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샘 - 이옥의 글쓰기론 수업후기입니다. >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목성.png

곰샘 - 이옥의 글쓰기론 수업후기입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필벽성옥 작성일14-03-03 02:08 조회2,981회 댓글4건

본문

곰샘 - 이옥의 글쓰기론 수업후기
 
                       한없이 자질구레한, 아방가르드한 글쓰기
                                                                                                                                A반 2조 박 성 옥
 
 집구석은 어지럽고, 회사는 복잡해서 속이 시끄러운 가운데 이옥을 읽었다.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는데 하염없이 지저귀는 종달새 소리에 잠이 깨는 기분이랄까. 어쩌면 이렇게 종알종알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밑도 끝도 없이 쏟아내고 있는지. 현미경을 가지고 세상만물을 촘촘히 들여다보는 그의 글이 세밀하다 못해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선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곰샘의 강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곰샘은 조선시대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며 이옥은 분류되기 힘든 인간이라고 했다. 이옥은 미시적이면서도 전위적이고, 여성적이면서 끝없이 사소한 글을 썼다.
 
 18세기 지성사의 엇갈림을 보여주는 사건이 정조의 문체반정이다. 역모도 아니고 환국도 아니고 문체를 가지고 반정을 하다니 희한한 일이다. 하지만 사실 모든 혁명은 문자로 시작된다. 성경에도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로 세상이 창조된다. 인간은 신이 있다는 것을 언어로 알게 된다. 내게 언어가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언어를 해석해달라고 의지하게 된다. 중세에 라틴어로 된 성서를 독점한 것은 사제뿐이었다. 언어가 특정 계급에 독점이 되면 권력이 된다.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책을 출판했던 루터의 혁명은 사제의 말에 종속되지 않고 직접 성서를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려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정조도 그랬다. 언어를 장악한 힘으로 사대부를 움직이려고 시도했다. 청 문물이 들어오고 주자학에 대항하는 양명학이 뜨고 서학이 들어오던 때였다. 성리학과 고문이 지배하던 조선의 지식체계가 흔들렸다. 패사소품과 서학은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려 들었던 새로운 기호학이었다. 지식체계가 시대변화에 맞게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지 못할 때 그 개념은 교조주의가 된다. 주자학도 주자가 살았던 송나라 당대에는 탄압을 받았다. 주자학이 국가학으로 등장한건 원나라부터이며 명청교체기까지 이어진다. 비록 정조가 문체반정을 했지만 서학은 멈춰지지 않았고, 19세기에 더 좋은 문장이 나오지도 않았다. 한문을 가지고 고문과 소품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다양한 문체를 실험했던 연암을 뛰어넘는 문장가가 없었다.
 
 이런 시대에 이옥은 조선이 낳은 이상한 문장가이다. 그는 엉뚱하게 문체반정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죽는 날까지 자기 스타일대로 글을 썼다. 이옥은 글쓰기가 자기 존재의 전부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끝까지 글을 썼다. 다산그룹, 연암그룹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당대에도, 그 이후에도 세상은 알아주지 않았다. 다산처럼 언젠가는 세상이 나를 알아줄 거라고 확신하고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는 글을 썼다. 언젠가 알아주지 않아도 글을 썼다. 아무런 대가 없이 쓴 글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그를 보면 글에 무슨 효용성이 있냐고 묻는게 무색해진다. 효용과 무관한게 글이다. 문장이 나오면 이 세상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새로운 언어를 창안할 수 있을 때, 힘이 생긴다. 언어와 실존은 다른 게 아니다.
 
 이옥은 확실하게 패사소품을 썼다. 학을 뗄 정도로 사소하고, 자질구레하고 여성적인 글을 썼다. 그의 감각은 남달랐다. 18세기 지성사의 진진한 파노라마를 보여주는데 이옥을 제외할 수는 없다. 그의 글은 너무도 미시적인데 너무나 강렬하다. 충군을 당하고 과거를 못 보게 되어도 문체가 고쳐지지 않는 신체를 가졌다. 이옥의 곡진한 글쓰기를 보면 글과 신체가 분리되지 않는 원초적 동력임을 알 수 있다.
 
 이옥의 글에는 아방가르드한 철학적 예지력이 있다. 성리학은 인간의 욕망이 천리를 가로막는다고 보았다. 그러면 감정을 억압하게 된다. 이 때 이옥은 천지만물을 드러내는데 남녀의 정만한 게 없다고 말한다.
 
