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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스님 2강 후기- 양자물리학으로 이해하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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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필벽성옥 작성일13-11-06 18:51 조회4,362회 댓글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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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스님 <아함경> 2강 후기 (2013-10-31)
 
양자물리학으로 이해하는 불교
 
박 성 옥
 
 이름이 고와서 당연히 여자스님일거라고 멋대로 상상하고 있다가 상남자 스타일의 스님이 들어오시는걸 보고 깜놀했던 나는 정화스님이 양자물리학의 원리로 불교를 설명하시는걸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간 나는 불교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면서 ‘생로병사가 괴로움이니 태어난 게 죄로다’식의 자조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은 가소롭게 보았고,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라는 지극당연한 말로 수많은 사람의 돈주머니를 연다고 비웃었던 사람이다. 따분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불교강의는 뜻밖에 양자역학으로 불교의 연기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나의 예상을 벗어났다. 생물학과 물리학을 종횡무진하는 정화스님의 독창적인 불교강의에 매료되어 수업후기를 써본다.
 
무상성, 덧없음의 미학
 
 붓다의 사상이 인도의 여타 사상과 다른 것은 연기법(緣起)이라는 독특한 시선 때문이다.
당시 주류였던 브라만교는 신성이 우리 몸 안에 어디에 내재하는가에 따라 계급을 나누고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은 정해진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비주류였지만 물질의 우연성이 다양성을 낳는다고 보았던 유물론파도 있었다. 불교는 위의 두 파에 속하지 않았다. 대개 인도에서 파생된 모든 사상은 힌두교라는 고유한 범주에 넣는다. 그래서 부처를 크리슈나(신)가 일곱 번째 신으로 화신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불교는 엄밀히 말해 힌두교와는 차이가 있다. 불교는 신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연기법에 의해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연기법은 인연생기(因緣生起)와 같은 말이다. 내부적인 원인인 인(因)과 외부적인 원인인 연(緣)이 만나 끝없이 변해간다. 또한 끝없이 생성된다. 인생무상! 그동안 허무함의 대명사였던 이 말이 거꾸로 싱싱한 생명력으로 바뀐다. 무상하니까 동질성의 형태가 흔들리고, 생명은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변화시킨다. 항상성을 담보하기 위해 무상성이 있다는 것이 삶의 아이러니다.
 
 양자물리학으로 보면 물질은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으로 나타난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게 같이 있다. 빛의 이중슬릿실험을 해보면 스크린에 물결파처럼 나타난다. 전자가 파동같이 간섭무늬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초고속 카메라를 두고 관찰하자 사건이 바뀌어 버린다. 마치 입자인 구슬을 쏘았던 것처럼 두 줄의 막대무늬가 생긴다. 파동이 입자로 바뀌다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관찰하면 입자로 보이고, 내가 관찰하지 않으면 파동으로 보인다. 관찰자가 파동을 입자로 바꾼 것이다. 관찰이 물질을 바꾼다는 양자물리학의 발견은 나의 생각, 나의 행동이 개입하는 대로 세상이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물은 살아있는 물질이다. 내적 온도가 높아야 양성자와 전자가 일정한 거리로 움직여서 생명이 유지된다. 온도가 낮아지면 붙어서 수소가 만들어진다. 물질은 안정적으로 가려는 고정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끝없이 유동적인 분자활동을 해야 한다.
생명의 역사는 40억년 정도 되었고 다세포생명은 5~6억년 되었다. 처음에는 탄소로 가득했던 지구에서 생명체는 주로 탄소를 사용했는데 시아노 박테리아가 탄소동화작용을 해서 CO₂에서 C(탄소)를 떼어내고 O(산소)와 O(산소)끼리 연결시켜 에너지를 만든다. 지구가 갑자기 산소로 가득 차게 되자 미토콘드리아는 자기를 바꿔서 산소를 에너지로 삼아 살게 된다. 그래서 산소가 필요하게 된 큰 세포는 미토콘드리아와 공생을 하게 된다. 미토콘드리아가 큰 세포는 서로 신경네트워크 활동을 하면서 DNA정보를 주고받으며 산다. 그렇게 인간이 탄생했고 사람 몸 안의 60~100조개의 세포 안에 1경개가 넘는 미토콘드리아가 산다.
 
