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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4주차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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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재연 작성일14-03-17 10:29 조회2,49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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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테이션에서 김해숙 선생님이 안동림의 장자를 추천해주시면서 장자는 감이당의 경전이야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오강남의 장자가 이미 있었음에도, 두꺼운 책이라 읽지 않을 것 같았음에도 그 말에 이끌려 집에 오자마자 안동림의 장자를 샀습니다. (김해숙 선생님 책 장사 한번 해보시길..^^) 4번의 장자 강의를 들으면서 장자가 경전이라는 그 말이 머리 속에 맴돌았습니다. 술술 읽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고, 눈 앞에 장면이 그려지는데 막상 입 밖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강의를 들을 때는 다 알았던 것 같은 내용을 후기로 쓰려니 참 아득하고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이번 주에는 덕충부, 대종사, 응제왕 편을 배웠습니다.

덕충부는 불구자들을 통해 스승과 덕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1) 노나라 왕태는 말하지 않고 보여준다 (不言之敎)는 경지에 있는 스승입니다. 공자가 왕태의 덕을 높게 평가했던 점은 그가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왕태는 자신의 외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외발이는 불편하다 보통사람으로 살기 힘들다라는 생각을 넘어서 담담하고 고요한 경지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왕태를 스승으로 모셨던 이유는 그가 지식을 전수한 것이 아니라 이런 고요한 경지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흐르는 물에 제 모습을 비춰 볼 수 없고, 고요한 물에서만 비춰 볼 수 있다. 고요함만이 고요함을 찾는 뭇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다 p.227’ , 사람들은 고요한 물처럼 거울처럼 자신을 비춰주는 것을 보기 위해 왕태를 찾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승은 지식을 전수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 스스로를 비춰보고 자각하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길샘은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이 이 구절을 보고 이해가 가셨다고 합니다.

2) 외발이 신도가는 덕이란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편안하게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며 우리가 알던 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장자는 기존의 유교의 덕의 가치를 물음으로써 우리의 통념을 뒤집습니다. 그래서 길샘은 장자를 읽다보면 장자가 니체로 환생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죠.

3) 애태타는 가진 것이 추한 외모 뿐인 사람이지만 사람을 따르게 합니다. 그는 만물이 조화를 어지럽히지 않는 것, 잃는 것 얻는 것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경지, 외모에 매이지 않는 경지에 들어갔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살면서 힘든 일을 만날 때,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할 것인가, 그것을 안고 갈 것인가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덕충부의 인물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운명을 원망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있게 되면 우주 차원에서 고립되고 소통하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 자체를 긍정하고, 그 자리에서 나가면 새로운 관계가 생기고 어느 순간 그 폭풍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대종사는 크게 중심이 되는 스승입니다.

대종사의 통치는 간섭, 명령, 다스림이 없습니다. 진인은 소수자이면서 친구, 스승입니다. 진인들 사이의 감정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오로지 우정의 연대 뿐입니다. ‘샘이 말라 물고기가 모두 땅 위로 드러났습니다. 서로 물기를 뿜어주고, 서로 거품을 내어 적셔 주지만, 강이라 호수에서 서로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휠씬 더 좋습니다.’ 이런 무위의 사귐을 하는 존재, 각자를 잊고 즐겁게 사는 존재가 진인입니다어떤 운명이 닥쳐도 저 친구들과 새로운 길을 만들어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우정의 연대를 통해 서로 깨우쳐주고 스스로 깨우칩니다. 이런 관계는 무위의 관계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진 에고, 신념을 내려놓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진인으로 지사, 자여, 자려, 자래가 나오는데 이들은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고 사귀지 않았는데 사귀고 삶과 죽음을 모두 긍정하는 사람들로 나뉩니다. 죽음을 매달림에서 풀려나는 것 혹은 다른 무엇으로 변화하는 매듭 (자여)이라든가 죽음은 삶의 순환 이치 조용히 잠들었다가 홀연히 깨어나는 것(자래)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진인인 여우는 세상과 사물 삶을 잊는 득도의 단계를 보여줍니다. 자꾸 뭘 만들고 지으려는 세상에 대비해서 뭘 내려 놓을 것인가를 장자는 계속 묻고 있습니다.

안회는 인/, /약을 넘어 좌망에 이릅니다. 좌망은 손발이나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합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큰 트임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응제왕에서는 응당 제왕이 되는 자격을 말합니다.

그 자격 중 하나가 거울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거울 비유에서 지인은 거울과 같아 일부러 보내지도 않고 일부러 맞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대로 응할 뿐 갈무리해 두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물을 이기고 상함을 받지 않는 경지라고 말합니다. (p344) 이는 금강경의 應無所住 (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부딪히는 바에 따라 하자), 而生其心(매 순간 부딪히는 곳에서 마음자리를 일으키다) 의 경지입니다. 모든 것에 응할 뿐 저장해놓지 않는 경지입니다. 타인과 세상과 만나서 새로운 가치, 윤리를 만들지만 배치가 바뀌면 그 가치를 질문하라는 장자의 사상입니다. 이처럼 장자의 사상은 정답이 없습니다.

 

장자 첫 수업시간에 길샘은 장자를 지식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하셨습니다. 장자를 통해 나만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덕충부에서 스승은 가르쳐주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대종사는 스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대종사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행위의 주체가 되는 삶을 살면서 길을 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단념하기, 버리기, 내려놓기, 비우기입니다. 장자는 묻고 있습니다. 지금 내 삶에서 너를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게 무엇이냐, 너를 가장 연연하게 하고 괴롭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왕태가 발 하나 떨어져나간 것을 흙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았듯이 우리도 우리를 채우고 있는 가치, 에고, 신념들을 흙덩어리처럼 뚝뚝 떼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장자는 삶에서 뭘 더하는 책이 아니라 버리는 책이기에, 실제 내 삶에서 수련을 요구하는 책이기에 경전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장자를 읽는 한달 동안 제 삶에 몇 가지 사건이 터지고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야 할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할 수 있을까를 장자의 인간세를 읽으면서 고민하고, 가방에 장자를 들고 다니면서 그 기운을 받으려고 했습니다.(예전에는 성경의 잠언을 읽었는데..) 도움이 됐는지 안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순간 장자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그 상황을 돌파한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장자는 각각의 삶에 경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댓글목록

생각통님의 댓글

생각통 작성일

에세이가 끝나고 읽어서 그런가요? 내게서 떼어내야 할 흙덩어리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네요. 무엇보다 샘 이번 에세이 잘 읽었어요~ 성격책 대신 장자를, 에티카를, 그렇게 매번 만나는 책들을 경전 삼으시는 것 같아요. 그 진심이 부럽습니다. ^^

바로보기님의 댓글

바로보기 작성일

장자는 각각의 삶에 경전이 될것입니다.. 맞습니다. 좋은 수업후기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