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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후기 (4~6조) 튜터 : 문리스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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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생각통 작성일14-07-13 12:24 조회3,0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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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발표에 앞서 당부하신 말씀은요~
첫째, 모든 코멘트가 ‘다 내 얘기’라고 생각하세요!
둘째, 참고해야 할 텍스트가 있고, 힘들어도 ‘참고’ 읽어야 할 텍스트가 있습니다.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샘의 개그 본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만... 텍스트로 녹여낼 수는 없다는 게 아쉽네요. 아마도 이 이야기는.. 참고해야 할 텍스트를 자기의 생각인 양 쓰게 된 것(혹은 될 것)을 염려해서 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셋째, 에세이 발표 후엔 자기 반성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9주라는 텀이 생기면 그 동안 슬금슬금 자기 습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이에요. 그래서 또 똑같은 글을 써서 내는 겁니다. 그만큼 신체성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신체를 바꾸지 않으면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에세이의 운명과도 직결되네요. 문샘은 자신의 에세이를 다시 한번 고쳐 쓰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슬쩍 흘리셨는데요. 늘어지고만 싶은 방학이지만, 한번 고쳐보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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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글 읽어주시고 코멘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차례차례 가보겠습니다. 가감없이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들은대로 막~ 적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 죽이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죠? ^^
 
1. 이소은 <자연과 멀어진 그대>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제목을 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건 스스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자기고백이기도 하지요. 선생님들의 코멘트를 듣고 ‘고민해보겠다’고 하시는데, 공허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로부터 시작된 고민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공부가 됐든 글이 됐든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먼저, 이 문제와 대결해 보세요. 
 
2. 조용남 <국가주의 넘어서기>
평생 관료로 지낸 조용남 선생님께서 “제도를 바꾸자!”라고 결론을 내실 것 같았는데, “관료주의를 벗어나자”고 결론을 내셔서 놀랐습니다. 무엇보다 주제와 연결이 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문제를 꿰뚫어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여 좋았습니다. 신채호의 이야기만으로 풀기에는 힘들었을 거예요. 크로포트킨, 아나키스트 등에 대한 공부가 함께 되어 더욱 풍성한 글이 된 것 같습니다. 다만, 모두가 글을 읽기 어렵다고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다음 글을 기대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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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생님께서 공문서를 읽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 가장 많이 나온 이야기는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진심이 느껴지는 글을 쓰시는데, 다만 어렵다고. 평소 대화할 때는 더할 수 없이 유쾌한데(언니라고 불릴만큼요) 글만 쓰시면 다가가기엔 너무 먼 그대가 되어 버리는! ㅋ
 
3. 성승현 <이광수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광수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한 줄로 요약해 주세요”라고 묻고 싶어요. 제목과 소제목 사이의 간극을 메우지 못한 글이 되어 버렸습니다. 소제목을 통해 문제의식(고민)이 드러나야 하는데 잘 보이지 않습니다. 초반에 문제의식이 나오는가 싶었지만, 글이 전개될수록 모호해지네요. 

 
4. 김지숙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다>
도련님을 아큐의 정신승리법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얘기해볼게요. 아큐와 도련님이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또한 같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아큐는 ‘약자’의 개념을 인지해야 볼 수 있는 캐릭터이고요. 도련님은 자신의 우월함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서 상대와 거리를 만드는 인물이기 때문에 두 사람을 연결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칭찬하고 싶은 것은 역시 텍스트에 대한 성실한 분석이에요. 지난번 <장자>에 이어 <도련님> 역시 텍스트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네요. 하지만, 자의식을 벗어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글이 편안하지 않아요. 지난번 글에서는 장자와 함께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는데, 지금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선생님과 분리된 듯한 느낌, 그러니까 바깥에서 ‘나’를 바라보며 쓴 글 같습니다.
 
5. 박은영 <근대로 보는 도련님>
부제로 쓸 만한 것이 제목이 되었습니다. <근대로 보는 도련님> <도련님을 통해 본 근대> 어떻게 해도 제목이 되지 않아요. 근대의 어떤 지점을 보았는지를 제목을 통해 말했어야 했습니다. 이 글은 마치 도련님을 다시 설명하고 있는 듯합니다. 도련님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유용한 텍스트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글이에요. 글쓰기의 기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완성된 글로 나온 셈이에요. 글을 읽을 때, 표면에서 머무르지 않으려면 훈련하면 됩니다.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내 언어를 만드는 일입니다. 단지 많이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형체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곰샘이 수많은 텍스트 중에 ‘위생’이라는 단어를 건져 올렸듯이 말입니다.
 
