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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수업후기 B조 안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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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화노인 작성일13-02-22 14:16 조회3,7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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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지음, 박석무 편역, 창비 출판사
배운다는 것은 나의 감각을 바꾼다는 것이다.
너무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 되는 게 재미있는 것 즉 감각적 혁명을 갖는 것이다.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도 그 노동의 시간대로 움직이고 있어 늘 지쳐있다. 이것은 그 감각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총체적 감각은 기능적이 아니다 예로 힘든 일을 끝내고 나면 아픈 것.
이런 것들은 감내하는 힘 즉 작업을 하는 힘, 감각적인 것을 즐기는 힘이다.
감각적인 것은 그 일을 즐기며 자발적으로 행한다.
감각들을 바꾸는 과정들을 일상생활 속에 배치를 하면 수행이 된다.
<글쓰기의 존재론>
글이 곧 존재이다. 저자와 책을 보는 것이다.
글을 읽을 때 글이 이 사람에게 무엇이었는가?로 접근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나 1836년까지 살았다. 22세에 소과에 합격하면서 정조를 만났다. 정조의 탕평책은 당시 남인의 최고봉 채제공, 성호 이익의 종손이자 천재 이가환, 신진관리 정약용등 남인이 100년 만에 배출한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18세기에는 청나라를 통해 서양이 들어왔다. 조선은 당파(성리학적으로 도가 어느쪽이 더 가까운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보다 갑자기 들어온 서양에 쏠렸다.
서양이라는 빛은 처음엔 과학 기술에 묻어서 천주교가 왔는데 노론은 천주교를 불교의 아류라고만 생각했다.
이때 정약용의 형제들이 천주교에 관여했다.
약현, 약전, 약종(독실), 약용, 맏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개벽성조),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이며 매형 이승훈, 이승훈의 처남 황사영이 있었다. 집안 모두 천주교에 연루되어 있었다.
집안 내력 자체가 조선시대에서 용납할 수 없었던 조건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천주교에 대한 처벌이 높아질수록 신자도 높아졌다. 천주교인들이 제사를 거부하는 일로부터 정약용은 천주교를 씻었다고 고해 성사를 했다. (정조의 보호)
1800년에 정조가 갑자기 죽자 1801년 신유박해가 일고 정순왕후는 ‘서교를 믿으면 코를 다 베어 버리겠다’는 포교를 내렸다. 많은 신자가 잡혀 오고 다산은 자기가 진짜 열심히 배교 했음일 진술했다. 그러나 다산의 옛 친구가 적으로 나타났다. 그 친구들은 남인이면서 같이 천주교를 믿었으나 다산에게 악감정이 있었다. 당파와 이념도 아닌 자기의 권세와 비교심 때문이었다. 이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균열(거대한 음모)이었다. 예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 ‘사랑하지만 어쩔수 없이 죽일 수밖에 없었다’가 아니라 벌써 미움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죽이게 된 거대한 음모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노론과 다산은 적대적이지 않았다.
처음 경남 장기로 귀향을 가서 편지를 쓴다.
가족들의 비극적 상황에서 귀향을 가는데 ‘길 떠나는 나날이 몸과 마음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니체의 <위대한 건강>이 생각난다.-고쌤 왈
다산은 나이 40세의 꺽인 상황에서 자기를 냉철하게 보고 있다.
이곳에서 예송, 예학, 고전등의 책을 썼다.
이무렵 조카사위인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다산초당으로 유배를 보낸다. 이 또한 옛 친구들의 음모였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어민들과 살면서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귀천이 없는 모습으로 살았다. 복성제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부인과 아들 둘을 얻었다. 신분의 자의식을 완전히 버린 것이다. 새로운 삶을 살았다.
다산은 다산 초당에서 드디어 하고 싶었던 완벽한 학문을 하기 시작했다.
왕의 사랑을 받을 때 억눌렀던 학문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힘들 때 가장 하고 싶었던 학문을 하다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여유당 전서><흠흠심서><목민심서>등을 썼으나 학문적 교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흑산도에 있는 형뿐이었다.
<목민심서>는 수령이 지켜야 할 원칙만 쓴 매뉴얼이다.
수령이 지켜야 할 원칙을 모르면 수령이 될 수 없고 수령이라면 그냥 지켜지는 것일진대 왜 굳이 이런 매뉴얼적인 책을 썼을까? 계몽주의적 원칙이다.
계몽주의는 ‘상대는 아무것도 몰라, 나만 알아’식이다.
다산은 미래에 자기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0세기 초 문장의 대가로 추서 되었다.
다산의 글은 다산의 존재에 모든 것이었다.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형처럼 신분의 자의식을 탈피할 수 없어 스스로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다산으로 하여금 나는 무엇을 하려고 남산에 왔는가? 글쓰기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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