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근영샘- 몸의 인지과학 1강 후기 (상반부)입니다. >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목성.png

신근영샘- 몸의 인지과학 1강 후기 (상반부)입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필벽성옥 작성일14-08-09 18:16 조회2,889회 댓글1건

본문

신근영샘-<몸의 인지과학> 1강 후기 (2014-8-7)

 

발제주의, 지관, 자가조직화의 생명원리

박 성 옥  

분명 한글로 된 책인데 읽어도 독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감이당 텍스트 중에서 가장 답답함을 느낀 책이 <몸의 인지과학>이다. 철학개념의 바탕이 없어서인지, 과학적 소양이 없어서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게 문맹이나 다름없었다. 마음과 자아에 대한 생각이 왜 진화론에 대한 입장차이로 이어지는지도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신근영샘은 이 책만 이해하면 감이당을 하산해도 된다며 강의를 시작했다. 같은 책, 다른 해석력!!! 짱이다.

  우리는 마음을 먹어야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발심을 하고 수행을 해서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발심을 하는 순간 이미 깨달은 자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이 먼저, 행동은 나중이 아니라 마음이 곧 행동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하는 주체가 따로 있고 그 주체가 행위를 하게 하는 DNA의 중앙처리장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주체에 관한 생각이 진화론과 자연부동설과 연결이 된다. <몸의 인지과학> 저자인 바렐라와 그의 스승 마뚜라나는 세계와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얽혀있다고 주장했다. ‘세계에서 깨어나는 마음마음이 깨우는 세계가 하나이다. 

1. 마음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인지과학이란 마음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방식은 오래된 서양역사이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켜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고민해왔다. 이 때 세계를 인식하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서양 중세에서는 몸과 마음의 문제를 모두 신의 대리자인 교황이 책임지고 있었다. 앎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교황이 성서의 해석권을 가지고 있었다. 성서의 해석권이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교황청이 부패해지자 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해졌다. 애초에 과학이 기본적으로 신을 등지고 나온 것은 아니다. 15~16세기에 다른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고, 종교를 개혁하려고 나온 새로운 사상가가 과학자들이다. 신은 성서라는 책과 자연이라는 책을 썼다. 자연에는 신의 뜻이 어려 있다. 프란체스코수도원에서 자연학을 연구하면서 수학, 과학이 발달한다. 정신은 신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지만 몸과 물질은 신이 만들어 낸 것이라 신과 직접 통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물질이 정신보다 하위라는 구도가 플라톤 이래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왔다.

  플라톤은 세계를 창조한 장인(데미우르구스)이 설계도를 가지고 진흙(물질)에 세계를 새겨서 만들었다고 본다. 이 설계도가 이데아다. 그러나 장인이 마음대로 물질에 설계도를 새길 수가 없다. 물질에도 각자 성격이 있어서 장인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물질을 설득해야 한다. 이렇게 설계도대로 잘 안 되는 게 우연과 필연이다. 희랍철학에서 우연과 필연은 같다. 설계도를 새길 때 물질의 성격을 피할 수 없으면 필연이다. 물질의 필연성이 설계도의 입장에서 보면 우연이다. 설계도는 완벽한 완성체이지만 물질이 안 따라준다고 본다. 우리가 머릿속에 의지는 충천하나 몸이 말을 안 듣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플라톤주의자이며 데카르트주의자이다.

  사람들은 정신은 맑고 투명하며 오류가 없는 반면 육체는 더럽다고 생각해왔다. 더러운 육체를 씻고 신의 세계로 가겠다는 일념으로 고행과 금욕주의를 수행했다. 신학자들은 자연학자들이 육체를 연구하는 것을 지원했다. 자연학자들이 이 연구를 하도록 담론을 만들어 준 사람이 데카르트다. 17세기에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주체는 육체와 마음을 이원론으로 보는 근거를 제공한다. 마음은 교황청이, 물질은 자연학자가 연구하는 것으로 분리되었다. 이 때의 자연학은 나와 자연이 분리되지 않았다. 내가 곧 자연이며 생명이었다. 이런 자연학이 후대로 오면서 정신은 인문학이, 물질은 과학이 담당하는 것으로 갈라진다. 과학자들은 마음을 비물질로 보고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19~20세기에 들어오면서 양자역학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관찰한 다는 것은 객관적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이중슬릿실험에서 입자와 파동이 바뀌는 것을 보았듯이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관찰대상을 규정한다. 내가 어떻게 실험하느냐에 따라 대상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는 우리가 던지는 질문에 따라 자연이 보여주는 모습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양자역학 덕분에 과학자들은 객관적인 세계관찰이 가능할까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다. 이것이 인지과학, 신경과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등으로 진행되며 마음이 과학 안으로 들어온다.

