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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습록 1차시 수업후기 B3조 박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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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진 작성일14-03-29 21:16 조회2,6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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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이 공사 중인 관계로 3층 공간플러스에서 강의를 듣게 되었다.
문쌤은 현대문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제도권에서의 최고단계까지 공부했지만 가장 열심히 돈 내고 공부한 것은 찾아 주질 않고 연구실에서 공부한 걸로 지금 문쌤의 생활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최근 책을 버리라는 압력에 일순위로 빠지는 책이 현대문학책. 소설 1천권을 헌책방에 기증도 했단다. 우~왕! 대단.
지금 맺고 있는 인연에서부터 공부들이 출발하는 것이고, 양명의 생각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공부를 하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양명과의 만남이 마주침으로 끝나지 않는 관계맺음(접촉)을 위해,
당황하지 않고 눈을 부릅 귀를 쫑긋 허리 꼿꼿이 펴고 앉으면 끝!
이라면 공부가 아니지. 나에게 질문이 나올 수 있는 관계맺기를 하리라. ㅋ 
 
양명학과 주자학
우리에게 왕양명이 낯설지 않은 것은 주자. 주자학(뭔지는 모르지만)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주자학의 라이벌로 양명학을 써왔다. 우리는 주자학입장이었기에 양명학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없었다. 강화학파 쪽에서 전해졌다고 우리는 배웠고, 이는 온건한 방식으로 체제 안에서 다듬고 계승하려고 한 양명학계의 우파이다. 북진좌파 이탁오(연구실의 슈퍼스타)의 분서는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밀어붙인 텍스트이다.
 
조선이라는 시공간에서 양명우파는 사실상 주자학과 만나게 되고 좌파는 불교와 만난다. 양명학과 주자학은 큰 틀로 보면 유학이다. 주자학은 동아시아 중대 사상에서 가장 견고하고 완성적인 틀을 구축했다. 그런 주자에 대해 거의 예외적이고 유일한 방식으로 주자를 뛰어넘거나 격파하거나 어떤 형식으로든 흠집나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성을 향해서 창을 휘둘렀던 학문이 양명학이다. 그러나 조선은 주자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용납하지 않아서 양명학이라는 텍스트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반면 양명학이 태어난 중국과 일본에서는 크게 번성을 한다. 메이지유신을 담당했던 근대주의자들 대부분이 양명학적 사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양명학적 사유가 전근대적인 주자학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학풍이었다. 일본이 전근대적 이상을 떨쳐낼 수 있었던 것도 양명학적 태도가 유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근대유산으로부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할 때, 무거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가벼울 수 있는 것이 양명학이다. 자기 자신으로 부터 훨씬 다른 자기를 꿈꾸는 데는 주자학보다 가벼웠다.
 
양명이 살았던 시대
양명은 1472년에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일사천리하다. 후배의 말에 절대 잊을 수 없는 연결고리가 생겼다. 양명의 학문을 년도가 말해주다니~. 주자학은 지리하다. 지리한 학문의 세계를 넘어서야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 월반이란 없는 곳이다. 그러나 양명은 그런 것 없다. 지금의 삶의 현장에서 성인의 삶에 대한 답을 구했다. 70년 이상을 산 주자에 비해 양명의 삶은 짧다는 느낌이 든다. 액티브한 삶을 더 보여 줄 것 같은 아쉬움이 있으나 모든 삶이 저마다 충분하기에 양명에게 이걸로 충분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명나라는 하급무사출신의 주원장이 세웠다. 그는 지지기반이 없었고 실질 토호세력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중앙집권적 통치를 하게 되고 황제 권력을 강화시켰다. 권력의 축이었던 사대부를 견제하고 사상적 탄압을 하면서 점점 무능하고 부패해갔다. 무능한 황제 3대면 이삼백년은 간다고 한다. 양명은 이런 혼란의 명나라 중기시대를 살았다.
 
