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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샘 - 사마천 <사기> 수업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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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필벽성옥 작성일14-04-15 01:33 조회3,109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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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수업후기 /2014-4-10
 
                         천지고금의 도리를 묻는 불멸의 역사책
                                                                                                                    박 성 옥
 
 곰샘 수업의 백미는 역시 거두절미, 단도직입에 있었다. 평소 구구한 설명을 생략하는 곰샘 특유의 화법은 속이 시원해지는 후련함을 주는데 이 날은 그 정점을 찍었다. 곰샘은 사마천이 <사기>를 쓴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마천 아버지가 ‘애비의 한을 풀어 달라’며 역사책을 써서 ‘자신을 왕따 시킨 천자에게 복수를 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의 유언은 <태사공 자서>에 실려 있는데 ‘이 해에 효무제가 비로소 한나라 황실의 봉선의식을 행하였는데 사마담은 주남에 머물러 있어 그 의식에 참여하여 받들 수 없으므로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행사에 참가하기엔 그는 너무 멀리 있었던 것이다. 사마천 집안은 대대로 주나라 왕실의 사관으로 천문에 관한 일을 주관해 왔는데 집안이 쇠락하여 사마담에게서 끊어지게 되었음을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저간의 사정을 한마디로 왕따라고 압축하는 과감함이라니!
 
궁형을 글로 이겨낸 사마천의 신체성
 
  아버지가 죽은 지 삼년 만에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어 사관의 기록과 책을 꺼내 모아 <사기>를 쓰기 시작한다. 사마천이 나이 42세 되던 BC104년에 시작하여 56세가 되던 BC90년, 14년이 걸려 <사기>는 완성된다. 그로부터 2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기>는 역사책의 전범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불멸이 있겠는가. ‘지혜의 증거를 남기려면 글을 남겨야 한다. 글 말고는 존재를 담을 그릇이 없다’는 게 곰샘 강의의 핵심이다.
 
 <사기>는 역사서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후대 사람이 따라야 할 문장의 전범이었다. 조선고문논쟁도 당송 팔대가와 <사기>의 문장을 두고 벌어진 일이다. 연암 같은 고문주의 비판자도 <사기>에서 배울 점은 ‘그 시대와 가장 감응하는 글쓰기를 하자’는 것인데 사람들이 글쓰기 패턴만 따라하고 있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사기>를 쓴 시대는 이제 막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고 철기시대에 접어든 한무제 때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조선, 환웅과 웅녀가 살았던 아득한 옛날이다. 그런데도 이미 그 안에 파란만장한 세상사가 다 들어있다. 그러고 보면 2천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136억년 우주의 역사를 보면 인간의 인지능력은 3만년동안 그다지 큰 변화가 없다. 근대인들은 사마천 시대보다 더 나아진 것처럼 착각을 하지만 오히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이 물질과 기계에 더 의존하므로 인지능력이 떨어진 셈이다.
 
 사마천이 이 책을 쓴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아버지가 하늘제사에 참여 못하게 된 원한을 아들에게 준 것 뿐 아니라 궁형이라는 결정적 발분의 기회가 온다. 사마천 나이 49세가 되던 해, 그는 이릉을 두둔한 일로 오해를 사서 궁형에 처해진다. 사대부에게 궁형은 사형보다 무서운 형벌이다. 사대부는 명예가 자산이라 명분이 있어야 산다. 그는 ‘역사를 기록한다’는 엄중한 명분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발꿈치를 자르고, 궁형에 처하는 무시무시한 형벌이 있던 시대에 그런 고통을 감당할 수 있었던 신체적 능력이 대단하다. 더 대단한 것은 그러고도 바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언제나 신체성에 주목하는 곰샘의 일관성!!! ) 사실 궁형을 당하고서 무슨 글을 쓸 생각이 나겠는가. 조금만 아파도 글은커녕 만사 다 귀찮고 우울증에 빠지기 마련 아닌가. 참 대단한 사마천이다.
 
존재를 담아내는 그릇
 
 공자, 노자, 부처와 같은 성인들은 문장이 아니라 말로 도를 전수했다. 도의 깨달음은 언어로 전승되어 왔고 말과 글의 간극이 없었다. 사마천이 처음으로 문장이 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구원을 문장으로 보여준다. 어떤 굴욕에도 불구하고 살 수 있는 자기 정당성이 글로 나타난 것이다. 이 대목에서 곰샘은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강의를 하다보면 “왜 꼭 글을 써야 하나? 독서를 통해서만 인생이 바뀌나?”라는 반문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이건 꼭 깨달아야 한다. 문장이 무엇인가는 알고 감이당을 떠나라. 글이 모든 인간이 갈 수 있는 보편적 길이다.” 이 말은 감이당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들을수록 새삼스럽다. 더구나 에세이 제출이 코앞에 닥친 지금으로서는.
 
