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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좀, 나의 삶 나의 글 수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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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대수 작성일14-03-10 20:17 조회3,28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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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좀, 나의 삶 나의 글 수업후기
 
 
“리좀책이 너무 어려워요~” 라는 말에 곰샘왈,
“어려울 때는 왜 어려운지 구별해야 한다. 리좀은 처음 단어를 만나서 어려운 것이다. 천의고원은 서양 철학에서도 처음 쓰는 단어다. 그래서 용어가 어렵다.”
호오~ 어려운 것이구나. 개념어가 낯설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일단 거부),
그러나 꼭꼭 씹어서 풀어놓은 저자의 글은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많았다. 줄을 치다보면 다 치면서, 무엇하나 버릴말이 없었다. 물론 책장을 넘기면 멍하고 청하지만.
   
먼저 곰샘은 저자가 뉴욕에 있기 때문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하며 저자의 연예담을 풀어놓으셨다. 우리는 아침드라마보다도 더 즐겁게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아침드라마와는 남다른 결말을 보여줬다. 저자는 실연의 아픔과 관계의 부딫힘을 책을 쓰면서 이겨냈다. 버티기 성공!
이때 나온 책이 『다른 십대의 탄생』이다.
저자는 나이로 보아 짧은 경험이고 그 대부분이 연구실에서의 생활이다.
이곳은 울타리같이 보호막 있는 학교와 다르게 날것?으로 공부와 친구관계를 겪었다. 학교에서는 원한다면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선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정면승부만 있을 뿐이다. 어떤 사건이 있어도 공부에 뜻이 있으면 같이 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건을 따라간다. 이렇게 온몸으로 사건을 겪고, 쓰고, 버티고, 부딫히고 쓰고, 버티고... 저자의 삶의 경험은 짧지만 굵다.
리좀은 저자의 두 번째 책으로 연구실 공부의 졸업논문이라 생각하면서 쓴 책이다.
저자 고1때 노마디즘을 정리하였다. 곰샘은 이때 “왜 10대는 철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 못하는가?” 저자에게 내준 숙제이다. 저자는 꼬박꼬박 노마디즘과 논어를 정리하여 한달뒤면 꼭 곰샘께 연락을 하였다. 호오~요거이 줄탁동시??!!
암튼 이때 정리한 것이 아까워 천의고원을 공부하고 책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곰샘이 처음 『말과사물』을 접할 때는 엉터리 번역본을 접하였다. 아주 낯선책으로 도끼로 부숴버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감성3학년때 이 책을 접하는데 편안했다. 정보가 대기권에 흐르기 때문이다.
『천의고원』을 만났을 때도 이물질 같은 책으로 한문장도 읽기 어려웠다. 그 시절과 다른 지금 해완이가 느끼는 이질감은 다르다.
서양철학은 프랑스 6.8혁명 이 새로운 혁명이후 새로운 철학이 등장했다. 『말과사물』, 『앙띠오이디푸스』가 그것이다. 이전에는 샤르트르의 실존철학이었다. 새로운 담론은 샤르트르를 권좌에서 내려오게 만들었다. 혁명은 새로운 언어의 탄생. 들뢰즈와 가타리, 푸코, 이들의 책은 마치 빵이 팔리듯 팔렸다. 당시의 지성인을 매혹시키며, 그들은 다 읽었다. 담론의 구성과 배치를 바꾸며 등장한 새로운 철학이었다. 국가는 흘러가는 것은 막고, 제도는 재코드화 시킨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읇는다는 속담의 실현, 귀동냥으로 들어 쉽게 생각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언어가 열하일기에 녹아들었다. 하여 들뢰즈와 가타리의 관점으로 본 열하일기란 칭송을 얻었다. 비하인드스토리,ㅋㅋㅋ. 실제 곰샘은 천의고원을 다 읽지 못했고, 매니저로, 주방으로 왔다갔다 바쁘셨다.
이와중에 뜬금없이 후배가 나타나 정화스님을 곰샘과 연결해 주었다. 그러곤 후배는 사라졌다. 곰샘은 정화스님을 만나면서 서양철학과 영성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났다고 한다.
정화스님의 유마경 강의를 들으면서 서양철학의 근원이 동양철학에서 나옴을 알았다. 『천의고원』끝은 道 로 끝난다. 기계(machine)은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불교 연기법의 기초가 아닌가! 동양철학을 서양언어로 해석한 것이 서양철학이다. 불교를 인류학적 지성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푸코와 들뢰즈에 대한 부담이 없어졌다.
정화스님 강의를 15년동안 졸면서 들었다. 텍스트를 몰라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귀동냥 하는 것. 그냥 버티면 된다!!
시작도 끝도 중간도 없는 것이 공부다.
15년 동안 졸면서도 마음에 들어온 발심, 10여년후 불교 리라이팅 하는 것이 노년의 계획이다. 경전은 많~이 있다. ‘경’으로 갇혀있으면 안된다. 흘러야한다. 공부는 먹고 마시고 호흡하는 것이지 따로 모셔두는 것이 아니다. 모른다고 힘들고 고민이 되지 않는다. 이런 나를 배워라!!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할 게 많다. 기계(machine)처럼 변용 접속하면 된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싶은가가 중요하지 빨리, 더 많이를 요구하는 목적과 목표가 중요하지 않다. 감이당에서도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코드를 탈코드화 하는 것! 이때에 예측불허의 에너지와 감각을 느끼고 만나게 된다.
철학이 도가 되려면 언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쓰기가 살기다. 쓰기는 언어를 만드는 작업. 지금 디지털 시대는 리좀이다. 디지털을 수목처럼 쓰는게 문제, 이미 리좀인 디지털과 어떻게 만나는가가 중요하다. 중심과 방향이 따로 없다. 패치워크.
  
이 책 전체의 대표는 유목이다. 유목민의 사고방식과 신체성을 말하고 있다.
지금 노마디즘은 일반화 되어있는 개념이다. 노마드.
그런데 연대와 저항을 향수로 하고 있다. 응사의 사투리 등. 그 다음 생산이 없다. 향수하는 이 심리는 뭘까? 멜로에서 첫사랑만 집착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권력의지가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존재자체가 머무르면 안된다.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주를 알아야 한다. 인간은 몸안에 우주를 갖고 있다. 삶을 자신있게 창조해도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홈파인 공간에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살아간 한 90대 노인이 다시 태어나면 모험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탈영토화→재영토화→탈영토화→재영토화.....리토르넬로, 의역학은 반복 속에서 차이를 만든다. 우주엔 동일한 차이는 없다. 동일성에 갇히는 순간, 생명은 없어진다. 곧 죽음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은 창조하는 것으로 글쓰기 하는 동안에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된다. 하여 들뢰즈와 가타리, 곰샘, 해완이, 모두가 쓰기를 강조한다. 삶은 쓰기다.
그래서 우리도 쓴다. 에세이를 수업후기를. 이 순간 나도 기계이고 싶다!!
 
 
 
 
 
댓글목록

생각통님의 댓글

생각통 작성일

3월 강의인데도, 후기를 읽다보니 마치 어제 들었던 것 같은! ^^ 쓰기를 해야 하는 이때 읽으니 더욱 마음에 들어오는 후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잘 읽었어요.

카르페디엠님의 댓글

카르페디엠 작성일

수업의 부활 재현!
완전 대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