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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스님이 들려주시는 아함경강의 3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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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연 작성일13-11-13 12:18 조회2,9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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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스님 <아함경> 3강 후기 13.11.7

업장소멸, 집착 없이 사는 법
 
집착은 어디서 오는가
 
 불교는 ‘인생은 苦’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생이 괴로움이라면 우리는 결코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인생은 정말 고일까? 고란 무엇일까? 정화스님의 강의는 이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고는 집착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인생에서 고란 나한테 집착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는 것이지 인생 자체가 고는 아니라는 것이다. 즉, 고란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집착이란 무엇일까.
 몸은 담담한 상태를 청정하고 살기 좋은 상태로 받아들인다. 반면 흥분상태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이 상태가 지속되면 죽게 된다. 생명체는 일시적으로 흥분상태가 되더라도 곧 담담한 상태를 만들어야 계속 살아 갈 수가 있다. 1차적 의식을 가진 동물들은 항상 현재성 속에서 흥분 상태를 경험할 뿐 기억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흥분상태가 계속 된다는 생각조차 없다. 반면 인간은 언어논리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만들고 공간을 개념화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흥분상태에 추상성을 개입시키면서 계속해서 그런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생리적으로 흥분상태가 오더라도 몸은 곧 평온한 상태로 가려고 하지만 마음은 짜릿했던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일상의 상태가 아닌 흥분상태를 계속 원하는 것을 ‘집착’이라고 한다.
 아함경에서는 이런 상태를 ‘자신을 속이는 짓’으로 보고 있다. 계속 흥분하는 상태를 욕망하고, 색을 탐하게 되는 그 상태를 악마로 규정한 것이다. 악마라는 말이 원색적이어서 나와 무관하다고 여기기 쉽지만 악마는 도처에서 출몰한다. 예컨대 60살인 나이에도 40살로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집착한다는 점에서 악마적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늙음은 싫어지고 현재의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병도 마찬가지이다. 살면서 병이 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병은 살기 위해 몸이 선택한 최선의 활동이다. 우리는 이룰 수 없는 것을 원하고 희망을 갖고자 하지만 사실상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 생각은 과거에 좋았던 경험을 붙잡고 그 상태로 머물러 있어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몸의 항상성, 즉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속성과는 어긋난 바램이다.
 이렇듯 생각과 일상의 간극은 너무나 커서 나열하기도 힘이 들 정도다. 세상에 내가 생각하는 아내 상, 내가 생각하는 남편상은 없다. 혹시 잘 맞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우연한 것이고 맞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생명체는 유전자 풀을 다양하게 해야 다음 세상을 살아갈 때 유리하므로 진화과정에서 자기와 다른 것을 취한다고 한다. 그래서 적당히 같고, 적당히 다른 사람들끼리 끌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해서 살다보니 다른 부분만 점점 크게 느껴진다. 이것은 내가 타고난 현실적 나를 보는 훈련을 하지 않고 내가 바라는 나를 설정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생명체는 서로가 근본적으로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이 적당한 상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상태로 세상을 보려한다면 모든 것이 불만투성이일 수밖에 없게 된다. 되지도 않을 일을 바라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며 한탄만 하고 있으니 인생이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집착 없이 사는 법

 괴로울 때 우리는 "내가 전생에 무슨 죄업을 많이 지어서 이렇게 괴로운가"라고 하는 말을 자주 내뱉는다. 여기서 업이란 죄가 아니라 생명활동의 양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정화스님은 말씀하신다. 아기는 태어날 때 부모에게서 DNA정보를 물려받는다. 이렇게 물려받은 DNA를 전성유전이라고 한다. 이 전성유전 과정에서 생물학적 생존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정보는 물론이고 "너는 네가 환경을 만나면서 네 세상을 살라"면서 삶에서 익힐 수 있는 정보를 오픈 시켜 놓는다는 것이다.
 스님은 ‘오픈된 정보’만 있을 뿐 부모에게서 죄를 물려받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누구도 전생의 죄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후회와 원망을 스스로 구성한다. 또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이 세상을 해석해온 방식을 강요하기도 한다. 인류가 말을 습득한 것은 약 10만 년 전의 일이지만 감정을 담당하는 영역의 유전은 수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즉, 논리적인 내용보다는 걱정이라는 감정이 훨씬 더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온힘을 다해서 자식을 키우지만, 자식은 부모의 걱정스러운 말을 들을 때마다 자기 인생을 걱정스럽게 보는 감정을 함께 전달 받게 된다. 이 자식이 자식을 또 낳으면 또 자식을 위해서 걱정을 열심히 하다 보니 또 다시 걱정의 감정을 물려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걱정스러운 거울 뉴런 신경계열이 활성화되어 어떤 상황에도 인생을 걱정하는 습관이 붙게 된다. 인생을 걱정스럽게 볼 수 있는 통로는 계속 불이 켜지고 걱정 하지 않는 통로는 불이 꺼지게 된다는 말씀. 걱정하는 통로가 항상 켜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받기, 행복하기, 성공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의 삶을 강력하게 지배하기 때문이다. 걱정은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고, 경쟁하게 될 때 생긴다는 것. 걱정을 내려놓고 지금 현재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훈련을 하게 되면 걱정 스위치는 꺼지고 편안한 통로로 가는 스위치가 켜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고통이란 집착이며, 모든 것이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지어낸 망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된다. 이제 궁금하지 않는가. 집착 없이 사는 삶, 업장소멸된 삶 말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스님이 알려주신 집착 없이 사는 법을 공개하니 모두 주목하시라.

 첫째, 제발 사랑받으려고 하지 말고 내가 먼저 사랑하라. 물론 억지로 사랑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가 사랑을 받고 싶다면 그만큼 스스로 먼저 사랑을 하라.
 둘째,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 외부의 가치 기준에 맞춰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말고 내가 지금 원하는 일을 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몸은 기본적으로 담담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외부 조건은 끊임없이 바뀌므로 그 조건에 따라 부유하게 되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하여 어떤 상황에서든 안정된 마음 상태의 유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불안정성과의 화해인 것이다. 정화스님은 담담한 상태를 자극적인 맛이 아닌 아무 맛도 없는 물맛으로 비유해주셨다. 행복이란 흥분되고 자극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행복은 물처럼 담담하고 평범함에 있다는 것. 그것은 외부의 조건이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지복감에서 비롯됨을 알려주셨다. 모든 게 나에게 달려 있다. 삶이 고통스럽고 남 탓하는 마음이 올라오면 상기하자! 내가 망상이 많고 집착에 사로잡혀 있음을! 그럼 오늘부터 집착 없이 사는 법을 함께 실천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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