게 바로 삼매 상태라고 한다.
이 삼매 상태에서 고타마는 죽음과 숨의 문제가 자신의 기존 질서를 끊어내고 새로운 사유를 시작해야하는 지점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고타마의 부모는 고타마가 자신의 존재를 못보게 하려고 갖가지 현실 욕망 충족 방법을 쓴다. 욕망은 실존의 문제를 못 보게 하는 습성이 있다.
 
우리는 흔히 욕망이라는 단어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정화 스님은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욕망은 생명체의 생존 방식이다. 욕망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자신의 삶을 근원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날 때다. 자신의 삶을 잘 살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 외에, 별로 그렇지 못함에도 계속 욕망하게 하는 것, 그게 문제라는 말씀이다.
광고의 속성이 그 좋은 예다. ‘별로 쓸 데도 없는데 그걸 가지게 되면 잘 살 것 같은심정을 대대적으로 부추기는 행위들. 이런 욕망성으로부터 자신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출가이다. 고타마의 출가도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람이 달라지면 먼저 그의 말이 달라진다. 비트겐 슈타인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욕망의 바로미터가 곧 언어이다. 내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의 한계를 뜻한다. 깨달은 후의 부처의 언어의 집이 바로 아함경이었던 것이다. 깨닫기 이전의 고타마의 언어 환경은 베다경전이었다. 피라미드형인 베다경전은 분별된 양적 기준으로서 존재성을 파악했다. ‘나와 너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고, 어제 오늘의 나는 반드시 같다. 한 마디로 신분 질서가 확정된 언어 환경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니다, 고타마는 이걸 깨달았고, 고정된 신분 질서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했고, 이런 고타마의 언어의 집이 바로 아함경이었다.
 
사문- 새로운 사상가의 출현
출가를 선언한 고타마는 머리부터 깎아버렸다. 피라미드형 신분 질서의 최상위층에 브라만이 있던 고대 경전의 세계에서는 머리를 길게 기를수록 신분이 고귀했다. 새로운 생각을 하는 무리(사문)들은 신분은 근원적 실체가 아니라 만들어진 것임을 간파했다. 머리는 브라만, 가슴은 크샤트리아, 팔다리는 바이샤, 손발은 수트라, 손발에도 끼지 못하는 것은 전타라(불가촉천민). 이런 식의 신분 질서를 규정하는 신체성을 해체해 버린 것이다. 이른바 계급타파로서의 삭발.
 
석가 당시의 사람들, 베다 경전에 기반한 사람들은 분별심이 너무나 견고했다. 언어와 생각의 추상이 공고해져서 근원적 분별심을 가지게 되면 한 개체의 생명력을 전체가 책임져주지 않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꿀벌의 세계는, 자연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하나의 부분을 전체가 책임져 주며 살아간다. 자연은 한 개체가 자기 생명력과 함께 일을 담당하는 부위가 있다. 우리 사회도 사회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공동체적 생명력이 있다. 그 생명력이 바로 자유다.
 
사문은 삭발로서 자유를 선언하고, 근원적 분별을 가졌던 세계에서 스스로 탈주해 나온 사람들이다. 정화스님은 요즘 우리의 종교 활동이 사문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종교를 믿는다는 건 사유를 한다는 뜻이지, 결코 종교가 만든 사상 체계에 맹목으로 의존하는 게 아니다. 혹시 우리는 종교에 종속되어 자유로운 생각을 멈추고 있는 건 있는 건 아닌지, 이른바 부자유를 돈 주고 사는 행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3-40년전 어느 유명한 힌두교 성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나는 힌두교인이다. 나는 힌두교란 우물로 세상을 본다.”라고. 정화스님은 세상엔 힌두교와는 다른 우물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씀하신다.
시인 김수영은 진정한 자유를 이렇게 정의했다. 독재정권 시절 광화문 앞에서 공산주의를 얘기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고. 베다 경전을 만들었던 아리안족의 신분 질서는 고정불변했다. 불교 사문들은 이 고정성을 당당하게 거부했다. 그리고는 아리안의 사회 밖으로 탈주해버렸다. 그들은 자신이 속했던 카스트의 모든 외적인 표지들을 버렸다. 기존의 수도자의 옷도 벗어버렸다. 옷으로 표상되던 기존의 삶과 절연함으로써 낡은 세상에서의 자신의 자리를 의도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는 낮은 데로 임하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시체를 싸매는 가장 허름한 옷으로. 심지어 자이나교도들은 옷을 벗어버렸다. 그들은 이제 카스트의 제약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출생이라는 우연에 구속당하지도 않았다.
 
그렇다. 사문이란, ‘이제 이 세계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편이란 이래야 돼, 당신 왜 그래?’ 이렇게 만들어진 집을 지어놓고, 속박하는 것이 아닌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스스로 만든 사념의 틀로 갖춰놓고, 거기에 얽매여 있는 건 아닌가를 보아야한다.
   
댓글목록

오대수님의 댓글

오대수 작성일

너무도 좋은 수업을 아함~ZZZ 하고 들었는데 샘의 언어로 다시 들으니 귀에 쏙쏙! 정리 쏙쏙! .@@@ “나는 힌두교인이다. 나는 힌두교란 우물로 세상을 본다.”라고. 정화스님은 세상엔 힌두교와는 다른 우물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씀하신다. @@@ 많은 우물중에 감이당 우물을 만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