 식물은 산소를 떼어낼 능력이 있으니까 태양에너지를 받고 광합성을 해서 산다. 하지만 사람은 자발적으로 O₂를 떼어낼 능력이 없다. 식물이 태양에너지를 받아 뿌리까지 내려가면 땅 속 미생물은 식물 뿌리에 붙어서 그 에너지를 전달 받는다. 식물이 살아야 미생물과 동물이 생태계를 이룬다. 사람은 식물을 먹고 태양에너지를 취하거나 식물을 먹은 동물을 먹고 태양에너지를 얻는다. 이렇게 보면 우리도 생태계의 일부이고 태양을 중심으로 식물과 동물이 커다란 생명계의 순환을 이룬다. 이렇게 지구 전체가 하나의 생명이라고 보는 것이 가이아이론이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수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는 우리의 몸도 생명공동체다. 만약 장기이식수술을 했을 때 면역체계가 받아들이면 살고 타자로 인식하면 면역체계가 공격해서 살 수가 없다. 외부가 들어오면 자신의 신경, 세포, 면역네트워크를 잘 변화시켜야 산다. 바이러스는 다른 생물체에 들어가 자기 정보를 숙주에 심는 기술이 탁월하다. 그래서 바이러스가 생명력이 강한 것이다. 생물체는 자기를 안정적으로 만들려고 할 게 아니라 유연하게 바꾸어야 산다.
 
 생명체는 정해진 게 아니다. 우리는 특정 유전자를 확정적으로 물려받지 않는다. 우리 몸 안에는 할머니DNA와 엄마DNA 등 수 백년간의 이질적인 요소가 다 섞여 있다. 발현요소와 미발현요소가 모두 들어 있어서 환경과 교류하면서 어떤 것은 스위치를 켜고, 어떤 것은 끄게 된다. 이것이 후성유전체다. 오픈된 DNA 중 하나씩 스위치를 켜고 끌 것인가 딱지를 붙이는 메틸화가 일어난다. 히스톤단백질은 세포핵 속에 있는 정보가 2미터의 이중나선으로 실패처럼 감겨있다. Micro RNA는 나와서는 안 되는 정보가 나오면 off 딱지를 붙인다. 세상과 교류하면서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하는 사건이 오면 DNA가 바뀐다는 후성유전체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자신을 바꿔나갈 수 있는 정보가 지금, 내 안에 있다.(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의 과학적 근거가 될 듯.)
 
연기법으로 만들어가는 나
 
 연기법은 사건,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이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가. 외부가 철저히 나를 규정하는가, 아니면 내부가 철저히 나를 규정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은 총체적으로 삶을 보는 게 아니다. 반야심경은 이것을 원리전도몽상이라 한다. 내,외부 원인과 맞딱뜨려서 생명활동을 하는 우리에게 존재성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50%는 우리 밖에 있다. 분별되고 이름 지어진 것이 없다. 그래서 존재(being)란 외부가 내부로 끼어들어서 만드는 Interbeing이다. 글로벌한 세상에서 국가(nation)가 Internation이 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우리라는 존재는 삶이라는 활동을 하는 동사적 상태이다.
생명이란 불안정성과의 화해이다. 생명의 항상성을 10이라고 하면 내가 2일 때 외부가 8이고, 내가 8일 때 외부가 2를 이뤄 조화로운 상태가 된다. 온전히 사건에 집중할 때만 조화로운 상태가 가능하다. 자신과 완전히 화해가 된 상태에서 진실로 기쁜 도파민, 세로토닌이 나온다. 하지만 조금만 조건이 바뀌어도 균형이 깨진다. 균형이 깨져야 다음 상태를 준비한다. 바뀌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욕망은 생명의 동사적 사건이다. 우리는 전에 있었던 사건을 기억을 통해 회상한다. 사건에 자신의 욕망을 입혀놓고 그 사건이 자신의 욕망대로 가길 바란다. 욕망이 기억을 통해 왜곡이 일어난다. 그러면 현실이 불만족스럽다. 상상력이 충족된 완전한 삶을 생각하면 신을 생각하게 된다. 현실적 삶과 점점 멀어지는 상상의 전도가 일어난다. 신은 위대해지고 인간은 낮아지면서 우상숭배와 소외가 일어난다. 믿음이 강할수록 자기 삶은 왜소해지는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건전한 사회>에서 “위대한 신들의 이야기는 위대한 소외의 이야기”라고 했다. 내 삶이 초라해지는 욕망의 왜곡이 불만족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불교는 욕심을 내지 말라고 한다.
 