 사마천의 발분이 형벌을 준 황제에게 꽂혔으면 아마 죽었을 거다. 그는 살아서 당대까지의 모든 사람의 삶을 기록하며 끊임없이 묻는다. 천지고금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진리와 지혜는 글로 써야만 기억된다. 유학자는 문장으로만 육체의 제한성을 벗어나 불멸한다. 불교는 도를 불립문자로 보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깨달으면 끝난다. 도를 전수해주고 해탈하면 된다. 아무리 권세를 휘두른 권력자에게서도 글이 없다면 배울 수가 없다. 진시황을 배우려 해도 사마천을 읽어야만 한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했어도 책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기억해서 복원했다. 공자의 집 벽에서도 숨겨둔 책이 쏟아져 나왔다. 고문경학을 기억으로 재구성해서 복원한 금문경학을 대조해보니 틀려서 진실을 밝히려고 문장과 문장이 만나 다투면서 역사가 흘러간다.
 
 <사기>에는 사생활과 공적인 것 사이에 경계가 없다. 진시황에 대한 기록에도 출생의 비밀이 들어있다. 여불위가 왕에게 바친 첩의 뱃속에 그의 아들이 자라고 있었던 것. 그 아들이 태어나 나중에 진시황이 된다. 그 소문이 돌아 진시황의 콤플렉스가 되자 아들의 압박에 의해 여불위가 자결하게 된다든지, 너무나 몸이 뜨거웠던 그의 생모를 여불위가 중국판 변강쇠인 노예에게 주는 장면 등 기막힌 드라마가 <사기>130편에 들어있다. 자객열전, 음식이 후지다고 목 찔러죽는 식객열전, 재물을 풀어 3천명의 빈객을 먹여 살린 맹상군 이야기, 사회적 루저였던 유방이 부인 여태후 덕분에 한고조가 되었지만 그가 죽고 나서 여태후가 척부인을 인간돼지로 만든 이야기 등등 드라마틱한 인간사가 무궁무진하다. 사마천은 인간의 질투와 욕망, 부귀공명, 전쟁과 살육,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고 있다.
 
 아무튼 사마천은 발분 때문에 글을 쓴 게 아니다. 천하고금의 도리를 묻기 위해 사실에 근거해서 썼다. 수천년 역사의 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간추릴 것인가. 압축하는 것에서 한 문장 한 문장이 엄청난 내공을 가진다. 압축을 해야 여백이 생기며 생략된 부분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가 해석하면서 자신을 투사해 본다. 그러면서 독자와의 공감이 형성된다. 이게 문장의 도이다. <사기> 안에는 모든 고사의 원전이 들어있다. 그는 고사성어의 언어를 창조했다. 사마천은 노장 사상의 도가에 가까웠다. 역법을 배운 집안이어서 자연의 이치를 기준으로 천하가 움직이는 논리로 인생사와 왕조사를 꿰뚫었다. 사마천은 모든 제자백가의 의미와 한계를 드러냈다.
 
