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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과 윤리 사이 <연애의 시대> 강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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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파 작성일14-05-21 19:14 조회2,4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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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질문하세요.” 한 순간 썰렁하다. 하지만 목성엔 히든카드가 있다. “자! 1조부터 시작 하세요.” 하면 암송이든 질문이든 나온다. 곰샘은 감기가 걸려 목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연애의 시대》를 ‘리듬’이란 한 단어로 관통하며 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 쾌락과 윤리 사이에 접점이 가능한가? ”
 곰샘은 최근 경험을 이야기 한다. 소리나 생각도 감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들어온다. 지방 강의를 갈 땐 기차를 많이 타는데 한 시간 사십 분 이상을 타고 가니 어떤 책도 집중이 안 되었단다. 책을 읽는 것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끌어당기는 힘, 수렴하는 기운이다. 기차 안에서 발산도 수렴도 안 되는 멍한 상태였다. 그런 중에 한 순간 ‘낭송 고전집을 만들어 볼까. 도서관에서 낭송 오디션 대회를 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활동량이 많을 땐 생각이 안 나는데, 무의식, 비운 상태에서 오히려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근대는 너무 올인한다. 열정, 파토스는 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늦기 전에 낭만을 불태워야 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강렬하고 섹씨한 여성이 나타나 나를 불태워 주기를 바란다.근대는 동양 사상, 불교를 인정하지 못한다. 노자 철학을 가르치면서 “꿈을 가져라. 좋은 대학을 가서 의사나 검사 고위관료가 되어라” 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는 인과 관계로 연결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살다 보니 그렇게 된 일이 많다. 누가 “20대의 꿈을 40대에 이뤘어요” 한다면 허구다. 어떤 사람은 ‘부모가 학대했다’고 생각하는데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을 의도해서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건의 시작이 있고 종말이 있다고 엮는다.
 
 기독교는 ‘심판의 날’이 있다. 불신 지옥 ,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고 하는 얘기를 지하철에서도 들을 수 있다. 그렇게 외치는 그 사람은 피해 갈 수 있는가? 동양의 우주론에선 영원한 것은 없다. 발전론으로 세상을 본다면 유토피아나 천국에 도달해야 한다. 인간만 잘 사는 유토피아는 없다. 하늘의 해와 달이 인간만을 위해서 움직이는가. 기독교에는 양생술이 없다. 감정을 격하게 써야 한다. 특히 한국 개신교는 다이내믹 코리아이다. 1907년 부흥회가 시작됐다. 신앙심은 3.1운동(1919년) 뒤 연애 욕망으로 갔다. 20c 초 한반도는 연애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신앙심은 연애, 곧 성욕과 연결 되었다.
윤리란 양생이 있어야 한다. 계율이 엄격할수록 탈욕을 못한다. 억압되면 변태가 된다. 생리적 욕구의 변환은 양생, 진리에 대한 욕구가 있어야 할 수 있다. 성욕이 작동하면 다 갖고 싶어진다. 사랑은 그 사람의 삶을 완성시켜 주는 것인데 소유욕에 빠지면 사랑이 물 건너가고 진리와도 안 맞다.
 
 서유기의 손오공을 보자. 그는 분노 조절이 안 되어 고생을 쌔빠지게 한다. 사오정은 별 감정이 없어 고생도 안한다. 욕망의 방향도 없다. 저팔계는 식욕과 성욕 조절이 안 된다. 그런데 삼장법사는 저팔계를 더 편애하는 것처럼 보인다. 삼장은 원양을 보존하고 아름다운 요괴에게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지만, 저팔계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어야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섹슈얼리티를 벗어나야 다른 사람을 담백하게 대할 수 있다.
 
만해와 소월의 작품을 어떻게 ‘여성되기’로 풀었는지요?
 <만해집>과 <소월집>은 사설시조와 섹슈얼리티 대담하는 잡지에서 연락이 와서 읽었다.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보니 교과서에서 보던 고정관념이 다르게 보였다. 만해는 ‘님’을 불교적으로 해석했다. 기른 것은 다 ‘님’이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불교 해석으로 끝까지 밀어 붙였다. 우주를 여성성으로 보는 탈영토화였다. 만해는 ‘사랑하면 그것이 곧 구도다’라고 생각 한다.
 소월의 시는 길 위에 있다. 돌아갈 집도 거처도 없다. 거처 없는 소외감은 ‘서도 잡가’의 정서다. 19c ‘맹꽁이 타령’의 특징은 삶의 무상성이다. 무상과 애상은 자본주의에 포획될 수 없는 마이너리티다. 소월의 시는 어떤 곳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간다는 것을 지연시키고 그리움과 애상 그 자체에 머문다. 만해와 소월은 시적 잠재력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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