6. 문호성 <두 스님 이야기>
삼장법사와 원효대사의 이야기를 연결한 것이 무척 신선합니다. 첫 느낌은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끝을 맺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두 개의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렇고, 그래서 제목 또한 나올 수 없습니다. ‘두 스님 이야기’가 제목이 된 것은 너무 당연하지요.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라고 했는데, 이것은 너무 필연적이어서 글 자체로는 매력을 찾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달라 보이지만 같은 이야기라고 하면 호감을 갖게 되지요. (이것은 해석을 달리 한 것이니까요) 차이를 말했지만, 그 차이는 읽는 우리도 이미 알고 있지요. 차이의 ‘의미’를 따져 물었어야 했겠죠. 아쉽습니다. 
 
7. 안은숙 <도련님의 당당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제목과 소제목 사이에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큰 장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글로써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쉽네요. 막무가내 캐릭터가 기요라는 지반 위에서 당당함으로 가는 과정,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도련님은 막무가내>라는 소제목으로 살펴보면요. 글에 나타난 ‘막무가내’를 서술하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되고, 막무가내가 가진 의미를 뽑아내야 합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그 한 발을 내딛어야 다른 글을 쓸 수 있습니다.
 
8. 안정미 <욕망의 다른 출구 찾기>
선생님의 글은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텍스트를 해석했기 때문에 토론 역시 선생님의 글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텍스트에 동의를 하느냐 않느냐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자신의 글을 썼다는 걸 의미합니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요령을 알고 있습니다. 결말을 내는 힘만 기르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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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좋아서인가요. 코멘트가 굵고 짧았습니다. ^^
 
9. 강미란 <내 안에 있는 근대성>
글에서 고집이 보입니다. “나는 안 바뀌겠다”고요. 부딪힘이나 충돌이 생기면, ‘그래도 나는…’이라는 마음이 보입니다. 이를테면 순결에 대한 관념 대해서도 내가 생각하는 순결에 대한 마지노선이 있고, 그것을 깰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만일, 설득당하고 싶지 않다면 논리를 가져야 합니다. 내 문제에 대입했을 때 감상적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으로 옮겨서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 김지현 <왜 삼장법사는 주인공이 되지 못했나>
제목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삼장법사가 주인공이 아닌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오달수가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닌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이런 제목이 의외로 다가오네요. 유일한 인간인 삼장법사를 주변인으로 만든 것에 의문을 갖고, 이에 대해 글을 쓴 것은 색다른 시선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글의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소제목이 두 개인데, 그 둘 사이의 균형이 맞지 않아요. 글에서 삼장법사보다 프루도의 비중이 더 큰 것도 같은 맥락이구요. 그리고 소제목의 ‘사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사이’란 것이 환기시키는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 실체와 소설 인물 사이에서 그 ‘사이’의 의미를 찾아보세요. 이 글은 아직 아이디어만 있습니다. 글이 삼장법사와 프루도에서 끝나면 안 되고, 서유기를 통해 탈근대화까지 도달해야 글이 끝나는 겁니다.
 
11. 오기화 <옛것에서 잃어버린 것은 없는가>
이 글은 『조화석습』이 없어도 쓸 수 있는 글입니다. 추억에만 있는 휴식이라든지, 자신의 길 당당하게 가기라는 메시지는 루쉰의 글에서 견인되어 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루쉰’이라는 단어를 빼고 글을 보면, 이 글이 루쉰의 물음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생깁니다. 글과 인용의 연결성이 보이지 않고, 표면적으로 연결한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이럴 때에는 글을 온전히 느껴보는 게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루쉰은~’이 아니고 ‘내가~’로 바꿔 글을 읽어보세요. 그렇게 루쉰이 되어야 그 사이를 메우게 될 수 있을 겁니다. 텍스트를 붙잡고 늘어지던가, 아니면 내 문제를 완벽하게 드러내던가 해야 진짜 글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표면만 건드린 셈입니다. 어느 쪽으로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어요.
 
12. 이복순 <자연의 이치를 따르라>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텍스트가 증발되었다는 겁니다. 텍스트를 억지로 끼워넣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쓰는 것이 좋지만, 이것도 습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곰샘의 책은 참고서입니다. 참고 읽어야 할 것은 원 텍스트이구요. 이것을 구별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지금 이 글은 잘 할 수 있는 것, 쉬운 것만 선택해서 쓴 것입니다. 이 반대의 일을 해 봐야 합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텍스트를 분석하는 일을요. 책은 무작정 반복해서 많이 읽는다고 해서 답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내 고민을 갖고 읽어야 책이 대답을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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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가 좀 늦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을텐데,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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