 내가 얼마나 욕망을 투사하느냐에 따라 사물의 존재성이 규정된다. 사물이 사물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욕망을 투사하는 대로 존재한다. 이것이 욕계(欲界)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을 하라. 가치체계를 부여해서 스스로 소외되지 말라. 삶이란 그렇게 가치매길 수가 없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색계(色界)이다.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면 상상으로 만들어진 길은 없어진다. 모든 길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펴내는 길이 된다.
 
 이대로 가다가는 현생인류가 금세기 안에 전멸한다. 발달하는 인공지능, 나노기술 공학, 합성생물학은 인간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든다. 인간의 생명조건은 식물과는 달리 얼마나 움직일 것인가에 맞춰 진화해 왔기 때문에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핸드폰, 인공지능 청소기 등 기계가 인간을 안 움직이게 하고 인간을 넘어서려한다. 거꾸로 인간은 아무 생각 없이 물질을 닮아가려한다.
 
 우리 몸은 단백질로 되어 있다. 단백질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아미노산이다. 세상에는 아미노산이 20개 밖에 없다. 그런데 인공적으로 21번째 아미노산을 만들었다. 이것은 임의로 DNA정보를 바꿀 수 있다. 생물의 최소단위인 아미노산은 물질인 동시에 생물이다. 우리는 탄소, 산소, 수소 등으로 이루어진 물질이다. 이렇게 합성생물학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바꿀지 아무도 모른다.
 
 10억분의 1미터의 물질을 다루는 기술인 탄소나노기술이 공학과 접목하고 있다. 탄소나노기술이 발달해서 양자컴퓨터를 만들었는데 실제로는 쓰지를 못한다. 앞의 전자의 이중슬릿실험처럼 내가 관찰하는 순간 컴퓨터가 인식하는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양자상황에서는 관찰자의 시선이 개입해서 정보가 변환된다. 그런데 사람은 점점 생각이 필요 없어지고 인공적인 물질만 남는다.
 
 바다풀처럼 생긴 무릉생(?)이라는 동물이 있다. 새끼가 뽈록 나오면 떨어져서 헤엄을 친다. 초기동물의 형태를 갖추고 뇌도 가지고 있다. 어미는 풀처럼 보인다. 새끼가 뿌리를 내릴만할 때 찾아가서 머리를 거꾸로 뿌리를 내린다. 그 때 생각하는 뇌와 창자를 소화시켜 버려 없어진다. 식물처럼 되어버리지만 DNA 정보는 동물이니까 기억했다가 새끼를 낳는다. 식물은 어디 뿌리 내릴까 생각 안 해도 되지만 동물은 어디 가서 뭘 먹어야할지 생각하도록 조건이 되어 있다.
인간은 외부에서 들어온 사건을 지각하고 움직인다. 뇌 중간에 있는 시상의 오른 쪽에는 시각을 지각하는 슬상체가 있어서 시각중추로 신호를 보내고 왼쪽은 청각을 지각한다. 이렇게 나눠져서 들어온 정보를 통합해서 시간, 방향성, 색깔, 형태, 움직임 등을 종합판단한다. 인간은 이 때 재유입된 정보를 자기가 본다. 이 정보가 주관과 객관으로 나눠져서 시각이라는 지각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면 빛의 파장이 망막 뒤의 광수용체를 거쳐 시상과 시각중추로 이어졌다가 다시 광수용체로 돌아와서 시각을 형성할 때까지 0.2 ~0.5초가 걸린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은 0.2초 전의 모습이다. 이 때 20%는 외부의 신호이고 80%는 내부의 신호다.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면서 대부분이 주관적으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주객이 분리되는 현상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주관과 객관이 다른 거라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나’가 생각 밖에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브라만교는 신이 내 몸에 들어와 생각하게 한다고 믿었고, 유물론자는 물질이 생각하게 한다고 했다. 나에게 집중하면 외부신호가 끊긴다. 외부에서 지각을 발생시키지 않아도 내부에서 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이런 것을 색계선정이나 무색계선정이라고 한다.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지각하는 그 최초의 순간 인식만으로 세계가 존재한다. 이것이 심계(心界)다.
 