2. 표상주의 vs 주관주의 vs 발제주의

  마음을 연구할 때 가장 큰 문제는 표상주의. 표상주의는 세계가 나로부터 독립해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지가 표상이라는 생각의 배경에는 세 가지 가정이 있다. 첫째, 길이, , 움직임, 소리 등과 같은 속성이 존재하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 둘째, 우리는 그런 속성을 내재적으로 표상하여 그것들을 마음속으로 재현한다. 셋째, 이런 일을 하는 독립적인 주관인 우리가 존재한다. 나는 이 세계를 관찰한다. 나는 세계에 대하여 서있는 주체이다. 여기서 ‘~에 대하여라는 말이 무척 중요하다. 외부의 무엇이 내 안에 들어와서 (감각되어서) 머릿속에서 재현된다. 재현이 곧 표상이다. 대상을 받아들일 때 나는 수동적이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다. 같은 그림을 보면서 누구는 오리로 보고 누구는 토끼로 본다.(게쉬탈트그림) 대상은 보는 대로 달리 보인다. 어떻게 볼지는 사회적 지평 속에서 배운다. 태어난 아이는 무엇을 보고 그것을 뭐라고 부를지를 배운다. 무엇을 어떻게 볼지 배우지 않으면 눈을 떠도 볼 수가 없다. 시대적으로 지각 자체가 달라진다. 우리 안에는 감을 느끼는 능력, 감각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접하는 것을 모두 다 감각하는 것이 아니다. 내부에서 응하는 작업이 있어야 감응한다. 수동적인 상태로는 감각하지 못한다. 어떤 것도 나와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있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플라톤은 표상을 이미지라고 불렀다. 칸트의 표상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뇌에 정보가 들어오면 그것을 처리하는 자아를 통해서 생각이 나오는 시스템으로 생각한다. 객관적 정보를 입력하면 내 안의 중앙처리장치를 통해 우리가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도 일종의 표상주의에 해당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표상화(이미지화) 되지 않기 때문에 의식으로 떠오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표상을 갖지 못한 무의식을 표상화 시켜주는 게 정신분석이다. 표상화되지 않으면 인지가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표상주의의 정반대 입장은 주관주의. 세상에 객관적인 것이 없으니 내 맘대로 본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현상학이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지향성이란 내가 평소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이 어느 날 엇? 뭐지? 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내가 꽃이라고 부르자 그는 내게 와서 꽃이 되었다) 그 때 비로소 대상이 눈에 들어오면서 그 대상도 존재하고 대상에 대한 내 생각도 생긴다. 지향성이 있을 때 주체와 객체관계가 생겨난다.

  하지만 자아는 표상에 갇혀있다. 표상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일 거라는 믿음이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우리에겐 가족이나 학생, 사랑 등에 대해 자기만의 그림이 있다. 그래서 학생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시대에 따라 표상은 달라지지만 우리는 하나의 표상과 틀이 있는 것처럼 얘기한다. 영화 <다크나이트>를 보면 형사가 아무리 치밀한 작전을 세워도 악당이 빠져나간다. 나중에 악당에게 어떻게 그 계획 사이를 빠져 나갈 수 있었는가?”를 묻자 악당은 답한다. “나는 한 번도 너의 계획을 빠져나가겠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 네가 만든 스키마(도식)에 들어가지 않아서 내가 빠져 나간다고 생각했나봐.”라고. 형사는 자기만의 표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분석의 <자동연상법>도 마찬가지다. 무의식을 밝히기 위해 연속해서 떠오르는 표상을 계속 얘기하게 한다. 정신분석을 받는 순간 무의식과 표상을 연결시킴으로써 다시 표상에 갇히게 된다. 이를테면 자꾸 지갑을 열고 닫는 사람에게 그 행위가 성적 트라우마라고 규정해 버리면 그 사람은 그 때부터 지갑을 보면 성을 떠올리게 된다. 표상에 갇히는 것이다. 이렇게 표상에 등록되지 않으면 무의식은 불안의 근원이 된다. 사회에서도 표상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감이당에서 공부하면 뭐가 되느냐고 묻는 질문에는 공부가 곧 돈이라는 표상으로 등록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치부하는 메커니즘이 들어있다. 사람들은 나의 아이덴티티가 없으면 불안해한다. 그렇다면 표상을 못 찾아서 불안한 것인가. 표상을 찾기 바라기 때문에 불안한 것인가. 자아를 찾지 못해서 괴로운 게 아니다. 자아를 찾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 문제가 불교의 고(). 불교에서 버리라는 색()이 바로 표상이다. (나가르주나의 중관론(中觀論))

* 후반부 후기로 계속됩니다.

 

댓글목록

생각통님의 댓글

생각통 작성일

이런 정리를 해주는 샘이 있다니~ 마냥 든든합니다. ^^