   대저 천지만물에 대한 관찰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사람에 대한 관찰은 정을 살펴보는 것   보다  더 묘한 것이 없고, 정에 대한 관찰은 남녀의 정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진실된 것 이 없다.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채운, 북드라망, 114쪽)
 
 또 이옥의 글 중 가장 유명한 <이언>에서는 “천지만물이 글을 짓게 한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순간, 나의 언어는 내가 쓴다고 할 수가 없다. 언어는 개별적이고 시대마다 다르다. 그 안에 천지만물의 네트워크가 담겨있다. 글을 쓰려면 자신을 비워야 한다. 그래야 천지만물의 비의가 내게 깃든다. 그것을 “文에 道가 실린다”고 한다. 글은 자연의 도를 담는 그릇이다. 글은 관도지기(貫道之器), 이며 재도지기(載道之器)다. 仁은 천지만물과 교감하는 신체이며 不仁은 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이다. 붓을 들면 천지의 기가 단전을 통해 흘러 들어온다. 글은 머리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내 손과 종이 (혹은 노트북) 사이의 기운에서 나온다. ‘책을 읽고 취해서 토하면 글이 된다’가 이옥의 문장론이다. 글을 쓰면 마음의 때가 씻어진다. 글이 양생이 되는 이유이다.
 
 곰샘의 강의는 노신의 <양지서>로 마무리되었다. 인생이라는 길을 가면서 만나는 난관은 기로에 섰을 때와 막다른 길을 만났을 때다. 기로에 섰을 때는 한숨자고 나서 갈만한 길을 간다. 누군가를 만나도 길을 묻지 않을 것이다. 그도 길을 모를테니까. 나만 모르는게 아니니 힘들다고 떼쓸 필요도 없고 위로를 구할 필요도 없다. 그러다 호랑이를 만나면 나무에 올라가 피한다. “굶어죽지 뭐.”라는 담담함, 까짓 호랑이라도 한번 물어보겠다는 배짱. 우리에겐 그런게 없다. 호랑이가 오기도 전에 공포에 가득차서 두려워한다. 호랑이를 만날 일도 없는데 호랑이보험을 든다. 모든 게 해결된 길도 없지만, 모든 게 막힌 완전히 봉쇄된 길도 없다. 가시덤불을 가더라도 길은 생긴다는 것. 이건 헛된 희망이나 낙관이 아니라 이치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노심초사만 없어도 천지자연이 내게 와서 글이 된다. 그 불안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과 소통하고 내가 살아있음을 우주에 드러낸다.
 
 감이당에서 일년여 공부하는 동안 나는 글쓰기에 온 생애를 걸었던 18세기 문인들을 많이 만났다. 각자 자기만의 문체로 자신의 존재를 보여준 그들에게 동시대인보다 더 진한 애정을 느낀다. 이옥에게서는 은근한 독고다이의 매력을 발견한다. 누가 뭐래도 나는 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존재의 이유가 되었던 사람의 서늘한 생명력을.
 
* 텍스트 :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채운, 2013, 북드라망.
댓글목록

바로보기님의 댓글

바로보기 작성일

강의 현장에 앉아있는 것 같군요 잘 읽고 갑니다.

전화노인님의 댓글

전화노인 작성일

이 깨알같은 수럽후기는 필시 천지의 기가 성옥 언뉘의 손을 통해 들어온 것이겠지요?

"이옥에게서는 은근한 독고다이의 매력을 발견한다. 누가 뭐래도 나는 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존재의 이유가 되었던 사람의 서늘한 생명력을"
아, 이렇게 바꾸고 싶네요
"성옥언니에게서는 은근한 성실과 근기를 발견한다. 누가 뭐래도 성옥언니는 공부한다. 그것하나만으로도 존재의 이유가 되었던 사람의 깨알같은 기록들을...

카르페디엠님의 댓글

카르페디엠 작성일

강의가 다시 살아납니다. 레코더를 안가져갔던게안타까웠는데 마치 성옥님이  강의한듯 어쩜 이리 착착 붙게 잘 소화 하셨는지
레코더가 전혀아쉽지 않네요

생각통님의 댓글

생각통 작성일

글로 강의를 참 잘 재현해내시는 것 같아요. 그 가운데 샘 특유의 언어들이 들어가 있어 읽을 때마다 감동을 한다는. ^^ 1학기 텍스트가 저는 참 좋네요. 이옥도 그렇고, 장자도 그렇고! 후기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