고요함 속의 지극한 행복감
 
 욕계, 색계, 심계, 이 삼계를 벗어난 사람은? 참선수행을 한 붓다가 이런 걸 경험했다. 붓다는 말한다.“네가 존재하는 게 진리”라고. 붓다는 “세계는 무상하구나. 생명의 근원적인 것은 무상하다. 특정한 상황에 머무를 수 없으니 쾌락이나 고행을 추구하지 말라”고 했다. 붓다는 29세까지 쾌락을 누렸고 출가 후 6년간 고행을 하면서 양극단을 경험했다. 둘 다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주,객관을 나눠보도록 훈련이 되어 있다. 외부를 향하지 않고 의식의 지향성이 제일 좋은 게 호흡이다. 이것이 호흡에 집중하는 수식관(數息觀)이다. 결가부좌하면 힘을 응축시키게 된다. 이렇게 앉아서 들숨과 날숨을 하나 하나 센다. 몸은 관념을 만드는 곳이다. 몸과 마음의 이원성을 탈피하고 생각을 하나로 집중시킨다. 의식은 기억과 맞닿아 있다. 기억은 몸의 언어다. 의식이 집중되면 몸의 언어가 달라지는 양상을 경험한다. 내부에서 스스로 화해가 제대로 일어나면서 행복감이 느껴진다. 집중하면 지복감, 즉 지극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욕계에서 욕망을 떨어뜨리고 색계로 들어갈 때 신체적 변형이 일어난다. 마치 몸 밖에서 나를 보는 것처럼.
 
 집중을 통해 온전히 자신의 상태를 만들어 갈 때, 균형을 맞춰가는 매 순간의 상태가 중도이며,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연기법으로 구성된 삶으로 어떻게 지복감을 만들까? 행복을 추구하면 행복을 찾을 수가 없다. 중도는 기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게 아니다. 행복은 무덤덤한 물맛이다. 균형 잡힌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걸로 행복 아닌 것이 가장 행복이라는 걸 느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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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보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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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정리,짱!짱!.... 정말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끝자님의 댓글

끝자 작성일

아침 시간에 반복해서 읽으니 글 속에 빠져 드네요. 큰 도움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노인님의 댓글

전화노인 작성일

역쉬 성옥 언니는 필벽 짱이십니다. 아함경, 정화스님 강의 정리 참 어려운데...머리털 빠지는데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언니를 공부정리의 달인으로 인정하옵니다. 조목조목 아함경과 과학을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벽성옥님의 댓글

필벽성옥 작성일

마~~이 당황했습니다.^^  그런데.......진정  멍게일까요? 어미는 바닷풀처럼 생겼다고 했는데???

양파님의 댓글

양파 작성일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성옥선생님 '우렁쉥이'입니다. 우렁쉥이는 곧 '멍게'죠. 자웅동체가 될 때가 있답니다. 네이버에 찾아봤어요.  표준말과 사투리 , 그리고 발음등에서 많이 달라  당황하셨을 것 같네요.

필벽성옥님의 댓글

필벽성옥 작성일

무릉생(?) 이라고 들었던 동물이름은  정화스님께 다시 여쭤보니까 '우롱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생김새가 보고 싶어서  다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지만  안나오네요. 
또 잘 못 들었나 싶어서 우릉생이, 우릉, 우릉생, 우롱생 등...... 비슷한 단어를 넣어보니까 우등생? 을  우롱하냐고?  연관검색어가 뜹니다.

땐구님의 댓글

땐구 작성일

듬성듬성했던 제 노트 보면서 답답했었는데 과학파트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연기의 오묘한 진리를 물리학과 생물학으로 들으니 참으로 들을수록 신기하고 매력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