사기열전은 왜 백이숙제로 시작됐을까
 
 사기열전은 백이숙제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들은 고죽국의 왕자였다. 셋째 아들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자 싫다고 떠난다. 첫째 아들 백이도 왕이 되기 싫다. 할 수 없이 둘째가 왕위를 계승하지만 곧 나라가 망한다. 백이숙제는 주나라 문왕을 찾아간다. 위수 강가에서 생계형 낚시를 하던 강태공을 재상으로 발탁했던 그 왕이다. 가보니 마침 문왕은 죽고 그 아들 무왕이 은나라 정벌에 나서려 한다. (모든 폭군에는 경국지색이 있다. 은나라의 주왕이 달기에게 빠져 주지육림하는 것을 정벌의 명분으로 삼는다.) 백이숙제는 무왕을 말리다가 안 들으니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는다. 백이숙제는 별다른 업적이 없다. 성인반열에 든 무왕을 말린 것뿐이다. (중국의 7대 성인은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 그런데도 왜 사마천은 그들을 열전 맨 앞에 썼을까.
백이숙제는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는 것도 폭력이라고 보았다. 공자는 仁으로 仁을 구했으니 그들에게 무슨 원망이 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왜 원망이 없었겠느냐고 한다. 또 공자는 안회를 유일하게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했지만 안회는 가난했고 요절했다. 사마천은 묻는다. “이것이 하늘의 의리라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하지만 곰샘의 질문은 달랐다. 그렇게 불우했는데 안회는 어떻게 학문에 열중할 수 있었지? 공자는 원조백수에다 출신도 허접했는데 어떻게 성인이 되었지? 그들의 인생역전이 더 놀랍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마천의 질문을 거꾸로 해봐야 한다고 했다. 항우나 한신처럼 높이 올라간 사람들도 모두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유일하게 예외인 사람이 천수를 누린 도척이다. 이것이 진짜 좋은 삶인가. 도척은 도적으로서 천고에 이름을 남겨 끝없이 기억되며 욕을 먹지 않는가.
하늘의 이치는 고루 돌아가지 않는다. 하늘과 땅과의 간극이 있어 하루에도 일교차가 있다. 하늘과 인간과의 사이에도 간극이 있다. 그러니 인과응보처럼 1대1 조응이 안 된다. 이 ‘어긋남’이 있어야 도의 길이 있다. 백이숙제는 무엇을 얻기 위해 한 게 아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하기도 하고, 착한 일을 해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기도 한다. 최고의 지성인 연암이 백이에 대해 쓴 글을 읽어보면 이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암송대회를 앞두고 외울 것이 태산 같은데도 그 수수께끼가 궁금하여 연암집을 읽어 보았다. (슬프다.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백이가 무왕을 비난한 것은 그의 거사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리를 밝혔을 따름이며, 무왕이 백이의 봉분을 만들어주지 않은 것은 그를 잊은 것이 아니라 그의 의리를 밝게 드러냈을 따름이니, 천하와 후세를 염려한 점은 똑같았 다. (「연암집 제3권」백이론, 88쪽, 돌베개)
 
보편적인 인간의 길
 
  강의의 결말은 글쓰기로 향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장을 관통하는 일이관지가 있어야 한다. 거울로 보는 낱낱의 사실을 구슬로 꿰는 일이다. 그 어떤 거울에도 내가 투사가 된다. 그 거울을 깨끗하게 해야 내가 보인다. 거울을 닦는 일이 글을 쓰는 일이다. 글은 도를 싣는 그릇이다.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사이에 인간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글쓰기다. 글쓰기는 원초적 본능이면서 보편적인 길이다. 글에 대항할 만한 인문(人文)이 없다. 음악이나 미술은 특별한 재능이 그 쪽으로 쏠려야만 가능하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에게는 글 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글을 배우고 책을 읽는 것이다. 글을 읽지 않고 천지자연과 소통하는 길은 없다. 글만이 보편적인 인간의 길이다.
 강의를 듣는 내내 배꼽잡고 웃느라고 흥겨웠다. 분명한 것은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꼭 써야 하나?  그럴 것이다. 그래야 한다. @
댓글목록

생각통님의 댓글

생각통 작성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러운 서술 능력... 정말 갑이십니다~! 에세이는 끝났는데, 저 혼자 안 끝난 건가요?! 1학기 글들을 읽어대고 있습니다. ^^ 그 정신없는 가운데 수수께끼를 풀겠다는 샘의 집념이 보이는 듯해요~ 다음에 연암집을 함께 읽으며 풀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방학, 잘 보내세요~

필벽성옥님의 댓글

필벽성옥 작성일

오타 신고합니다.  여불위가 부인을 중국판 변강쇠인 '노예'에게 준다를 '노애'로 수정해서 읽어 주십시오. (댓글이 달리면 본문 수정이 안되서요. 죄송)

동춘년님의 댓글

동춘년 작성일

샘 그냥 이거 에세이로 올리세요 ㅋ 왜 글을 써야 하는지 글과 삶은 하나라는 거 다 보여주고 있잖아요 ^^

모두가 암송과 에세이부담때문에 쓰기 싫다는 거 기꺼이 받아주신 우리의 조장님 감사합니다.
얼마나 암송을 잘 할지,헉 에세이때 얼마나 안 깨질지 흠 ... 조장님의 독려가 무섭습니다 ㅋ

필벽성옥님의 댓글

필벽성옥 작성일

암송대회에다 에세이를 앞두고  마음이 바쁠텐데 후기를 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

단주님의 댓글

단주 작성일

후기가 정말 재미 있어요.  곰샘 강의의 핵심이 잘 드러나 있으면서도 술술 읽히네요. 에세이의 주간에 쉽지 않은데 이렇게 올려 주시니  큰 도움 받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