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없는 인지 능력- 유마경 두번째 강의 후기 >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목성.png

내용 없는 인지 능력- 유마경 두번째 강의 후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양파 작성일14-03-29 12:30 조회3,126회 댓글0건

본문

                                                                                                   유마경 두 번째 강의 후기    B-3조 박경옥
 
내용 없는 인지 능력
 가전연이 부처님께 물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부처님은 ”진리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진리(眞理)란 이것이다’라고 말을 하는 순간 잇는 것처럼 보인다. 안개처럼 희미한 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삶의 보편성을 말할 때 현대 과학자들은 진리란 없는 것이 아니고 뇌가 재구성한 것이라고 본다. 비슷한 패턴을 만들어낸 것이다. 유사한 것을 많이 접촉하다보면 우리는 내부에 어떤 인상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상(相)이다. 인간은 듣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학습을 통해 끊임없이 재배열해나간다. 학습이전에는 '내용 없는 인지 능력'이 있다 .예를 들면 어릴 때는 소리의 미묘한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 학습하면서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 간다. 그러면서 표상이 생겨난다. 마음에는 내용이 없는데 배워가는 것이 학습이다. 학습하면 없던 이미지가 새로 생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면 한국어를 할 수 있고 미국인으로 태어나면 영어를 모국어로 가지게 되는 이치이다.
 
 상(相)은 구체적인 내용은 없고 이미지를 만들려고 준비하는 단계이다. 무(無)--> 유(有)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일이 벌어진다. 정리된 회로에 새로운 이미지가 계속 만들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한 순간의 표상을 진리로 추구한다. 이것은 실제 진리가 아니다. 이미지를 더하면 전에 있던 것이 없어지고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영구히 존속해가는것은 없다. 그것이 바로 무상(無常)이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이 가전연에게 답한 비유비무(非有非無)를 조금 이해할 수 있다.
 
우(宇)와 주(宙)
 패턴은 정보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정보의 고정화 능력은 공간을 구성하는 특성이다. 공간은 분할하고 측정할 수 있다. 사람은 다 다르고 외모, 개인사가 다르다. 사람이란 공통특성은 불변요소로 지칭하는 것이 있다고 가정할 때 만들어진다. 그 공통된 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고정화된 정보패턴에 시간을 입힌다. 정보 속에 시간이 들어가면서 정보를 뒤흔들며 특성을 변화하게 만든다.(예: 세월따라 미인의 기준이 바뀐다. 그럼 지금 성형하는 사람은 고정된 시간과 공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겹쳐 있게 되는 것이다. 서양에서 이것을 최초로 이야기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다.
 
 2400년 전 부처님께서 이미 알았다. 공간도 변해간다고. 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이 통합되어 있다고 본다. 공간이 시간을 만들어내기도 정지시키기도 한다. 블랙홀의 표면에 들어가는 순간 공간은 시간을 가둬버린다. 블랙홀은 변화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을 완벽하게 가두진 못한다. 우주에선 지구보다 아주 느리게 시간, 공간이 변한다. 빛은 정지시키면 사라져 버린다. 빛은 운동만으로 존재하며 시간을 잴 수 없다. 온전히 공간으로 들어가면 공간을 잴 수 없고 온전히 시간만으로 들어가면 시간을 잴 수 없다. E=mc2. 어느 한쪽이 극에 이르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비유비상(非有非無)
 이 지점에서 부처님의 ‘진리(眞理)는 유(有)와 무(無)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진리는 말하는 순간 진리를 떠난다.(너무 진리를 찾지 말라는 뜻인가.원래 진리는 없다는 말씀인가?)
 뇌과학에 의하면 표상이미지는 뇌가 해석한 것이다. 외부감각(예;피부)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보내준 정보를 뇌가 재해석하는 것이다. 몸 내부의 시냅스 연결부위엔 많은 발이 있다. 동일한 신호로, 파(波)로 외부대상을 인지하려고 움직인다. 외부도 비슷한 떨림이 있기 때문에 내부와 동일한 파장으로 공유한다. 의미를 공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외부에서 한국어를 말할 때 내부에서도 한국어로 인지한다. 공명한다.) 세포들의 그물망을 통해 동일한 파동으로, 의미를 내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용 없는 인지능력이다. 의식한다. 이것이 곧 법(法)이다. 법은 자신의 내부를 외부화하여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相)이 만들어진다. 이 만들어진 것이 인연(因緣)이다.
 