양명의 일생을 말해주는 키워드-길, 밴드, 심신(心身), 신심(信心)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후 평생 무사로서 죽을 때까지 전쟁터로 다녔다.
명나라 병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 장군이었다. 명나라의 이순신!
화살하나 쏘지 않고 쿠데타의 주범을 생포할 정도로 전략의 귀신이기도 했다.
양명의 학문은 길에서 만난 현장의 기록들 외에는 없다. 병영에서, 말위에서 강학을 했다.
 폐허에서, 반란의 땅위에서 학교를 세우고, 유생을 모아 공부모임을 만들었다. 양명의 막사에는 늘 사람들이 붐볐다.
경전의 공부 이전에 자기가 걸어 왔던 길에서 비젼을 찾았다.
길이란 원래 사방팔방 나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 가면 길이 되는 것이다. 양명학은 미리 정해진 길이 아니다.
한 번도 예측하지 못한 예외 상황 전쟁터에서 매순간 맞닥뜨린 현장을 뚫고 나갈 때 마다 양명학의 길이 나왔다.
양명학은 실내가 아닌 실외의 야성적 학문이다.
 
제자 왕심재는 가난한 소금장수였고, 사서를 아주 조금 익힌 적 있는 평민이었다. 양명을 만난 후 그는 삶의 방식을 바꿨다. 식솔들을 이끌고 양명의 곁으로 온 것. 평생 양명을 떠나지 않고 공부했으며, 후에 태주학파의 시조가 되어 양명을 널리 퍼뜨린 것이다. 양명보다 훨씬 나이 많은 방랑시인 동라석도 며칠에 걸친 토론 끝에 그의 제자 되기를 자청했다. 날카롭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 큰 물결처럼 육중하게 다가와서 어쩔 수 없게 만드는 느낌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명의 밴드는 만들어져 갔다.
 
전습록은 이런 모습을 문답의 기록으로 보여 준다. 서로 다른 제자들의 이질적인 출렁임이 있는 울퉁불퉁한 기록이다. 논어만큼이나 활발발한 대화이다. 질문과 대답을 통해 잉여처럼 보이는 것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주자어료에서는 질문만이 필요하다. 스승의 대답만이 중요하기에 제자들의 모습은 볼 수 없고 현장의 모습도 상상이 어렵다.
 
양명의 출생은 설화적이다. 이것은 책에 자상하게 쓰여 있다.
금산사 가는 길에 지은 시 폐월산방은 어린 양명의 재능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산은 가깝고 달은 먼 곳에 있으니 달이 작다고 여겨
문득 이 산이 저 달보다 크다고 말한다
만약 사람의 안목이 하늘같이 크다면보게 될 텐데
재능이면에 건방진 면이 있었음을 알 수
도리어 산이 작고 달이야말로 광활한 것임을 있다.
 
주자학자이면서 양명의 절친 담감천은 양명의 10대 시절 5가지 중독에 대해 고발했다고 한다.
임협(조폭깡패), 기사(활 쏘는 것), 불교, 도교, 문장(사대부가 권하는 것은 경전이다)
여기서도 양명의 대담하고 자유로운 기질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격물로부터 깨달음
십대 후반의 양명은 누일재의 격물 강의에 감동을 받아 즉시 대나무 격물을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신령함은 모든 이치를 이해할 수 있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物의 이치가 있다. 그래서 누구나 이치를 탐구할 수 있으며 아직 이치를 모르는 것은 탐구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 격물설이다.
왕명은 이 대나무격물의 실패로 성인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좌절했지만 그 실패가 있었기에 후에 용장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나와 물의 이치가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출발하는 순간 나와 물의 이치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인되기를 깨달은 것. 정말 찾아야 하는 것은 성인의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삶을 구하고 있는 내 마음이라고 한다.
 
“절실하고 진실된 물음이 있는 곳에 딱 그만큼의 절실하고 진실 된 답이 있다. 이과정은 그 자체로 학문의 과정이기도 하다. 배움이란 묻는 것이다. 묻고 답을 구하는 그 과정이 배움의 실천인 셈이다.”앎은 삶이다.p50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오늘의 나보다 좀 더 나아지는 나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명은 사상마련(事上磨鍊)하라고 한다. 공부의 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이 그 장이며, 내게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들 속에서 공부가 이루어진다고. 하루하루가 내겐 다른 마주침이니 좋은 삶을 살려면 평생을 해야 한다. 뜨악! 제대로 하려면 스승에게든 내 삶에서건 배우고 묻는 행위를 해야 한다. 참 어렵지만 질문하기가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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