인연(因緣)
 인(因)은 내부원인이고 연(緣)은 외부의 원인이다. ‘엄마’라는 개념어가 만들어져야 ‘엄마’의 의미가 생긴다. 만들어지면서 법(法)이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갖게 된다. (각자의 엄마의 표상이 있다. 좋은 엄마, 나쁜 엄마 등)그 색깔을 구별해내지 못하면 생존에 아주 불리하다. 의(意)-->법(法)은 인과 연이 만나서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엄마는 아빠와는 다른 느낌이다. 분별이 생긴다. 옆에 아빠가 있어 엄마가 확실해진다. 인연이 곧 연기법이다.
 
유마경에 보면, 500개의 일산(日傘)이 하나로 통합한다. 500개가 다른 색깔로 보이는 것은, 한 개의 색깔이 다른 499개의 색깔과 함께 있어서이다. 하나는 500개로 따로 존재하면서 하나의 고리로 함께 있는 것이다. 1=500, 500=1 이 될 수 있다. 일산 하나 하나를 바라보는 관점이 존재하듯 한사람의 생존은 한사람으로 될 수 없다. 500개의 다른 반응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다.
 
부처는 어떻게 부처가 되었는가?
 부처는 무상(無常)을 말했다. 시간은 다르게 만드는 힘이다. 부처가 어떤 존재로만 머물러 있으면 시간이 삭제된 것이다. 부처가 ‘시간 속에서 한 존재로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스스로 자신의 깨달음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시간도 변화하고 부처도 변화한다. 변화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야한다. ‘지금, 여기‘가 부처되는 양상으로 존재해야 부처가 될 수 있다. 또 ’지금,여기’에서 변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내용 없는 인식에서 내용있는 것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학습을 해야 그 기능이 잘 발휘된다. 예를 들면 고양이가 태어나서 50일 동안 눈을 막으면 눈을 뜨고 있어도 볼 수 없다. 내부에서 보는 능력이 발현 안 되고 감춰지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깨어서 완벽하게 ‘자기’를 맞추어 가야 한다.
 
종교는 특정한 양상으로 우리를 고착화시킨다. 그 종교 외는 못 보게 한다. 마치 고양이의 눈을 가려놓은 것처럼. 그 종교에 대해 의심하면 “너 죽을래?“라는 메시지가 온다. 부처는 ‘특정한 진리는 없다. 인연에 따라 특별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정한 양상이 되면 내용 없는 인지 능력를 알 때가 있다. 새로운 학습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무늬없는 것도 있다. 자연이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시공간의 우주는 이미 부처처럼 살고 있다. 여기서 우주를 부처로 보는 사건이 일어 난다
 
불신(佛身)이 곧 법신(法身)
 자연의 특성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다. 그리하여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관점이 바뀐다. 나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 물질=생물이 된다. 생(生)과 사(死)가 따로 없다.‘ 생물이 물질화 상태로 존재한다’는 전제도 잘못된 것이 된다.
 부처가 어릴 때 아버지께 물었다. “안 죽는 방법, 생로병사에 걸리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까?” 부처는수행하면서 죽음의 표상 이미지가 틀린 것을 발견했다. 하여 학습된 잘못된 견해가 빠지고 정견(正見)이 들어온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 없어졌다. ‘죽음은 있다’를 직시하니 그런 표상의 죽음은 없었다. 그리하여 생로병사에서 편안해졌다.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젊은 부부가 스님을 찾아왔다. 스님은 부부에게 질문했다.“ 당신들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스님은, 부부는 “나의 종교는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의 종교는 남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할만한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사랑하기 쉽지 않다. 생물은 매순간 달라져 왔다. 가장 초기 생물인 박테리아도 RNA로정보를 교환했다. 사람은 비슷한데 안 맞는 부분이 있다. 상대방의 행동이 못마땅할 때 자신을 벌하는 호르몬이 나온다. 잔소리는 나에게 사랑스럽지 않은 부분을 말하는 것인데 나에게 나쁜 호르몬이 많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싫어하면 그 패턴이 강화되어 ‘내가 왜 저 사람과 결혼했는지 모르겠어’ 가 된다. 상대방을 호기심을 갖고 보면 칭찬이 나오고 나를 칭찬하는 호르몬도 강화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내 눈에 차는 것처럼 되어야 한다. 사건을 다르게 보는 훈련을 하면 불유쾌한 호르몬이 발생하지 않는다. 지혜 제일, 수보리조사는 그 칭찬을 잘했다. 비결정적 사고를 잘했다.
 
 유마경의 저자는 ‘결정적 사고’를 설명할 때 ‘ 좌선(坐禪)’을 끌어왔다. ‘훌륭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훌륭한 사람’으로 갈 수 없다. 특정한 상태(좌선)에 머무를 때 삶이 빛나는 것이 아니다. 삶은 헛것이다. 사는 것은 괴로운 고(苦)이다. 좌선이란 10살 상태에서도 20살 상태에서도 잘사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볼 때, 아내가 남편을 볼 때 비결정적 사고를 키워가는 게 좌선(坐禪)이다. 우리 몸은 60조개의 세포가 연합한 것이다. 세포끼리 서로 약속한다. ‘너는 손톱이 되고 너는 심장이 되어라.’라고. 남성 여성을 결정하는 XX,XY도 XXY,XYY,XXYY로도 될 수 있다. 특정부위에서 동성을 좋아하는 호르몬이 나올 수 있다. 린 마굴리스는‘박테리아의 성선택’아라는 말을 했다. 성선택이 방점이다. 사건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몸을 몸이라고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중생이나 부처도 따로 없다. 나눔이 생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섞어주는 것이 세포차원에 더 좋은 것이다. 모든 존재는 보이는 곳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누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안 되면 왕조(王朝)의 몰락, 사조(思潮) 의 몰락이 온다.
 
 다시한번 강조하면, ‘내용 없는 인지 능력’ 이 자아상을 만든다.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만드는 것이다. 세모가 네모가 될 수 있고 네모는 동그라미도 될 수 있다. 동일한 것은 없다. 내부와 외부가 교류하는 동일한 양상의 통로를 만들어 낼 뿐이다. 마치 환(幻)처럼.(일체의 사상에는 실체성이 없고, 오직 가상{幻]을 나타내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
 
 마지막으로 정화스님은 언어는 한번 고착되면 벗어나기 어렵다. 이미지에 갇혀있는 이미지가 된다."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종교가 되어야 한다" 힘주어 말씀하셨다.
 
 우리는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그 진리만 찾으면 잘 살 수 있을 거라 착각하기도 한다. 즐거움과 재미를 찾아 스마트폰에 고개를 쳐 박는다.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음에도 가까운 곳에서 찾지 않는다. 올해부터 남편과 24시간 같이 있어야하는 상황이 됐다.스님이 왜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매일 실천해야 하는 부분이다.  진리란 저 너머 무지개가 아니다. 비올 때 우산으로 비를 피해 감기 안 걸리도록 예방하는 게 ‘진리’일지도. 정화스님의 강의를 들으며 다시 한번 새긴다. ‘매순간 ‘지금,여기’를 잘~ 살 뿐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